소설리스트

149화 (150/156)

* * *

결혼식과 대관식이 모두 끝났다. 함께 술을 마시며 노래했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떠들썩했던 성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요.”

“그러게. 소란스러웠던 게 다 꿈인 것 같다.”

해리가 적막하기까지 한 창밖을 낯설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난 살면서 별로 소란스러울 일이 없었어. 그런 걸 별로 즐기지 않았거든. 그런데 네 옆에 있게 된 후에는 늘 주변이 소란스러워.”

“그게 싫어요?”

“그게 싫었으면 악마다운 수를 써서 진즉에 너한테서 벗어났겠지.”

해리가 픽 웃으며 내 뺨을 매만졌다.

“전부 좋아. 너도, 네가 안고 있는 소란도.”

“나랑 똑같네요. 나도 해리의 모든 게 좋은데.”

나는 웃으며 해리의 목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생일 축하해요, 해리.”

“……어?”

“오늘이잖아요. 겨울의 첫날.”

“알고 있었어?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로 내가 제 생일을 잊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해리 생일을 왜 잊어요? 선물 주기로 한 것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물었을 때는 몰랐잖아.”

“그건,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좋으니까.”

“맞아. 좋아.”

해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보석이네?”

“네. 블랙 다이아몬드예요.”

“왜 하필 블랙 다이아몬드야?”

“해리도 내 색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색?”

해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서 검은색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검은색은 ‘이브리아’에게는 없었다. 그걸 가진 건 진짜 ‘나’다.

“혹시 수수께끼 같은 거야?”

해리가 미간까지 찌푸린 채 의욕적으로 목걸이를 살폈다. 숨어있는 답을 찾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왜 너의 색이 검은색인지, 내가 답을 찾으면 선물 줄 거야?”

“뭐, 만약 찾을 수 있다면요.”

“찾을 수 있어. 나 이런 거 잘 풀거든.”

하지만 해리가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나는 그저 이브리아니까.

“아! 알겠다!”

한참이나 보석을 살피던 해리가 정답을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의 두 눈을 응시했다. 나 역시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건 나를 향한 너의 흑심을 표현한 거야?”

“…….”

그러면 그렇지. 나는 어이없는 대답에 헛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해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쫓아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물었다.

“이브리아, 내 말 맞지? 이거, 네 흑심을 형상화한 거지?”

“해리.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봐요. 그게 맞겠어요?”

나의 타박에 해리가 진지한 얼굴로 내 가슴에 손을 얹더니, 1초도 지나지 않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봤어. 넌 내게 흑심이 가득해. 그래서 이게 검은색인 거야.”

“흑심은 내가 아니라 해리가 있네. 왜 자기 가슴이 아니라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요?”

나의 지적에 해리가 씩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혹시 흑심 있는 남편은 싫어?”

“그게 싫었으면 나다운 수를 써서 진즉에 해리한테서 벗어났겠죠.”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해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넌 정말 멋져, 이브리아.”

애정이 가득 담긴 말에 나 역시 까치발을 들어 해리의 이마에 겨우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정말 예뻐요, 해리.”

나의 말에 해리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응. 그러니까 평생 예뻐해 줘, 내 주인님.”

해리가 몸을 숙여 내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내가 만드는 나의 꽃길은 이 남자와 함께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 * *

이브리아 오베론.

오베론 제국의 건국 황제. 신의 축복을 받은 신족의 시조. 성검과 대마법사의 영원한 주인. 흑룡의 어머니이자 정령왕의 계약자. 어떤 책에서든 빠짐없이 제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군주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쌓으며 제국의 빠른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인재 등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종족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인재를 발굴했고, 그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러 종족을 통합하여 대륙의 평화를 가져왔으며, 군사, 경제, 외교, 문화 전 분야에서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냈다.

위대한 대마법사로 이름 높은 해리 오베론 대공과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위대한 개척자, 신대륙을 발견하고 영토를 확장한 샤를로트 황제이다.

초대 황제 당시의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어 현재까지도 확인할 수 있으나,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엄청난 업적들 때문에 이브리아 황제를 신격화하는 추종자의 과장된 기록이라는 견해도 많다.

가장 확실하게 확인되는 기록은 이브리아 황제의 퇴위이다. 그녀는 딸인 샤를로트가 성인이 되자 단 20년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스스로 황위에서 물러나 샤를로트에게 양위했다. 많은 신하가 만류했으나 황제는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니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후계자가 성인이 되면 황위를 양위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가 이어지는 동안 신족의 피가 옅어져 수명이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줄어든 지금에도 지켜지고 있는 원칙이다.

황위에서 물러난 이후 이브리아 황제의 행적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녀는 남편인 해리 오베론 대공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고, 이후 어떤 기록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한 유력한 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지를 받는 것은 그들이 제국 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기이한 요정 부부라는 설이다. 요정 부부는 대륙 곳곳의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 신묘한 재주로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준 뒤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떠나가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것이 은퇴 후 대륙을 여행했던 황제 부부가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제국민들은 이 설을 지지하여 이브리아 황제와 해리 대공의 조각상을 마을에 세워두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소원을 빌고 있다.

-청소년들의 역사 교양 필독서 <오베론 제국의 군주들> 중 일부 발췌.

에필로그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 긴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에렐로 돌아와 소중한 존재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고요하게 끝을 기다릴 뿐이었다. 미련은 없었다. 이브리아로서의 삶은 모든 순간이 축복처럼 행복했다.

“에렐은 이제 완전히 다른 도시 같아요. 그때 그 깡촌이라고 누가 믿겠어.”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간 에렐은 엄청난 발전으로 제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가 되어있었다. 나와 해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은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옆의 해리도 에렐의 변화가 새삼스러운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맞아요. 어쩔 수 없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단순히 에렐의 풍경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해리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두 손을 그러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마. 넌 충분히 오래 내 곁에 있었어.”

“하지만 남은 날이 더 많겠죠.”

“나의 숙명이지. 원래 악마들은 만남보다 이별에 더 익숙하거든.”

해리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어른스럽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해리는 이런 얼굴도 할 수 있게 됐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한 선택이야. 미안해하지 마. 알겠지?”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난 평생 이런 행복을 모르고 살았을 거야. 덕분에 한 번은 누렸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

해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마 그는 나보다 오래전부터 이별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귓가에 울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무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같았다.

“해리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울어. 그럼 네가 슬퍼할 거잖아.”

“그럼 약속해요. 안 울겠다고.”

“……그렇게 할게.”

해리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내 손을 그러쥔 그의 손도, 대답하는 목소리도 모두 떨리고 있었다.

‘벌써 울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눈을 떠서 해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잘 가, 이브리아.”

다정한 해리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announces the departure of Flight 707 to Incheon.]

바람 소리에서 시작된 소음은 조금씩 의미를 갖추며 명확해지고 있었다.

[All passengers to Incheon, please go to Gate 9.]

흔하게 듣던 공항 안내 방송이었다.

‘어? 안내 방송?’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무겁던 눈꺼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쉽게 뜨였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은 아주 익숙했다.

“……공항이잖아.”

진짜 ‘내’가 수십, 수백 번을 방문했던 페루의 리마 공항이었다.

“이게 무슨….”

너무 얼떨떨했다. 나는 분명 여기에서 출발한 비행기를 탔었고, 큰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했었다.

“꿈인가?”

저승으로 가기 전 짧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 선명했다. 소리와 공기. 모두 현실이었다.

‘……그럼 이브리아 쪽이 꿈?’

그러나 그쪽 역시 선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냐. 그게 꿈일 수는 없지.’

탑승 안내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분주하게 게이트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 한 사람만이 덩그러니 제자리에 남아 이 기이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해리가 내 손을 잡았던 기억이 너무 선명한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해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꼭 쥐고 있던 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해리의 손 대신 여권과 항공권이 덜렁 들려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있는 사람이 여권과 항공권을 쥐고 있는 건 당연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여권과 항공권이 하나가 아니었다. 여권도 두 개, 항공권도 두 장. 아무리 살펴도 똑같았다.

‘이때 난 혼자 출장 왔었는데.’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여권을 펼쳤다. 신상 정보가 담긴 페이지에 누군가가 남긴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이건 마지막 선물이에요.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줬어요. 내 땅에 평화를 가져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발신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상대가 솔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날 원래 세계로 보내 준 거구나.’

솔은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는 원래의 세계로 나를 보내 줄 수 있다고 했었다. 다른 소원을 빌었기에 그 소원은 당연히 이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마지막 선물이라니.”

고마운 건지 얄미운 건지 모를 일이다. 이제 와 내가 평범하게, 그 모든 것을 잊고 외롭게 살 수 있을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솔의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포스트잇이 가리고 있던 페이지가 드러나며 여권의 주인이 모습을 내밀었다.

“……어?”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눈앞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권의 주인 이름은 해리 오베론. 사진도 내가 기억하는 해리였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진짜 이름을 부르면 악마가 나타난다. 그게 법칙이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조심스럽게 한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테오하리스.”

그 순간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진짜 해리였다. 정말로 해리가 나타났다.

“야, 어엉, 왜 하필 지금 불러. 흐윽, 내가 지금, 으엉, 계약할 기분이 아니거든?”

해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자신을 부른 게 누구인지 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으엉, 이브리아…….”

그는 연신 내 이름을 부르며 숫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울지 않을 거라더니. 그렇게 어른스러운 척을 다 하더니. 나는 어쩐지 이 상황이 우스워져 웃음을 터트리며 해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해리.”

내 목소리에 해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물로 엉망이 된 잘생긴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그 이름을…….”

“검은색.”

나는 내 새카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해리를 쳐다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 눈동자 역시 검은색이었다. 그것을 본 해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검은색이 왜 내 색이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죠? 그거, 진짜 내 흑심을 형상화한 거 아니었거든요?”

내 말이 이어질 때마다 해리의 눈이 더욱 커졌다.

“설마…… 너…… 이브리아…….”

그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붙잡으며 설마 하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나예요. 지금은 다른 이름이지만요.”

나는 씩 웃으며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나한테 소환당했네요, 해리.”

두 번째 소환.

이게 태양신의 진짜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냥 악역으로 살겠습니다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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