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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다음은 대관식이었다. 나는 대관식을 위해 마련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해리와 함께 제단 앞에 나섰다.
제단 아래는 대관식을 지켜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 있던 사람들로 가득했다. 작은 시골 마을 에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운집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제 한 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니, 아마 앞으로는 이렇게 분주하고 떠들썩한 날이 더 많을 것이다.
“태양신을 대신하여 당신께 묻겠습니다. 신의 선택을 받은 군주여, 왕관을 쓸 준비가 되었는가?”
왕관을 들고 내게 질문하는 사제의 얼굴은 낯설었다. 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솔. 제대로 속이려면 얼굴을 바꾸라는 내 조언을 잘 따른 건 좋아요. 하지만 목소리가 똑같으면 무슨 소용인가요?”
얼굴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솔이었다. 나의 지적에 낯선 얼굴의 사제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군요. 그것도 앞으로 참고할게요. 앞으로는 고칠 게 있다면 한 번에 알려주면 고맙겠어요.”
“고칠 게 있다면 한 번에 알려달라니…… 그런 것 정도는 알아서 생각하라고요. 신이잖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솔에게 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내 앞에 나타날 생각이에요? 이런 어설픈 위장을 하고?”
솔은 대답 대신 처음 내게 했던 질문을 반복하는 것으로 물음에 대한 답을 슬쩍 피했다.
“……신을 대신하여 당신께 묻습니다. 신의 선택을 받은 군주여, 왕관을 쓸 준비가 되었는가?”
결국 자기 기분이 내킬 때면 언제든 다시 나타나겠다는 소리였다.
‘됐어. 이젠 더 깔아 줄 꽃길도 없을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솔의 손에 들린 왕관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쓰고 왕위에 오르면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 태양신의 거지 같은 꽃길 행렬도 이 이상을 내게 안겨줄 수는 없을 것이다.
“왕관을 쓸 준비가 되었습니다.”
내가 무릎을 굽혀 몸을 숙이자, 솔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신께서 준비된 자에게 왕관과 함께 축복을 내리니, 그대 자손이 이 땅을 다스리는 동안 번영과 평화가 있으리라!”
솔이 축복과 함께 나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는 순간, 등 뒤에서 번쩍하고 선명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에 잔뜩 신이 난 유피테르가 후광을 쏟아 낸 것이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와!”
“신께서 미래를 축복하신다!”
나는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왕관을 쓴 채 열광하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갔다.
“이 자리에서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왕관을 쓰고, 이 땅을 다스릴 권능을 부여받았다. 오늘부터 이 나라의 이름을 오베론 제국으로 칭하고, 황제로서 군림하겠다. 나의 곁에는 대마법사의 후손이 대공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나의 선언에 사람들의 환호가 커졌다.
“오베론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공 전하 만세!”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반짝이는 꽃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 드워프들이 대관식을 위해 특별히 만든 꽃가루였다. 하늘 위에서 그 꽃가루를 뿌리고 있는 건 와이번들, 더 정확히는 와이번을 조종하는 서리기사단원들이었다. 제국기사단에게 호위를 빼앗겼으니 이런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것 봐! 그 유명한 와이번 기사단이야!”
“와이번이 에렐을, 오베론 제국을 수호할 거야!”
“그런데 저것도 와이번이야? 좀 다르게 생겼는데?”
사람들의 의문처럼 하늘을 나는 와이번 사이에 유독 거대한 생명체가 하나 섞여 있었다. 피부는 똑같이 검은색이었지만 풍기는 분위며 위압감은 와이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흑룡이다!”
누군가가 그 생명체의 정체를 알아채고 소리쳤다. 그 요란한 외침과 함께 흑룡, 로이가 유유히 제단 위에 내려앉았다.
“로이.”
“이브.”
로이가 제 얼굴을 내게 비볐다. 누가 봐도 애교를 부리는 모양새에 아래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된 걸 축하해, 이브. 나쁜 사람들이 못 건드리게 내가 옆에서 계속 지켜줄게!”
“고마워. 그런데 왜 본체로 나타난 거야?”
결혼식 때만 해도 새 옷을 차려입고 인간의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로이였다. 당연히 대관식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날 줄 알았다.
“내가 이 모습으로 나타나서 축하해주면 이브한테 더 도움이 될 거랬어.”
“누가 그런 조언을 했는데?”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로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누구긴 누구겠어?]
허공에서 자신만만하게 모습을 드러낸 아스페리츠였다.
[계약자의 주위에서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라고.]
그가 모두에게 보란 듯이 거대하게 몸집을 키워 하늘 위를 맴돌았다.
[꼬마들아! 나와서 분위기 좀 띄워라!]
아스페리츠가 소리치자 구름 속에서 작은 정령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꽃가루 사이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현실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사람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쪽에서부터 성스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깊은 숲속에서 들었던 엘프들의 목소리였다. 정령들은 엘프의 노랫소리에 맞춰 더욱 신나게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길잡이여. 우리도 그대를 따른다.”
점점 커지는 노랫소리 사이로 엘프들을 대표해 이카난이 앞으로 나섰다.
“이건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이다, 스승이여.”
즉위 선물이라더니, 이카난이 내가 아닌 해리에게 나뭇잎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건 뭔데?”
“다산을 기원하는 목걸이다.”
“……다산?”
황당해하는 해리를 향해 이카난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인간의 군주는 훌륭한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좋다더군. 그래서 모두 함께 다산을 기원하는 목걸이를 만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원래 훌륭한 아이를 만드는 건 사내의 역량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스승에게 걸어주는 것이 옳지.”
“아. 그런 거였어?”
“그런 거다, 스승이여.”
이카난의 확답에 해리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열심히 할게, 이브리아. 걱정하지 마.”
‘아니. 그걸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는데?’
해리가 그렇게 영문모를 다짐을 하는 사이,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설마 우리가 제일 늦은 거예요?”
줄줄이 들어서는 드워프들 모두 웬만한 어른 머리통보다 큰 황금을 지고 있었다. 번쩍이는 보물의 등장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많은 황금이 다 어디에서 났어요?”
나의 질문에 가장 선두에 선 라파쉬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즉위 선물로 뭘 줄까 고민하다가 금광을 하나 찾아냈어요.”
“……금광을 찾아요? 선물로 주려고?”
“네.”
“금광이 이렇게 뚝딱 찾아지는 거였나요……?”
“우리 드워프들에게 금맥을 찾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요.”
얼떨떨해 눈을 껌뻑이는 나를 보며 라파쉬가 크게 웃더니, 제 등에 지고 있던 금덩이를 내게 안겨주었다. 황금의 엄청난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 금광에서 나오는 금은 전부 이브리아 거예요! 예산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아니, 하지만…….”
“혹시 금이 떨어질까 봐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거기서 금이 다 떨어지면 금방 다른 거 하나 또 찾아 줄 테니까!”
“네? 다른 거 하나 더요?”
“음. 다음은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할까요?”
시원시원한 제안에 나는 감격해서 라파쉬를 바라보았다.
“……라파쉬. 나 라파쉬랑 결혼할 걸 그랬나 봐요. 지금이라도 무르고 라파쉬랑 결혼할까요?”
내 말에 라파쉬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양할게요. 이브는 좋은 친구지만, 내 연인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절 거절한 드워프는 라파쉬가 처음이에요. 더 매력적이네요.”
“그럼요. 나는 쉬운 드워프가 아니거든요.”
라파쉬가 장난스럽게 턱을 치켜들자 옆에 서 있던 해리가 조심스럽게 내 옷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울상이 된 해리의 얼굴이 보였다.
“이브리아. 나도 다 줄 수 있어! 더 어려운 것도 가능해!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올까?”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해리라면 간단하게 하늘의 별을 따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따와서 어디에 쓰는데요?”
“어?”
“난 별보다 다이아몬드가 좋은데요?”
“어어…….”
할 말을 잃고 눈을 굴리는 해리를 보며 라파쉬가 어깨를 으쓱했다.
“순진한 신랑을 둬서 고생이 많겠어요, 이브리아.”
“놀리고 가르치는 재미가 있답니다, 라파쉬.”
“과연. 그런 재미도 있겠네요.”
내 말에 유쾌한 웃음을 흘리던 라파쉬가 이내 진지한 얼굴이 되어 내 손을 붙잡았다.
“이브리아.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언제나 당신 편이에요. 힘든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우릴 찾아요.”
라파쉬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나는 와이번, 노래를 부르는 엘프들, 황금과 함께 찾아온 드워프들과 어느새 내 곁에 머물게 된 수많은 사람들. 거기에 정령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아스페리츠와 오랜만에 원래 모습을 뽐내고 있는 로이, 나를 이 세상에 끌고 온 태양신까지. 언제 내 옆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함께하게 된 것일까.
[이브리아.]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머릿속에서 솔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선물한 꽃길은 어땠나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했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주 거지 같았어요.]
[……그 정도였어요?]
[이것도 상당히 순화해서 말한 건데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솔의 반응이 잠잠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모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앞으로는 나태한 황제가 되어서 진짜 꽃길을 걸을 생각이에요. 당신이 만든 꽃길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꽃길이요.]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가장 든든한 나의 우방, 해리의 손을 붙잡으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