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40/156)

* * *

나는 익숙한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성검을 뽑았을 때 왕위계승권을 논의하기 위해 불려왔던 왕실의 법정이었다. 단상에 마련된 자리는 다섯 개였지만, 자리에 앉은 이는 네 명뿐이었다. 재판장을 위해 마련된 가운데 좌석은 주인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 자리의 주인은 지금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어눌한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내고 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은 것은 중요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법관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본래 국왕이 맡았어야 할 재판장의 역할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를 비롯한 법관들의 시선이 법정의 부름을 받고 모인 세 사람을 향했다. 나와 리던, 그리고 카시안까지. 왕위를 계승할 후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이 자리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법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 저희는 국왕께서 더는 국정을 이끌어가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법관은 침통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 왕성이 한바탕 시끄럽다 싶더니, 법관들이 몰려가 국왕의 상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엄숙한 선언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카시안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알게 된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늘 법관들에게 불려오기 전까지, 카시안은 국왕의 비밀스러운 명령에 따라 자신의 방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왕국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소식을 카시안만 늦게 전해 들은 것이다.

카시안은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구금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누구보다 그 사건을 먼저 알아챈 왕비가 깜짝 놀라 국왕과 카시안을 찾아갔지만, 두 사람 모두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국왕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건가?’

카시안이 구금당했다는 시기가 국왕이 계략을 꾸미기 시작한 시점과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내가 카시안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와중에도 법관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법관들은 이른 시일 내에 새로운 왕의 즉위가 필요함을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재판장을 대리하는 법관이 다른 법관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눈짓을 주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의사를 재확인한 법관이 다시 맞은 편에 앉은 나와 왕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여 새로운 왕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고자 성검의 주인과 두 왕자님을 오늘 이 자리에 모신 것입니다.”

카시안과 리던을 차례로 바라본 법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니 성검의 주인께서 지난 법정에서 약속하셨던 것처럼 다음 왕을 선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결정은 이미 내리셨겠지요?”

“물론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내렸습니다.”

건국제의 첫 번째 연설에서 발표하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정이었다. 나 스스로도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런 결론밖에는 내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음 왕의 이름을 말씀해주시지요. 리던 왕자님입니까, 아니면 왕세자 전하십니까?”

“제가 선택한 왕은…….”

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사자인 두 왕자는 물론이고 한쪽 구석에 앉은 서기관도 내가 다음 왕의 이름을 말하길 기다리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고 있었다.

“두 분 다 아닙니다.”

“……예?”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실내가 싸해졌다.

“두 분 중에 한 분을 왕의 후계자로 선택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시험까지 치른 것이고요.”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법관이 서둘러 기록을 뒤적이며 항의했다.

“예. 그랬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지난 법정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니 아니라고 잡아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고 보니 두 분 모두 왕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전 두 분 중 누구도 왕의 후계자로 지목할 수 없습니다.”

“그런!”

법관들이 당황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왕의 이름을 기록에 새겨 넣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서기관도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장 당황한 사람을 꼽으라면 두 왕자, 리던과 카시안이었다. 그럼 도대체 내가 에렐에서 했던 그 고생은 뭔데? 두 왕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다음 왕은 누가 되는 겁니까?”

법관들이 왕실 족보를 뒤지며 온갖 후보들의 이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분들을 데리고 또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잠시 섭정을 두고 새로운 왕이 나오길 기다리지요.”

“그럼 섭정은 또 누가 한답니까?”

법관들의 토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 의미 없는 그들의 토론을 막았다.

“시험도, 섭정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음 왕을 정했거든요.”

내 말에 법관들의 말이 뚝 끊어졌다. 1왕자 리던도, 왕세자 카시안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왕으로 정한 것인가.

의문으로 가득한 그들의 시선에 나는 씩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저요.”

“……예?”

“제가 하겠다고요. 국왕.”

“……예에?”

“처음부터 성검의 주인이 국왕이 되는 거였잖아요.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제가 왕 할게요.”

왕이 되겠다는 대단한 선언을 하는 것치고는 가벼운 말투에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법관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내 옆에 앉아 있던 리던이었다.

“그래. 그냥 그대가 왕이 되면 되겠네.”

리던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법관들도 정신을 차렸다.

“하,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는…….”

“왜요? 성검의 주인이 왕이 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법관들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잡하고 다양한 법리들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굴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 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때 법정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들이 난처한 목소리로 법정에 들어서려는 사람을 저지하고 있었다.

“아뇨, 전 들어가야 해요! 중요한 이야기를 꼭 전해야 한다고요!”

캐서린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기사들이 어째서 저렇게 난처한 태도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왕세자의 약혼녀이자 귀족 레이디인 캐서린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그렇다고 법정에 들여보낼 수도 없어 쩔쩔매고 있었던 것이다.

“법관님! 저를 들여보내 주세요!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기사들을 설득하는 것을 실패한 캐서린이 이제는 법관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간절한 그 목소리에 잠시 의견을 주고받던 법관들이 곧 결론을 내렸다.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법관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법정의 문이 열리고 초췌한 몰골의 캐서린이 안으로 들어섰다. 늘 화사하고 반짝거리던 캐서린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초라한 안색이었다. 캐서린은 비틀거리며 법관들 앞으로 걸어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들 저 여자에게 속고 있어요!”

캐서린의 시선이 분명하게 나를 향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악의가 가득 찬 눈이었다.

“저 여자는 성검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 척하고 있는 마녀일 뿐이죠!”

마녀라는 말에 법정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제레인트는 태양신을 국교로 삼아 신앙을 중요시하는 국가였다. 마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사술을 행하는 이단이므로 화형에 처해졌다. 태양신의 교리에 따르면 악마와 계약을 한 나는 당연히 마녀가 된다.

‘하지만 그 악마를 안겨준 것도 태양신이라고.’

그러니 나는 당당했다.

“우드베르슨 양.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마녀라는 거죠?”

“그걸 묻다니 뻔뻔하시네요.”

내 질문에 캐서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깊은 밤 창문을 넘어 제 방으로 쳐들어오셔서는 제 마력을 모두 빼앗아가셨죠. 그런 사특한 술수를 쓸 수 있는 자는 마녀뿐이겠지요.”

‘역시 태양신의 심장 조각과 함께 마력도 사라졌구나.’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캐서린이 더욱 확신한 듯 소리를 높였다.

“이것 보십시오. 이 여자는 제 말이 틀렸다고 부정조차 하지 못합니다. 마녀가 확실해요.”

캐서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법관들의 동조를 구했다. 가련한 여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법관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브리아가 마력을 빼앗아갔다니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카시안이 캐서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든든한 제 편이 나타나자 캐서린이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카시안의 품에 안겼다.

“마력이 사라졌어요.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그날 밤 저 여자가 전부 훔쳐간 거예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요, 우드베르슨 양. 내가 어떻게 마력을 훔쳐가죠?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개나 소나 마력을 훔쳐가 법사가 됐을 것 같은데.”

“불가능한 일을 했으니 사술이죠!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겠어요?”

나와 캐서린의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던 법관이 중재에 나섰다.

“잠깐. 하나씩 풀어보지요.”

재판장의 역할을 대리하던 법관이었다.

“오베론 영애. 늦은 밤 창문을 넘어 우드베르슨 양의 방에 찾아간 사실이 있습니까?”

“네. 찾을 게 있어서요.”

“무엇을 찾고 있었지요?”

“태양신의 심장이요.”

내 입에서 나온 진실에 법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대로 된 변명조차 못 하는 것을 보세요. 마녀가 확실해요. 성검의 주인이라는 신분도 거짓일 겁니다. 사특한 수를 써서 모두를 속인 게 분명해요.”

“캐서린.”

그때 리던이 복잡한 얼굴로 캐서린을 불렀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오베론 영애는 독특한 행동을 할 때가 많지만,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냐. 그 사건 이후로 많이 달라졌어.”

“리던!”

캐서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시안…….”

리던에 이어 카시안까지 내 편을 들고 나서자 캐서린이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언제 이 두 사람까지 홀렸죠? 믿을 수가 없네요. 당장 신전으로 가 당신을 고발하겠어요!”

캐서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 말처럼 당장 신전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법정을 뛰쳐나가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이 법정에 나타나는 것이 더 빨랐다.

“내가 먼저 여기에 왔으니까요.”

언제 이 공간에 들어온 것인지 하얀 옷을 차려입은 신관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뭐야. 솔이잖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하더니 여긴 또 무슨 일이람. 또 이상한 꽃길을 깔아 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불안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복을 입은 솔이 우아하게 걸어와 모두의 앞에 섰다.

“솔.”

나는 재빨리 솔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가 쓸데없는 말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했다.

“도대체 왜 나타난 거예요? 평범하게 그냥 사제를 보내면 됐잖아요.”

내 한탄에 솔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매님.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네?”

“저는 태양신을 모시는 사제로, 이름은 솔란이라고 합니다. 솔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져 솔을 바라보았다. 사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었을 뿐이지, 그녀의 외모는 정확히 내가 기억하는 솔의 모습과 일치했다.

‘자기가 솔이 아니라고 주장할 거면 외모부터 바꿔서 나타났어야 했던 거 아냐?’

심지어 가명은 솔란이었다. ‘솔’에다 ‘란’ 하나를 더 갖다 붙였을 뿐인 이 어설픈 가명의 어디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리던도 앞글자 하나만 슬쩍 바꾼 무의미한 가명을 썼었다.

‘여기는 가명을 어설프게 짓는 게 유행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솔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당신 솔 맞잖아요.”

“아닙니다.”

“맞다니까요. 누가 봐도 당신은 솔이야.”

“아니라니까요.”

솔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로봇처럼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끝까지 정체를 숨기겠다 이거지.’

지금까지 솔은 이 세상에 직접 현신해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솔의 얼굴을 모른다는 소리였다. 당사자가 이렇게 우기기 시작하면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착각을 했네요, ‘솔란’ 사제님.”

내가 마지못해 인정하며 옷자락을 놓아주자 솔란인 척하고 있는 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서 솔을 구해준 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법관들이었다.

“태양신의 사제께서 직접 찾아와주셨다니, 신탁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가려진 거겠군요.”

법관이 나와 캐서린을 바라보며 한시름 놓았다는 듯 웃었다.

“여기 태양신을 대리하는 사제께서 오셨으니 성검의 주인께서 마녀인지 아닌지도 이 자리에서 판가름이 나겠지요.”

“마녀?”

솔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어쩌다 그런 소리를 듣게 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브리아 양께서 마녀라니요.”

“사제님.”

캐서린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솔의 앞으로 나섰다. 솔이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제가 이 여자의 사특한 술수에 당했습니다. 마녀가 확실합니다.”

“사특한 술수라면요?”

“제가 지닌 마력을 모두 훔쳐 갔습니다.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인간이라.”

솔이 캐서린의 말을 되뇌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요. 여기 계신 이브리아 양께서는 확실히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죠.”

그녀의 말에 법정의 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솔은 경악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태양신이 직접 내린 신탁의 주인이 평범한 인간일 수는 없잖아요?”

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를 향한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빛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나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빛이 사라질 무렵 솔이 내 앞에 무릎을 꿇어 내 손을 붙잡았다.

“솔……?”

이번에는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태양신의 사제 솔란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녀의 진짜 정체가 태양신 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이 지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솔은 처음부터 그랬듯 평온한 태도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권능으로 그대에게 신성함을 부여한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은 그대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은인, 이 땅의 균형을 되찾은 영웅. 이제 그대는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신의 가족이다.”

몸으로 스며든 빛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빛이 스며든 자리로부터 시작된 기이한 감각이 금세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감각이 충만해지는 듯한 기분.

“그대는 이제 신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대의 몸을 빌어 태어나는 후손들 역시 신족으로서 위대함을 행하게 될 것이다.”

빛이 모두 내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진 뒤 솔이 몸을 일으켜 법정에 자리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나와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이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것이 종복의 몸을 빌어 전하신 태양신의 말씀입니다.”

“태양신의 말씀,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들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낯선 외침이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 앉아 열심히 펜을 놀리고 있던 서기관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감격한 얼굴이었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자신이 기록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찬 모양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제 마력은…… 분명히 저 여자가…….”

캐서린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눈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런 캐서린을 보며 솔이 쯧-하고 혀를 찼다.

“가련한 인간이구나. 자신이 지은 죄를 잊고 언제까지 그 힘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는가.”

솔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캐서린 앞으로 다가섰다.

“너로 인하여 세상의 혼란이 찾아왔다. 불화가 생기고, 의심이 찾아왔으며, 배신이 판쳤다. 그것이 모두 너의 죄인 것을…….”

캐서린을 바라보는 솔의 얼굴은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 따뜻한 얼굴로 내게 축복을 내렸던 사제의 얼굴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며 죄가 씻겨졌다 생각했겠지. 그러나 네 영혼에서는 여전히 추악한 죄의 냄새가 나는구나.”

솔이 손짓하자 캐서린의 심장에서 음산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와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에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네가 힘을 잃은 것인지, 어째서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인지. 의문에 대한 답을 모른 채 평생을 괴로워할 것이다.”

솔이 다시 손짓하자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캐서린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기와 함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음산하고 무거운 기운도 모두 사라졌다.

“원망하고 좌절하여 남은 생을 괴로움으로 살아라. 그것이 너를 향한 신의 벌이다.”

거기까지 말한 솔이 캐서린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이것 역시 종복의 몸을 빌어 전하신 태양신의 말씀입니다.”

솔의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덜덜 떨던 캐서린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카시안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연이어 쏟아진 놀라운 이야기로 법정은 고요했다. 서기관이 바쁘게 기록을 작성하는 소리만 공간을 울릴 뿐이었다.

‘대충 끝났나?’

이제 어느 정도 난장판이 정리될 모양이었다. 상황이 정리되면 사제인 척하고 있는 솔을 붙잡고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네?”

어수선한 고요 속으로 해리가 등장한 것이다.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바로 이쪽으로 왔어.”

그렇게 말하는 해리의 어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가 짊어져 있었다.

‘저건 도대체 뭐야?’

검은 물체를 자세히 살피려는 순간 해리가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덕분에 나는 쉽게 검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엉망이 되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였다.

‘예전에도 이런 꼴을 본 적이 있지.’

해리가 내게 독을 먹인 제럴드를 이런 식으로 응징한 적이 있었다.

“이놈이 모두의 앞에서 고백할 게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지.”

해리가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발로 툭 건드렸다.

“자. 법관님들 앞에서 전부 말해 봐. 응?”

“으아, 으아악!”

가벼운 발짓에도 남자는 기절할 것처럼 발작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해리는 그런 남자의 태도가 불만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봐. 말을 하라고, 말을.”

“흐으…….”

뺨을 툭 치는 손길에 남자가 덜덜 떨며 해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말, 합니다. 말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래. 그렇게 말을 해야지.”

해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남자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남자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해리의 손길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누군데 저런 꼴로 끌려온 거지요?”

참혹한 남자의 모습에 법관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상하게 법전을 들여다보는 것이 직업인 그들에게는 남자의 몰골이 상당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아. 이 남자.”

해리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해. 내 앞에서 고백했던 거 전부.”

해리의 차가운 명령에 남자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긴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 저, 저, 저는 흑마법사입니다. 어둠의 마법을 연구하며 각종 실험을 하지요. 그 연구에는 인간의 영혼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재료를 국왕 폐하께 제공받았습니다.”

“그, 재료라는 게 설마 인간의 영혼입니까?”

법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했다. 인간의 영혼을 얻으려면, 먼저 인간을 죽여야 한다. 이 남자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국왕은 인간을 죽여 흑마법사에게 제공한 것이 된다.

“하지만 폐하께서 먼저 저희 흑마법사들을 찾으셨습니다. 그전까진 동물의 영혼으로 실험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사형수들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악마를 자기 손에 꼭 넣어야 한다면서…….”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카시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법관들과 리던의 얼굴도 비슷했다.

“잘못했습니다!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남자는 덜덜 떨며 간청했다. 법관들이 아니라 해리를 향한 호소였다.

“저, 저 말이 모두 진실이란 말입니까?”

“흑마법사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지금 보니 정신도 온전치 않아보는데. 그냥 미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닐까요?”

법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들이 충심으로 모셨던 왕이 이런 비열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믿긴 힘들 테니까. 증언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면 더욱 믿기 힘들었다.

‘제대로 된 상태로 얌전히 데려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나는 누가 봐도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흑마법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리가 직접 흑마법사를 잡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 계획대로 아스페리츠나 로이를 보냈어야 했다.

‘흑마법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건 자기라는 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국왕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증거, 국왕이 직접 접촉했던 흑마법사를 데려와 진실을 밝히려고 했는데. 증인의 상태가 이래서야 의미가 없었다.

‘다른 흑마법사를 잡아 와야 하나?’

이번에는 꼭 아스페리츠나 로이를 보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는 와중에 의외의 조력자가 등장했다.

카시안이었다.

“……전부 사실일 겁니다.”

그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폐하께서 제게 그 계획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악마를 사로잡기 위해 흑마술이 필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서 사형수들의 영혼이 필요하다고.”

“그런!”

정신 나간 흑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증언은 의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럴 수 없다. 무게감이 완전히 다른 증언에 법관들이 비로소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저는 그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폐하께서 그런 비도덕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고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뜻을 바꾸지 않으셨고, 저는 방에 구금되어 상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왕실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일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진실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는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숨길 수도 있었습니다.”

법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카시안은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시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게 옳은 일이니까요.”

카시안은 참담한 얼굴을 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제 뜻을 전했다.

“진실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그 무너지는 것이 나일지라도, 밝혀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그리해야겠죠.”

태양신 솔이 내게 보여주었던 이야기 속의 바른 왕자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이는 카시안의 옆으로 리던이 다가섰다. 그는 제 동생의 어깨를 꽉 붙잡아 말없이 그를 격려했다.

“……이 문제를 위한 법정은 추후에 열릴 겁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재판장의 역할을 대리하는 법관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오늘의 법정은 다음 대의 왕을 정하기 위한 것이니, 오늘은 그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겠지요.”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머지 법관들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기적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거부할 까닭이 없습니다. 저는 위대하신 태양신의 말씀을 받들어 왕국의 적법한 왕이 성검의 주인 이브리아 오베론임을 인정합니다.”

“저 역시 인정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의합니다.”

나머지 세 사람의 동의까지 얻은 법관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내일의 왕이시여. 이제 당신이 이 나라의 적법한 주인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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