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8/156)

* * *

와이번들의 도움으로 왕성 사람들의 에렐 이주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울의 첫날, 새 보금자리에서 대관식과 결혼식을 치르는 것뿐이었다. 기존의 수도 귀족들도 다가오는 변화에 발맞춰 하나둘 에렐로 이주하는 중이었다.

오베론 공작은 누구보다 빠르게 에렐로 이주한 수도 귀족이었다. 원래 에렐이 공작령이었으니, 다른 귀족들처럼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발을 동동 구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치볼드와 함께 내가 사교계를 떠나 머물렀던 저택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그곳에 짐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기세로 새 성에 발을 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오베론 공작의 얼굴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매서웠다.

“난 말렸어.”

아치볼드는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속삭였다.

“적어도 결혼식은 치른 뒤에 하자고. 그날까진 얼굴이 멀쩡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도대체 뭘?’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아치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랑 결혼하고 대공이 될 그분 말이야.”

해리는 나와 결혼한 뒤 오베론의 성을 따르고 대공의 지위를 누릴 예정이었다. 결론이 그렇게 나자 자기 아들을 그 자리에 밀어 넣고 싶어 했던 많은 귀족들이 크게 아쉬워했다. 영지도 하사하지 않고, 후대에 물려줄 수도 없는 작위지만 대공이라는 이름 자체에 부여된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들이 만족한 부분은 해리에게 뒷배가 되어줄 가문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자기 아들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다른 유력 가문의 아들에게도 그 자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해리가 왜요?”

“원래도 볼 건 겉가죽밖에 없는 놈이 널 꾀었다면서 싫어하셨잖아.”

“하지만 그 겉가죽이 너무 훌륭하잖아요. 저 정도면 대마법사가 아니라 길거리 거지여도 데리고 살 텐데.”

“뭐, 그거야 그렇지만…….”

해리의 얼굴을 떠올린 아치볼드가 크게 반박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네가 좋다고 하니 결혼까지는 별말 않으셨지만, 제대로 결혼하기도 전에 일을 치른 건 용납이 안 되셨겠지. 아버지 성격을 생각하면 말이야.”

“일 치르자고 홀린 건 해리가 아니라 나인데…….”

“글쎄. 지금 아버지께 그런 말이 통할까?”

아치볼드가 턱 끝으로 공작을 가리켰다. 해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더욱 흉흉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렇네요.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하겠네요.”

“그렇다니까.”

나와 아치볼드가 그렇게 수군거리는 동안 오베론 공작이 그토록 기다리던 문제의 남자가 등장했다. 오베론 공작이 성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맞이하러 온 해리였다.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자신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해리를 바라보는 오베론 공작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해리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살피던 공작이 고개를 돌려 아치볼드에게 물었다.

“아치볼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저 녀석을 때렸나?”

“아뇨, 아버지. 다행히 그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으셨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셨을 정도면 공작 자리에서 물러나셔야죠.”

“그런데 저 놈의 꼴이 벌써 왜 저렇지?”

“그러게요.”

두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런 황당한 대화를 나눌 정도로 해리의 몰골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안색이 초췌하고, 눈에는 생기가 없다. 누가 봐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의 사내를 앞에 두고 오베론 공작과 아치볼드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이브리아. 혹시 저 녀석이 심각한 병에라도 걸린 거냐?”

“저 꼴을 보니 결혼식보다 장례를 먼저 치르게 될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상태가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먹기만 하면 전부 게워내는 바람에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확실히 병은 아니래요. 의사가 제대로 진찰했어요.”

“먹기만 하면 전부 게워내는 데 그게 병이 아니야? 병이 아니고서는 이런 몰골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나도 해리가 병에 걸린 줄 알았다. 음식을 보는 족족 헛구역질을 하고, 겨우 뭔가를 먹어도 금세 게워내니 식중독에라도 걸린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해리를 진단한 의사는 그의 증상이 병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병이 아니라 단순한 입덧이래요.”

“……입덧?”

아치볼드가 제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가리켰다.

“입덧은 저쪽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보통은 그렇죠. 그런데 종종 남편이 대신 입덧을 하는 경우도 있대요.”

“그래서 넌 이렇게 멀쩡한데, 저쪽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난리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의 몸 상태는 임신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입덧은커녕 오히려 식욕이 돌아 먹는 양이 평소보다 더 많아졌다.

해리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아무리 준비해줘도 식욕이 없다며 거절하고, 특별히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도 않는다고 했다.

헛구역질이 음식 냄새에만 반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음식 이름을 듣거나 음식의 맛을 상상하기만 해도 역겨운 냄새가 떠올라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해리를 진찰한 의사마저도 이렇게 입덧을 심하게 하는 분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덕분에 성의 주방장들은 입덧으로 고생 중인 미래의 대공께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해리가 임산부가 된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저는 괜찮습니…… 우웁!”

모두의 시선을 받은 해리가 괜찮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헛구역질해대며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었는지 아치볼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에 비해 의외로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공작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딸이다.”

“딸이라뇨?”

“아이 말이다. 아마 딸일 거다.”

이 세계에는 초음파처럼 아이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 당연히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성별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의 장담에는 꽤 강력한 확신이 묻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나와 함께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작을 쳐다보고 있던 아치볼드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께서도 하셨어. 입덧.”

“네?”

“어머니께서 널 임신하셨을 때, 아버지도 입덧을 하셨다고 했어. 날 가졌을 땐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게 정말이냐는 듯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말 하셨구나. 입덧.’

저 서늘한 오베론 공작이 부인을 대신해 입덧을 했었다니.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도 딸이라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아들을 가졌을 땐 안 했고, 딸을 가졌을 땐 하셨으니.”

아치볼드의 시선이 내 배를 향했다. 마치 배 속의 아이에게 네가 정말 딸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과일을 좀 보내주마.”

오베론 공작이 아직도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해리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곧 결혼식을 올릴 신랑의 몰골이 이래서야 되겠나. 볼 건 겉가죽뿐인데, 그거라도 제대로 갈고 닦아야지.”

혀를 차며 말하고 있었지만 공작의 말 속에는 묘한 유대감과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아무것도 못 먹었을 때도 동쪽에서만 나는 락시 열매는 거북하지 않았다. 아마 저 녀석도 그건 먹을 수 있을 거다.”

“응징하러 오셨으면서, 한 대 치기는커녕 과일을 선물로 보내주시겠다고요? 게다가 락시면 제철도 아니라 구하기 힘들 텐데.”

아치볼드가 그렇게 투덜거린 뒤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조심해라. 아버지는 중간을 모르시는 분이거든. 아마 내일이면 동부의 락시란 락시는 전부 성에 와있을 거다.”

* * *

락시 쿠키, 락시 파이, 락시 주스 등등.

음식 냄새만 떠올려도 구역질이 난다던 해리가 락시로 만든 음식에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해리가 처음 락시 열매 하나를 다 먹어치웠을 때, 그것을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던지. 해리와 매일 투닥거리던 아스페리츠마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자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골골거리던 해리도 빠르게 기운을 찾았다. 덕분에 나는 결혼식 도중 신랑이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운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돼요.”

나는 귓가에 속삭이는 엠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은 거울 속 여인. 결혼식과 대관식을 눈앞에 둔 나의 모습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조금 낯설었다.

“저희의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오늘은 무엇보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빛나실 거예요.”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 삼인방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황제의 직속 시녀가 될 엠마의 추천에 따라 앞으로 나의 치장을 전담할 예정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도착했어?”

“네. 모두 자리를 잡고 주인공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라.’

아무래도 주인공이라는 말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캐서린이며,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우스운 조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나를 주인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캐서린은 태양신의 심장과 함께 마력을 잃고 절망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의 답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언젠가 그녀가 답을 찾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면 나와의 관계도 조금 달라질 것이다.

카시안 역시 그녀가 답을 찾고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리던에게 후작의 작위를 내리기로 했다. 일부 귀족들은 전대 왕조의 후손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곁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조언했지만, 나는 그들이 꼭 필요했다.

‘적당히 일을 떠넘길 사람은 많을수록 좋단 말이야.’

이미 에렐에서 부려 본 노예 왕자들이 아닌가. 리던은 처음부터 나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며 의욕에 넘쳐 있었고, 카시안은 국왕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고자 저질렀던 과오를 제국에 봉사함으로써 갚고 싶어 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의지를 받아들여 앞으로도 신나게 노예 왕자, 아니, 노예 후작들을 부릴 예정이었다.

그 대열에는 남작에서 후작으로 지위가 올라간 인세티아 후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한적한 에렐이 좋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에렐의 중심에 우뚝 세워진 성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메이슨 재상 역시 제국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는 벌써 에렐 곳곳을 돌아다니며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물론, 물음표 살인마와 지식 폭력배의 면모도 버리지 못해서 실무자들은 그의 얼굴만 보이면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흑마법사를 찾아 준 일로 보수를 받으러 왔던 루크는 수도가 이전된 바람에 정보 길드의 본거지도 에렐로 옮기게 됐다며 투덜거렸다. 그는 춥고 소박한 건 질색이라며, 추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소박한 건 금방 화려하게 바꿔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언젠가 에렐의 광장에서도 옛 수도가 그랬듯 루크가 주도하는 도박판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답니다. 음식이 락시로 만든 것밖에 없다며 손님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제외하면요.”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것이 긴장해서라고 생각했는지, 엠마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해리의 입덧은 아직도 심각한 수준이라, 그가 결혼식 도중 헛구역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장의 모든 음식은 락시로 만들어졌다. 화려한 만찬을 기대하고 왔던 손님들이 락시 파티에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락시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렇죠. 하지만 아무리 락시가 맛있었도 락시 파이에, 락시 스테이크에, 락시 주스까지 마시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엠마의 너스레에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 삼인방과 나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불만을 잠재우려면 빨리 내가 등장하는 수밖에 없겠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엘을 비롯한 왕립기사단의 기사들이 나를 호위했다.

그들은 이제 제레인트의 왕립기사단이 아니라, 오베론의 제국기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검을 들게 되었다. 기사들에게 모시는 주인을 바꾸는 건 굉장히 큰일이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떠나도 좋다고 말했지만, 기사단원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은 처음부터 성검의 주인이었다며 모두 내 곁에 남았다.

덕분에 나는 내게 충성하는 기사단을 2개나 가지게 됐다. 내가 평범한 이브리아 오베론일 때부터 충성을 맹세했던 서리기사단원들과 오랫동안 성검의 주인을 기다려온 제국기사단들은 굉장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오늘 결혼식과 대관식에서 나를 수호하는 역할을 누가 맡을 것인지를 놓고서도 대단한 설전을 벌였다. 이번에는 엘 로이츠라는 대단한 기사를 보유한 제국기사단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서리기사단은 이게 다 자신들에게 간판 기사가 없기 때문이라며, 무서운 기세로 성장 중인 라이오넬을 엘 로이츠 같은 스타 기사로 만들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스타 기사가 되기 전에 검이나 흘리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런 생각은 속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열심히 격려를 해줬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서 걸으며 나를 호위하던 엘이 옆으로 비켜서 문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나와 해리는 성 내의 작은 신전에서 소수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함께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 뒤, 푸른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제단으로 이동해 제국의 시작을 선포하며 각각 황제의 관과 대공의 작위를 받게 된다.

“문을 열까요?”

엘이 내게 질문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대단한 하루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 *

나는 오베론 공작의 손을 잡고 익숙한 사람들을 지나 해리의 앞에 섰다. 특별한 날에 열심히 꾸민 건 해리도 마찬가지여서,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번듯해 보였다.

“이브리아.”

내 손을 해리에게 넘겨주기 전, 오베론 공작이 나를 부른 뒤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인가 싶어 가만히 공작을 보고 있으니, 그가 조심스럽게 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런 건 엄청 다정한 부녀들이나 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물론이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까지 놀라서 입을 떡 벌리자 그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오늘이 딸에게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감히 황제 폐하께는 그러지 못할 테니까.”

늘 서늘한 공작의 얼굴에 은은한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어 딸의 뺨에 입을 맞춘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그러라고 조언한 거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베론 공작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마 아치볼드가 그렇게 하시라며,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며 오베론 공작을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치볼드가 틀렸다.

“이런 건 앞으로도 계속하실 수 있어요. 황제가 뭐 별건가요.”

“상당히 별거지. 모두에게 그럴 거다.”

“하지만 저한텐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하세요.”

내가 웃으며 공작이 입을 맞췄던 뺨을 두드리자, 그가 다시 한번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당장 하시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내 입으로 말했던 ‘하고 싶으시면’의 순간이 바로 지금일 줄은 몰랐다.

겨우 몇 분 전에 내 뺨에 입을 맞추지 않았던가.

“아버지. 그렇게 자주 제 뺨에 입을 맞추고 싶으세요? 그동안 어떻게 참으셨어요?”

“그…….”

나의 질문에 오베론 공작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기침하며 나의 등을 해리 쪽으로 떠밀었다.

“이제 저 녀석에게로 가야지. 널 기다리다 목이 빠지겠구나.”

해리는 신부에게 손을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늘의 나는 어느 때보다 예쁘니까 말이다. 나는 씩 웃으며 해리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항 없이 그대로 내 손길에 끌려온 해리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이브리아. 어쩌지? 네가 너무 예뻐서 울 것 같아.”

“여기서 울면 평생, 아니, 죽은 뒤에도 놀림 받을걸요.”

“하지만 네가 너무 예쁘단 말이야. 정말…… 넌 왜 이렇게 예쁜 걸까?”

해리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거칠게 굴면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깃털이 뺨을 스치는 듯 간지러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내 이브리아.”

그때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해리가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한 듯 서서히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아 온 입술이 더욱 깊게 맞닿으려는 순간,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제가 요란하게 헛기침하며 해리를 저지했다.

“저기요, 신랑. 벌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순서가 문제였다. 맹세의 키스는 결혼식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혼인 서약이며 반지 교환도 하기 전이었다. 완전히 순서를 건너뛰어 버린 것이다.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조금 참아주십시오. 그렇게 다 건너뛰실 거면 제가 여기에 서 있을 이유가 없거든요. 이 자리에 오신 하객들도 마찬가지고요.”

사제의 지적에 번뜩 정신을 차린 해리가 서둘러 물러서며 사과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사제가 신랑을 혼내고, 신랑이 사제에게 사과하는 우스운 결혼식 풍경에 하객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나저러나 놀림 받는 건 확정이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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