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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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럽던 왕성이 크게 뒤집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다시 깨어나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이라니. 이 정도의 소란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그의 죽음을 진단했던 의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왕실은 당장 입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국왕이 크게 다쳐 더는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은 빠르게 왕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왕성에서 수도로, 수도에서 변방으로. 한 번 퍼져나가기 시작한 소문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떠도는 소문의 끝에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의문은 항상 하나였다. 그래서, 도대체 다음 왕은 누군데? 누구도 결과를 쉽게 예상할 수가 없었다.

국왕이 후계자로 인정한 왕세자가 있으나 그는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며 공식적인 후계자의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새로이 자격을 얻은 성검의 주인은 왕위를 원하지 않는다며 다음 왕이 될 자를 자신이 선택하겠다고 했다. 덕분에 왕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던 1왕자도 기회를 얻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수도의 뒷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뻔했다. 바로 도박판이다.

“나는 왕세자에게 걸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쪽이 유력해.”

“나는 1왕자! 왕세자를 선택할 거라면 애초에 그런 시험 기간을 거치지도 않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돈을 걸었다. 배당금이 가장 높은 쪽은 선대 국왕의 팔촌쯤 되는 왕가의 먼 핏줄이었다. 가능성이 아주 낮았지만, 이런 판에서는 일확천금을 노리며 낮은 확률에 기대를 걸어보는 쪽이 더러 있었다.

“나라면 그쪽에 안 걸 텐데.”

그때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사람들의 토론을 지켜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후드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뭔가 정보라도 있어?”

“당신은 어디에 걸었는데?”

사람들은 남자를 훑어보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다지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외형은 아니었지만, 이런 도박에서는 작은 정보라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내가 왜 그걸 말해주겠어?”

음침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뒤집어쓴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술이 얄밉게 웃고 있었다.

“저런 놈이 꼭 하나씩 있지. 괜히 허세를 부리면서 판을 흔드려는 놈들!”

“아마 저 자식 왕세자에게 돈을 걸었을 거야. 그쪽이 배당금이 제일 낮으니까, 사람들을 다른 쪽으로 몰리게 해서 자기가 돈을 더 받으려고.”

“맞아. 아주 뻔하다니까.”

그에게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뭣도 없는 놈이 잘난 체를 다 한다고 수군대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 덕분에 순식간에 그의 주변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평가와 달리 음침한 남자는 뭣도 없는 놈이 아니었다. 그는 따를 자가 없는 최고의 정보 사냥꾼, 정보 길드의 수장 루크였다. 그가 이런 도박판에 변장까지 하고 나타날 이유는 역시 하나뿐이었다. 정보를 캐기 위해서였다. 웬만한 정보는 부하들을 시켜 수집하지만, 이번 판은 그가 직접 나설 만큼 중요했다.

‘이브리아 오베론이 국왕과 접촉한 흑마법사들을 원하고 있어.’

흑마법사들은 어둠의 마법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마법사협회에서 배척당한 집단이었다. 지식의 탐구와 힘의 추구라는 미명 아래 갖은 실험을 자행하는 협회가 쳐낼 정도의 악랄한 마법사들. 조금이라도 어설픈 구석이 보이면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기에 루크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그 여자는 국왕과 접촉했던 흑마법사를 찾아내서 뭘 하려는 걸까.’

루크는 이브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지.’

루크는 정보상이지 정치가가 아니었다. 대가를 받고 정보를 판다. 정보상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그가 판 정보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정보를 얻게 된 자의 몫이었다.

“오래 기다렸나?”

생각에 잠겨있는 루크의 곁으로, 변장한 그처럼 후드 로브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다가왔다.

‘얼굴만 안 보이지 수상하다고 자랑을 하는 꼴이로군.’

루크가 상대였다면 이런 식으로 어설픈 변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루크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과는?”

일반적으로 사과는 과일이었지만, 마약을 사고파는 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의미로 통했다. 환각을 보여주고 중독성이 강한 약초, 베셀리움. 지금 루크는 그런 약재들을 흑마법사들에게 판매하는 약재상으로 변장한 상태였다.

“준비해뒀다. 돈은?”

루크의 질문에 남자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이 안에 더 많이 있다. 돈은 충분하니, 먼저 물건을 확인하러 가지.”

“좋아. 그럼 이쪽으로.”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흑마법사가 그 뒤를 따랐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네가 찾는 사과는 없을 거야.’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가 기다리고 있을 뿐. 루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따라오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용히 루크를 따라 걷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자 곧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루크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봐. 평소와 다른 길이잖아.”

“아. 오늘은 기다리고 있는 물건이 조금 달라서.”

루크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제 어깨를 붙잡은 손을 털어내자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르다고? 평소의 그 사과가 아닌가?”

“뭐. 사과처럼 새빨갛긴 하던데.”

루크는 골목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해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이 사과처럼 붉긴 했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것과 동시에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들이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마중을 나와버린 해리였다.

“무슨 소리긴. 오늘 네가 죽어라 맞을 거라는 소리지.”

누가 봐도 불량스러운 자세로 걸어 나온 해리의 모습에 흑마법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너는…… 대마법사의 후손?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의아함이 가득한 남자의 외침을 들으며 해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악마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네.’

국왕이 흑마법사들과 그 사실까지는 공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내 정체에 대해서 입막음을 할 필요는 없겠어.’

만약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이들을 왕성으로 끌고 가 무릎 꿇리고 국왕과 질 나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들기 전에 그들의 기억을 조금 손봐야 했다.

기억을 건드리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미치거나 백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정신이 나가버리면 흑마법사들을 증언대에 세우려는 이브리아의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국왕 그 개자식이 입이 무거웠다는 점 하나만은 고마워해야겠군.’

해리는 국왕이 어째서 그들에게 악마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악마라는 건 왕이 된 자들만 알 수 있는 정보였어. 도구에 불과한 흑마법사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진 않았겠지.’

국왕은 여러 면에서 그의 첫 계약자와 비슷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부심이 강했고 권위적이었으며 의심이 많았다.

‘지금은 맥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지만 말이야.’

해리가 국왕의 우스운 꼴을 떠올리며 씩 웃자,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흑마법사가 빠르게 주문을 외워 해리를 공격했다. 음산하고 무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해리에게로 쇄도했다. 상당히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검은 기운은 해리의 손끝에서 힘없이 사그라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우습네. 겨우 그런 힘으로 내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자신의 강력한 공격이 간단하게 막히는 것을 본 흑마법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절대 상대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흑마법사의 얼굴에 언뜻 두려움이 스치는 것을 본 해리가 가벼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때리긴 할 테지만.’

해리가 씩 웃으며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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