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1/156)

* * *

나는 법정에서 빠져나와 솔과 마주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태양신 솔이 아니라 신의 사제 솔란이라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솔.”

“솔란입니다.”

“그렇게 주장할 거면 얼굴이라도 바꾸고 나타났어야죠.”

“다음부턴 그럴게요. 하지만 전 솔란입니다.”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나는 솔의 의미 모를 연극에 동참해주기로 마음먹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솔란이든 솔이든.”

어차피 내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그녀가 오늘 법정에서 한 말이었다.

“오늘 법정에서 한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내가 신족이 됐다는 거요.”

솔은 내가 그것을 궁금해할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신족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 축복을 받으면 뭐가 좋은데요?”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몸이지요.”

“몸이요?”

“예. 느끼지 못하셨나요?”

나는 두 손을 들어 빛이 흡수된 자리를 쳐다보았다. 이미 빛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지만, 솔의 축복과 함께 새어 나온 빛이 내 몸에 흡수되던 때의 감각은 아직도 선명했다. 단순히 신성함을 자랑하는 장치가 아니라 어떠한 힘이 있는 빛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는 강인한 신체를 얻게 되어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긴 수명을 영위한다고 합니다. 노화를 겪지 않고 신체가 가장 건강할 때의 모습으로 죽는 날까지 살아가고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죽는 날까지 산다는 말인가요?”

젊은 모습을 평생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들었다면 아주 부러워할 일이었다.

“예. 그렇게 수백 년을 살겠죠.”

“솔이 이렇게 축복을 내려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심장을 되찾아준 보답은 국왕을 살려 해리를 구함으로써 이미 받았으니까요.”

내가 지켜본 신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마냥 용서하고 베푸는 존재가 아니라, 주고받을 것을 분명히 계산하는 냉철한 존재 같았다. 캐서린을 단죄하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신을 제대로 보셨군요.”

솔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사실 이건 당신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악마를 위한 신의 선물입니다. 그 역시 심장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해리를 위한 선물이요?”

“당신이 오랫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긴 수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신께서는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소망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해리를 사랑하게 된 이후 악마의 수명과 인간의 수명이 다르다는 건 언제나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나와 해리 모두 서로의 수명 차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악마는 악마로 태어나고,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다. 수명은 그 순간 정해지는 존재의 본질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야기를 꺼내 봐도 서글퍼질 뿐이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주제를 피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오늘만을 생각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아마 해리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해리에게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홀로 남게 되는 쪽은 해리였으니, 그의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나는 진심으로 솔에게 감사했다. 이건 그녀가 자랑하던 꽃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꽃길이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당연한 보상을 하는 거니까요.”

해리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나는 단 한 조각의 심장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기여도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해리에게도 보답을 주는 게 맞다.

‘하지만 악마에게 선물을 주는 신이라니.’

어딘가 우습지 않은가.

‘애초에 악마의 도움을 받아 심장을 되찾은 신도 이상하지만 말이야.’

우스운 생각에 픽 웃음을 흘리는 나를 보며 솔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에게는 행운이 따라 죽는 날까지 부와 명예를 잃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잡고 마지막 축복의 말을 전했다.

“부디 그대의 앞날에 영원한 번영이 있기를 바랍니다. 늘 그대를 지켜보겠어요. 이것이 신께서 그대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입니다.”

* * *

왕실 법정이 내린 결론은 빠르게 왕국 전역에 공표되었다. 그들이 내건 공고문에는 다음 왕이 나로 정해졌다는 것과 함께 신의 사제가 나타나 내게 축복을 부여하며 신족으로 인정했다는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다.

건국왕이 나라를 세운 이후 왕은 모두 제레인트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내가 왕으로 지명된 탓에 처음으로 제레인트가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 제레인트 왕가의 명맥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내가 리던이나 카시안, 혹은 제레인트의 핏줄을 이은 남자와 결혼해서 건국왕이 세운 제레인트 왕가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이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인간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는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런 주장도 금세 힘을 잃었다.

‘이제 국왕은 금지된 힘을 얻으려다 실각한 왕으로 역사에 남겠지. 그로 인해 제레인트 왕조가 무너졌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을 살아서 듣게 될 거야.’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제레인트의 영광이 스스로의 이름을 끝으로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국왕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절망이었다.

이제 왕국은 새로운 분기를 맞게 됐다. 제레인트 왕조의 끝이자, 새로운 왕조의 시작. 이 처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모른다. 처음이라는 건 선례가 없다는 뜻이었고, 선례가 없다는 건 새롭게 정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는 소리였다.

‘왕이 되겠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는데…….’

정해야 할 것들이 밀려드는 순간이 오자 비로소 내가 왕이 된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그 전에 정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 제레인트로 하실 겁니까?”

“왕가의 이름은요? 원래 성이신 오베론을 따 오베론 왕가로 명명하실 건가요?”

“왕으로서 사용하실 이름도 정하셔야 합니다. 원래 이름을 계속 쓰실 건지, 새로운 이름을 정하실 건지 말씀해주십시오.”

하다 하다 잘 쓰고 있던 내 이름까지 다시 정해서 알려줘야 한다니. 나는 어서 결정을 내려달라며 내 앞에 몰려든 행정관들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아직 대관식을 하고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인데도 이 상태이니, 정말 왕이 된 후에는 얼마나 많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왕이 되자마자 일거리는 전부 떠넘기고 도망갈 거야. 나태하고 게으른 왕이 될 거라고.’

나는 굳게 다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씩 처리해볼까.’

우선 가장 간단하게 보이는 문제부터 접근하기로 했다.

“이름은 왜요? 원래 쓰던 이름을 쓰면 안 되나요?”

“문제라니요.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즉위를 하시면서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고, 새롭게 권위를 부여하셨던 분들도 계십니다.”

행정관은 품에 안고 있던 자료를 뒤적여 지난 사례를 찾아냈다.

“도량형을 통일하신 킬리어드 5세의 원래 이름은 라이언이었고, 법전을 정비하신 조안 3세의 원래 이름은 실페온이었습니다.”

“의무가 아니라면 그냥 내 이름을 쓰고 싶어요.”

이제 겨우 이브리아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는데, 또 다른 이름을 쓰는 건 사양이었다.

행정관은 내 결정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뒤적였다.

“지난 역사에 이브리아라는 이름을 쓰셨던 왕은 없습니다. 이름 뒤에 몇 세라는 칭호를 붙일 필요는 없겠네요. 앞으로 모든 문서와 기록에서 이브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은 행정관이 돌아가자 나머지 행정관들이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였다.

“다음은 왕가의 이름이었던가요? 그건 원래 내 성을 쓰는 게 아니에요?”

“성을 왕가의 이름으로 쓰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다른 이름을 왕가의 이름으로 선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마음 같아서는 내게 익숙한 오베론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지만, 이 이름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먼저 아버지와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당장 결론을 내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대관식 전까지는 확실히 정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은…….”

“국호를 정하셔야 합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순서를 빼앗길까 두려웠는지 행정관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왕조가 바뀌면서 국호를 바꾸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실 건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나라 이름…….”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제레인트라는 이름을 계속 쓰는 건 이상하겠지?’

하필 나라 이름이 건국 왕조의 이름을 딴 것이라 계속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았다.

‘좋은 일로 왕조가 무너진 것도 아니니까.’

“……그것도 고민해볼게요.”

“이것 역시 대관식 전까지는 확정해주셔야 합니다. 국호를 바꾸신다면 국기와 국가도 어떻게 하실 건지 결정하셔야 하고요.”

“국기와 국가도요?”

“예. 그리고 공식 문서에 사용하실 인장도 만드셔야 합니다. 보통은 왕자나 공주이실 적에 사용하셨던 인장을 그대로 사용하시는데, 이번에는 특수한 경우라 새로 상징을 정하셔서 인장을 제작해야 합니다.”

“하아. 인장까지…….”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왕이 되겠다고 하면 그냥 왕이 되는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정할 것이 많을 줄은 몰랐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고.’

사극을 수없이 봤지만 이런 과정을 알려준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나 아무래도 리던한테 사기당한 것 같아.’

나태한 왕이 되면 된다더니, 나태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브리아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괴로움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내게 시종이 다가와 속삭였다.

“여기에 또 손님이 있다고?”

지금 내 앞에 줄을 서 있는 행정관들만 해도 엄청난 수였다. 여기에서 더 일거리가 늘어난다면 대관식을 하기도 전에 왕좌를 걷어찰 참이었다.

“그 손님이 일거리를 안고 왔다는 말만 하지 말아 줘.”

질린 얼굴로 대꾸하자 시종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렐에서 오신 인세티아 남작이신데…….”

에렐과 인세티아 남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른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믿을만한 조력자가 등장한 것이다.

“시간을 내기 힘드시니 돌아가라고 할까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만나겠어. 남작은 지금 어디에 있지?”

“접견실로 안내해두었습니다.”

“좋아. 지금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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