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2/156)

* * *

접견실로 들어서자 인세티아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제대로 인사를 올려야 할까요?”

“됐어요. 아직 대관식을 한 것도 아닌데요.”

나는 당장이라도 부담스러운 인사를 하려는 듯한 인세티아 남작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대관식을 했다고 해도 남작은 그런 인사 면제라고요.”

“그건 상당한 특별대우인데요.”

“남작은 그럴 자격이 있죠. 어서 앉아요.”

나는 남작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가 권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갑자기 왕이 되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왕이라는 게 어쩌다 보니 될 수 있는 거였습니까?”

“그렇던데요.”

“왕이 무슨 동네 촌장 같은 것도 아닌데…….”

내 대답에 인세티아 남작이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상한 걸 계속 주워오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결국에는 한 나라의 왕관까지 주워오셨군요.”

“내가 원해서 주워온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밖에서는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왕관을 원해서 얻은 게 아니라니요.”

“그러는 남작은요. 왕관을 주워왔다고 말하는 건 괜찮은 줄 알아요?”

“그거야…….”

남작이 민망한 듯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주님께서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하시니까 저까지 옮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한탄하던 남작이 깜짝 놀라 제 말을 정정했다.

“아, 이젠 영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안 되겠군요.”

“왕이 별건가요. 좀 더 큰 영지를 관리하는 영주가 된 거죠. 편한 대로 불러요.”

“……계속 이런 소리를 하시니까 저까지 감각이 이상해지는 겁니다.”

남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작을 쳐다보았다.

“설마 내 일거리 가지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리를 비우신 동안 진행된 일을 정리한 서류들입니다. 이렇게 직접 서류를 드리며 보고하는 건 마지막이 되겠군요.”

남작이 시원섭섭한 얼굴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보고는 직접 올리고 싶었습니다. 대관식이 끝나면 더 뵙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급히 왔고요.”

나는 남작이 내민 두꺼운 서류 뭉치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마지막 보고를 위해 에렐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 수도까지 온 모양이었다.

“남작. 내 편지 못 봤어요?”

왕실 법정의 공고문이 전역에 붙기 전, 인세티아 남작과 오베론 공작에게는 따로 편지를 보냈다. 인세티아 남작에게 쓴 편지에는 곧 에렐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썼었다.

“봤습니다.”

“그럼 내가 곧 에렐로 가겠다고 했던 말도 봤겠네요.”

“……설마 그게 진심이셨습니까?”

인세티아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이었어요.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왕이 되시면 쉽게 수도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왕이 수도를 비우면 백성들이 불안해하니까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걸 아시는 분이 곧 에렐에 오실 생각이셨다고요?”

남작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눈빛이 되어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왕이 수도에 있어야 한다면, 내가 있고 싶은 곳을 수도로 정하면 되잖아요.”

“그 말씀은…… 설마…….”

“에렐로 수도를 옮기려고요. 왕조가 뒤집혔는데, 수도 정도야 못 옮기겠어요?”

“수도…… 수도를…….”

남작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내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도는 기존의 권력이 너무 단단해요. 모두 제레인트 왕가에 충성했던 사람들이죠. 이걸 뒤집지 않으면 사사건건 고달플걸요.”

왕국의 모든 발전은 수도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수도 귀족들의 위세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번 기회에 그 판을 뒤집어 그들의 힘을 빼놓을 생각이었다.

“발전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자체도 문제예요.”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 에렐은 아주 척박하고 살아가기 힘든 도시였다. 모든 편리함이 모여든 수도와 같은 나라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부에서 시작된 발전은 북부까지 닿지 못했다.

“이젠 그 발전의 중심지를 북부로 옮겨 놓아 균형적인 발전을 꾀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깊은 생각까지 하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인세티아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그런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수도 이전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남작의 의심은 정당했다.

‘당연히 에렐로 수도를 옮길까 하고 생각한 뒤에 대충 만들어 낸 변명이거든.’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듯한 변명이라 행정관들에게도 잘 먹혔지만 말이다.

‘이제 반발하는 수도 귀족들만 잘 설득하면 되는데.’

그 일은 내가 할 수 없었다.

‘적임자가 따로 있지.’

리던과 카시안이었다. 제레인트 왕가의 후손으로, 누구보다 건국왕이 정한 수도에 애착을 가지고 있을 그들이 수도 이전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수도 귀족들은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법정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은 이후 두 사람과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대관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두 사람은 국왕과 흑마법사의 결탁을 스스로의 손으로 밝히겠다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그 문제는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섰으니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에렐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곧 거기로 갈 거니까. 내가 작위도 더 높은 걸로 줄게요. 백작? 후작? 공작? 뭐가 되고 싶어요?”

“작위가 무슨 생일 파티 초대장입니까. 뭘 그렇게 쉽게 주신다고…….”

“남작. 내 생일 파티 초대장, 받기 힘들어요.”

“그게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폭군의 싹이 보이시는군요. 그렇게 작위를 남발하시면 안 됩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왕이 폭군이 될 수도 있나요?”

내가 자신만만하게 신의 축복을 들먹이자 신앙으로 충만한 남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재차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게다가 작위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런 제안은 남작에게만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뭘 원하는지 말만 해요.”

“정말 제가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니까요.”

“그럼 그냥 휴직하게 해주십시오.”

남작이 짧은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에렐이 수도가 되면 지금보다 일거리가 더 많아질 텐데, 전 그거 감당 못 합니다. 공작령의 다른 시골 영지로 가서 마을 촌장이나 하겠습니다.”

“아. 그게 내 꿈이었어요. 그런데 실패했죠. 내가 성공 못 한 걸 남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웃으며 돌려 말한 거절에 남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 보세요. 제가 원하는 건 어차피 못 주십니다.”

“그럼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걸 줄게요. 공작이 되면 견제가 너무 많고, 백작은 애매하니 후작으로 해요.”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씩 웃었다.

“인세티아 후작. 듣기에도 이게 더 좋네.”

“……정말 사양하고 싶군요.”

“사양은 사양할게요.”

나의 단호함에 남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마 서류를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남작의 한탄과 함께 접견실 밖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지키고 있던 시종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고, 그 옆으로 평소와 같은 오베론 공작의 서늘한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시종이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변명했다.

“저, 각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막아봤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시종의 입장에서는 나도 공작도 범접하기 힘든 높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의 난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과는 논의할 일이 있었다. 왕조의 이름을 오베론으로 할 것인지, 다른 이름으로 선언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벌써 그 문제가 공작의 귀에 들어가 논의를 나누고자 찾아온 것일까?

‘마침 잘 됐어.’

내 반응에 표정이 밝아진 시종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접견실의 문을 닫아 주었다.

“각하. 이쪽에 앉으시지요.”

인세티아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공작은 남작의 제안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절대 안 된다.”

공작이 내 얼굴에 대고 시작부터 단호한 거절을 날렸다. 영문모를 거절에 나는 슬쩍 눈을 굴려 남작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인세티아 남작은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고 있는 남작과 눈이 마주쳐서 그 역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브리아 네가 왕이라니. 그건 절대 안 돼.”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한 말이 흘러나왔다.

‘왕조의 이름으로 오베론을 써도 될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름 쓰는 것을 허락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공작은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내가 왕이 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훌륭한 왕의 재목으로는 보이지 않겠지.’

공작은 이브리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제가…….”

내가 장황한 설득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황제다.”

미처 내 설득이 시작되기도 전에 공작이 여전히 영문 모를 짧은 말로 내 이야기를 끊었다.

“……황제요?”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이는 내게 공작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왕이라니, 그 제레인트 녀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받는 건 절대 안 된다.”

“그러니까…….”

“황제로 하자. 그게 좋겠어.”

엄청난 소리를 하면서도 공작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지만, 역시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는 게 모양새가 좋지. 동조할 귀족들은 내가 포섭할 수 있다.”

공작의 입에서 쏟아지는 구체적인 계획을 들으며 나와 남작은 입을 떡 벌렸다.

‘황제가 무슨 마을 촌장이야? 이렇게 막 쉽게 하자고 해도 돼?’

내가 어쩌다 왕이 됐다는 말을 들은 인세티아 남작의 심정이 이랬을까. 황당해서 입을 떡 벌리는 내게 인세티아 남작의 작은 한탄이 들려왔다.

“역시 괜히 부녀가 아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