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선물
어느새 내가 처음 이브리아가 되어 눈을 떴던 첫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대단한 악마를 소환해버렸던 그 겨울. 날이 갈수록 서늘해져 가는 공기 덕분에 나는 벌써 그 계절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북부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남부의 겨울 역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라 사람들은 조금씩 월동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에서도 가장 춥다는 에렐에서 온 엠마는 겨우 이 정도 바람에 호들갑을 떨어대는 사람들이 참으로 의아한 모양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거죠? 요즘 저런 천으로 만든 옷이 유행인가요?”
“저런 게 유행일 리가 있겠어? 다들 추우니까 그렇지. 이제 곧 겨울이잖아. 벌써 공기가 차가워.”
“그렇게 공기가 차가운가요?”
엠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찬바람에 손이 굳지도 않았고,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나오지도 않는걸요.”
그런 수준의 추위만 추위라고 정의한다면 기준이 너무 빡빡하지 않나. 나는 에렐 토박이의 추위 가늠하는 법에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엠마. 그 정도 추위가 되면 옷을 두껍게 입는 걸로는 이겨낼 수가 없지. 에렐 사람들은 추위에 너무 강하다니까.”
내 말에 엠마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젠 아가씨도 에렐 사람이신걸요.”
“난 이제 겨우 1년 차인걸.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나는 처음 만난 날, 그 엄청난 추위에서도 얇은 옷만 입고 있던 엠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작이나 집사의 옷도 그렇게 두툼하지는 않았었다.
‘훨씬 든든하게 껴입은 나만 오들오들 떨면서 따뜻한 벽난로를 찾아댔지.’
에렐의 추위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그들처럼 얇은 옷만 입고 버틸 자신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란 말이야.’
나는 당연한 듯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을 앞두고 있다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나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교계에서 외면당하고 시골로 도망친 마녀가 제국의 황제로서 왕관을 쓸 날을 기다리고 있는 제왕이 된 것이다.
“앞으로 에렐에서 지낼 날이 더 많으실 테니까요. 금세 저처럼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렇지. 앞으로 내 집은 에렐이 될 테니까.”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와 엠마 사이로 아스페리츠가 불쑥 나타났다.
[난 겨울이 싫어. 북쪽의 겨울은 더 싫고.]
아스페리츠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겨울이 되면 아이들이 전부 꽁꽁 얼어붙어. 춥다며 비명을 지르는 녀석들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라니까.]
아스페리츠의 수다에 엠마는 익숙한 듯 앞치마에서 솜뭉치를 꺼내 귀를 틀어막았다. 정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엠마에게는 아스페리츠의 목소리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처럼 들린다고 했다.
‘난 아스페리츠의 말을 못 알아들을 때도 그렇게 귀가 아프진 않았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정령과의 상성이 좋지 않은 인간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엠마와 아스페리츠의 상성이 정말 나쁘다는 소리였다. 나는 엠마에게 물러가도 좋다고 눈짓을 보낸 뒤 아스페리츠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추위가 싫다면 아스페리츠는 이곳에 남아 있어도 돼.”
대관식은 새로운 수도가 될 에렐에서 열리게 될 예정이었다. 성이 한 달 안으로 완성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행정관들의 추천을 따른 결과였다. 그들은 새로운 수도의 아름다운 성에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추대받은 제왕이 왕관을 쓰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성의 완공을 기다렸다가 그곳에서 대관식을 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대관식과 함께 치르기로 한 결혼식도 자연스레 그날로 확정이 났다.
‘사실 이 문제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다고.’
행정관들이 입씨름을 벌인 문제는 대관식과 결혼식 중 어떤 의식이 먼저 이뤄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그 순서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었지만, 행정관들의 입장은 달랐다. 대관식이 먼저라면 내가 황제의 신분으로, 결혼식이 먼저라면 곧 왕위에 오를 레이디 오베론의 신분으로 식을 치르게 되는 차이가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결혼식을 먼저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아치볼드의 조언 덕분이었다.
-네가 레이디 오베론의 신분으로 결혼식을 치러야만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위치에서 네 옆에 설 수 있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가 황제가 된 뒤 결혼식을 치르면, 나는 만인의 위에 선 군주로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므로 오베론 공작은 내 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가 아닌 미묘한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건 이브리아 오베론의 오라버니인 아치볼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떠나 나 역시도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라 네 오라버니로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거든. 그러니 결혼식을 먼저 했으면 좋겠다.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아치볼드는 오베론 공작이 요즘 집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지도 슬쩍 귀띔해주며 투덜거렸다.
-네가 기특하면서도 엄청나게 속상하신가 봐. 겉으로는 아무 말 안 하셔도,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을 때부터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서 어릴 적 네 초상화를 보며 훌쩍거리셨다니까?
-아버지께서 오라버니 초상화가 아니라 내 초상화만 안고 훌쩍여서 속상한 거예요?
-뭐?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아버지가 내 초상화를 보면서 훌쩍이다니….
지나치게 질색하는 아치볼드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참으로 알기 힘든 부자였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아버지와 황제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공작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로서 이브리아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오베론 공작은 내가 그에게 준 선물에 감동해 또다시 서재에 틀어박혀 내 초상화를 끌어안고 훌쩍였다고 한다. 아치볼드가 전한 말이니, 어쩌면 과장 섞인 농담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겨울의 에렐에서 열리는 결혼식과 대관식이라…….’
에렐의 겨울을 겪어보지 못한 수도 촌뜨기들에게는 추위를 견뎌내는 것부터가 큰일이 될 것이다. 새 수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처음 에렐을 찾았을 때의 나처럼 얼마나 엄청난 추위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을 터였다.
[계약자. 나보고 여기 남으라니.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날 떼어놓으려는 거지?]
순수하게 호의로 한 제안에 아스페리츠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다 알아! 악마 놈이랑 둘이서만 재미를 보려는 거잖아! 내게 그런 어설픈 수는 안 통해.]
아스페리츠는 그렇게 말하며 내 의도를 전부 다 간파하고 있다는 듯 거만하게 코웃음을 흘리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 아스페리츠를 따라 나도 같이 턱을 치켜들었다.
“아니거든? 아스페리츠가 있든 없든, 내가 해리랑 재미를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
당당한 나의 태도에 아스페리츠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이브!”
아스페리츠가 물고기처럼-사실 하반신은 물고기가 맞지만-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고 로이가 들어섰다. 이제는 자신의 몸집이 버겁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 로이가 어린 모습이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그런 로이를 겨우 받아냈다.
“이브! 나 새 옷 입었어! 엄청 멋져.”
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왔나 했더니 새 옷을 자랑하러 온 모양이었다. 성인의 모습으로 자란 것이 오래되지 않았던 탓에 로이는 그럴듯한 옷이 하나도 없었다. 그간 이카난의 옷을 빌려 입었다고 하는데, 로이의 몸집이 이카난보다 훨씬 큰 탓에 늘 소매와 바짓단이 짧았다. 그런 꼴로 번듯한 의식에 참여할 수는 없으니 이번 기회에 사람을 불러 제대로 옷을 맞추게 했다.
“로이. 이렇게 날 껴안고 있으면 새 옷이 어떤지 볼 수가 없잖아.”
“아. 그렇지.”
로이가 금세 내 말에 수긍하고 내 품에서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그는 두 팔을 살짝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새 옷을 입은 제 모습을 구석구석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인 드래곤답게 원래도 번듯한 로이였지만, 옷을 멋지게 차려입으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정말 잘 어울려! 로이는 마음에 들어?”
“이브가 준 거잖아. 그럼 다 좋아!”
옷을 평가받은 로이가 다시 나를 꼭 껴안았다.
“이거 말고 다른 옷은? 여러 벌 지어달라고 말했는데.”
“응. 그것도 전부 입어봤어! 사람을 멀리 날려버리는 것보다 옷 갈아입는 게 더 힘든 일인 줄 몰랐어…….”
로이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주한 시녀들과 디자이너의 손길에 따라 수십 벌을 입고 벗었을 테니 기운이 빠질 만도 했다. 나는 위로의 의미로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로이가 고개를 번쩍 들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브는 새 옷 없어?”
“나?”
“응. 이브는 결혼식에서 뭐 입어? 이브 옷 보고 싶어.”
결혼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로이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로이는 나와 해리의 결혼식을 누구보다 가장 반기는 존재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로이가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 결혼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로이. 결혼한다고 바로 아이가 생기는 건 아냐.”
나의 말에 로이가 금세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결혼식 날 바로 만들어주면 안 돼?”
“음……. 시도는 해보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뜻대로 될 때까지 하면? 그러면 되잖아! 아이 만들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마!”
로이가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말리지 않았다가는 결혼 첫날밤 신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문 앞을 지킬 기세였다.
“아니, 그런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빨리 동생 보고 싶은데…… 동생이 태어나면 내가 정말 잘 돌봐줄 건데…….”
동생을 잘 돌봐주겠다니. 이처럼 믿음직스럽지 않은 다짐이 있을까.
‘애가 애를 보는 꼴이겠지.’
어쩌면 빨리 철이 든 아이가 덩치만 어른인 로이를 돌봐주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로이.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 보여줄까?”
나는 시무룩한 로이를 달래주기 위해 웨딩드레스로 그를 꼬드겼다. 다행히 로이는 내 웨딩드레스에 관심을 보였다.
“볼래!”
“그래. 이쪽이야.”
나는 로이의 손을 잡아끌어 방에 딸린 드레스룸으로 그를 안내했다.
드레스룸 중앙에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와 대관식을 위한 드레스 두 벌이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하얀 드레스는 결혼식에, 푸른 드레스는 대관식에서 입을 거야.”
“이렇게 반짝이는 옷은 처음 봐.”
드레스를 잘 모르는 로이가 입을 벌리며 감탄할 정도로 드레스는 화려했다. 멀리서 의식을 지켜볼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눈에 띄게 만들다 보니 일반적인 드레스보다 훨씬 장식이 많은 편이었다. 다행히 내가 수수한 디자인보다 화려한 디자인이 더 잘 어울리는 편이라,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은 피할 수 있었다.
“이브가 빨리 이 드레스 입었으면 좋겠어. 엄청 잘 어울릴 거야!”
[그래. 뭐, 잘 어울리겠네.]
로이는 물론 아스페리츠까지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드레스를 입을 날은 정해져 있었다.
‘겨울의 첫날.’
그날, 에렐에서 결혼식과 대관식이 함께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