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8/156)

* * *

나는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부르르 떠는 국왕을 버려두고 그의 방을 나섰다. 문밖에는 시체가 다시 살아나게 만든 기적의 장본인, 솔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브리아. 당신의 소원이 이뤄졌으니 난 이만 떠날게요.”

“신의 세계로요?”

내 말에 솔이 빙긋 웃었다.

“내 세계는 여기예요. 하늘의 구름, 바다의 물고기, 땅의 흙…… 그 모든 곳에 내가 있죠.”

“그럼, 지금은 저 하늘로?”

나는 고개를 돌려 복도에 난 작은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밤하늘에는 별이 촘촘하게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야겠네요.”

나와 함께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던 솔이 짧게 대답하고는 작은 새로 변했다. 힘을 되찾기 전에도 솔은 이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먼저 신전으로 갈 거예요. 신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말해줘야겠죠. 나를 모신다는 아이들이 그렇게 허술할 줄은 몰랐다니까요.”

솔이 투덜거리면서도 가볍게 날갯짓해 창틀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내 아이들이 신탁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오베론의 이브리아라고 말하겠죠.”

마치 그래도 괜찮겠냐고 내 의사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그럴 거예요?”

“아뇨. 그래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이제 신의 속성을 확실히 이해했다.

‘말린다고 들으면 그게 신인가.’

그들은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에다 뻔뻔하며 머릿속이 꽃밭이었다.

‘그러니 나한테도 꽃길 타령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시킨 거지.’

“언제든 그대를 지켜보고 있을게요. 하늘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이 세상 어디에서든.”

“안 지켜봐도 되니까 꽃길만 깔아주지 마세요.”

나의 질린 얼굴에 새로 변한 솔이 포로롱 예쁜 소리로 울었다. 아마도 솔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제 그대에겐 내가 깔아주는 꽃길이 필요 없잖아요. 이미 차고 넘치는걸요.”

그렇게 말한 솔이 크게 날갯짓하며 창밖의 하늘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솔의 모습이 하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밖을 응시하다 굳게 닫힌 국왕의 방으로 눈을 돌렸다.

‘날이 밝으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

국왕으로 짐작되는 시체가 발견되어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시체가 눈을 떴다. 어눌하게나마 입을 열 수는 있으니 대화를 나눠보면 그가 국왕이라는 건 금세 밝혀질 터.

‘이걸 경사라고 해야 하나, 흉사라고 해야 하나.’

국왕이 살아있으니 경사라고 할 수도, 그 살아있는 국왕의 상태가 엉망이니 흉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 일을 경사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흉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경사인지 흉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왕은 숨만 붙어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이른 시일 안에. 건국제의 연설에서 국왕의 후계자를 발표하기로 했었지만, 그건 먼 훗날에 왕이 될 사람을 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상황이 급변하여 당장 왕위에 오를 사람이 필요해졌다.

‘다들 난리가 나겠군.’

벌써부터 난장판이 예상되었다. 왕성이 아주 크게 시끄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지금부터 시끄러워질 내일을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해리의 방이었다.

‘아직 깊은 밤이기는 하지만…….’

잠자는 공주님을 깨울 시간이었다.

* * *

해리의 방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로이?’

로이가 잔뜩 굳은 얼굴로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드래곤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로이.”

로이는 내가 바로 앞에 다가가 이름을 불렀을 때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브?”

로이가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응. 나야, 로이.”

내가 확실하게 말해주자 잔뜩 굳어 있던 로이의 얼굴이 울먹임으로 일그러졌다.

“이브!”

로이가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놀랐어.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어.”

정신을 잃으며 솔이 만든 공간 속으로 이동해버렸으니 로이가 내 흔적을 쫓을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그랬구나. 걱정했지?”

“응.”

로이가 훌쩍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여기에서 이브를 기다리고 있었어. 이브가 여기로 올 것 같아서.”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설명하며 훌쩍거리는 모습이 꼭 엄마의 손을 놓쳐 길을 잃었다가 다시 엄마를 만나게 된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로이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달래주었다. 덕분에 마음이 진정된 것인지 로이가 코끝이 빨개진 채 훌쩍거리면서도 나를 슬쩍 놓아주었다.

“해리가 일어났어.”

“해리가? 정신은 제대로 돌아왔어? 전부 기억해?”

솔에게 소원을 빌어 해리가 죽였던 자를 살려냈다. 상대가 죽지 않았으니 해리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셈이고, 결과적으로 나와의 계약을 위반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멀쩡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쏟아지는 내 질문에 로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에 들어가 보진 않았어. 그래서 지금 해리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해리가 깨어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에서도 해리의 기운이 깨어난 게 느껴지니까.”

로이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범한 인간인 나는 전혀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없었지만, 드래곤인 로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로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철컥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겨있는 건가?’

나는 확인차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한 끝에 상황을 파악했다. 문고리는 제대로 돌아가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 문은 평범하게 잠긴 것이 아니었다.

‘해리가 힘을 써서 문을 못 열게 막고 있는 거야.’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이 돌아왔고, 기억이 멀쩡하다면 당장 나를 보러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조금 불안해져서 문을 두드렸다.

“해리. 문 열어요.”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해리가 다시 잠든 것은 아닐까 싶어 로이를 바라보니 그가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해리. 일어나있는 거 다 알아요. 로이가 알려줬어.”

“……문은.”

내 말에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척 숨어있는 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지 문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은 못 열어.”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지금 문 앞에 있죠?”

해리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왜 문을 안 여는 건데요?”

“열기 싫으니까.”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조금 침울해져 있기는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해리의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기억이 사라지거나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해리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해리를 구슬리는 건 자신 있었다.

“그러니까 왜 문을 열기가 싫은 건데요.”

“네 얼굴 보기 싫어.”

“뭐라고요?”

나는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내 얼굴은 왜 보기 싫은데요?”

“싫은 건 그냥 싫은 거야.”

“진심이에요? 이렇게 문 걸어 잠그고 내 얼굴 안 볼 거예요? 계속?”

“……그래. 안 봐.”

한 박자 느리게 돌아온 대답 역시 나를 보기 싫다는 말이었다. 내가 해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어떤 결심을 내렸는데. 그런 내 얼굴을 보기 싫다니.

‘내가 예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하고 물러설 줄 알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제로라도 문을 열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했다.

“해리. 당장 문 열어요. 이건 명령…….”

하지만 명령이라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간 서늘한 감각 때문이었다.

‘명령은 안 돼.’

해리는 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을 뻔했다. 그에게 그런 조건을 내세울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내가 가볍고 당연하게 내린 명령이 언제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다시는 해리에게 명령하지 않을 거야.’

악마의 계약자로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강제로 문을 열 방법은 많았다.

“로이.”

나는 든든한 나의 흑룡을 바라보며 굳게 닫힌 문을 가리켰다.

“이 문 열 수 있어?”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다. 로이는 엄청난 힘을 가진 흑룡이니까.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로이는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해.”

“왜?”

“나보다 해리가 더 강하니까. 작정하고 막으면 못 열어.”

“하지만 폭주한 해리를 막은 건 로이였잖아.”

“그땐 해리가 이브한테 정신이 팔려있어서 방심한 상태였어. 이성을 잃어서 빈틈도 많았고.”

“그럼…….”

“지금은 해리가 제정신이니까 내 힘으론 안 돼.”

하지만 실망은 이르다. 내게는 다른 카드도 있었다.

“아스페리츠!”

드래곤으로 부족하다면 정령들의 왕이다.

‘설마 정령왕이 이까짓 문을 못 열겠어?’

[음. 상황은 지켜봤어.]

아스페리츠가 창에 맺힌 이슬 속에서 튀어나와 문앞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도 불가능해.]

“정령들의 왕인데?”

무능함을 질책하는 눈으로 아스페리츠를 바라보니 그가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었다.

[저 악마 놈이 제대로 정신이 나갔나 봐. 아주 작정하고 문을 막고 있다니까? 이 정도 힘이면 도시 하나도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런 힘을 고작 문 막는 데 쓰고 있단 말이야.]

결국 지금 해리는 그렇게 엄청난 힘을 쓰면서까지 날 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해리.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다 들어줄게요.”

“돌아 가. 너 안 볼 거야.”

해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내 말에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해리는 처음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뭐?”

“그렇지 않고서야 해리가 왜 날 안 보고 싶어 하겠어요. 내가 뭘 잘못했으니까 그러겠지.”

“아냐! 네가 무슨 잘못을 해?”

내 질문에 문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평소의 해리 같은 목소리였다.

“잘못은 내가…….”

이어지던 목소리는 금세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희미한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잘못? 해리가요?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네 목을 잡고 비틀었잖아. 바닥에 내던지고 널 내 멋대로 탐하려고 했어.”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거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난 또 뭐라고.’

이제야 해리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이성을 잃어서 그런 거잖아요. 해리 잘못 아니에요.”

“내 잘못이야.”

“아니라니까요. 수작을 부린 놈이 잘못한 거죠. 거기에 휘말린 해리는 피해자고요.”

“내가 악마가 아니었으면…….”

문 너머에서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랬으면, 이성을 잃었어도 그렇게 네게 달려들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난 악마고 내 본성은 그거였어.”

“그건 당연한 거예요.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잖아요.”

“넌 왜 그렇게 태평해? 내가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놈이라는 게 문제잖아!”

해리가 대수롭지 않게 이 일을 넘기려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 있어? 그때도 이렇게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있어? 그딴 건 하나도 없다고.”

흥분해서 쏟아지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완전히 힘이 빠진 목소리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해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괴로운 얼굴을 하며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도 없어.”

작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해리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해리.”

문을 두드리며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는지 문 너머가 고요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아스페리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설마.”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로이와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부수자.”

“뭘?”

[뭘?]

로이와 아스페리츠가 동시에 물었다.

“이 벽.”

나는 문 옆의 벽으로 다가가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 이 너머에 해리의 방이 있을 것이다.

“꼭 문으로만 드나들라는 법은 없잖아?”

문이 막혀 있다면 벽을 뚫으면 된다. 왕성에 물어줘야 할 수리비가 더 늘어나겠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까 부수자고. 이 벽.”

[오.]

“아.”

내 제안에 아스페리츠와 로이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문이 막혀 있으면 벽을 뚫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이야. 내 계약자가 과격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의외의 해결책에 신이 났는지 아스페리츠가 내 주변을 빙글 돌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조용히 벽을 노려보고 있던 로이였다. 로이가 단단해 보이는 돌벽을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벽이 아니라 제 다리가 산산 조각났겠지만, 로이의 다리는 돌보다 더 튼튼했다. 로이의 발길질 한 번에 견고한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났다.

[난 뒤처리를 맡을게.]

자신도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아스페리츠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무너진 벽에서 떨어져 나온 잔해들을 한 번에 들어 올려 옆으로 치워버렸다. 덕분에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으며 로이가 뚫어 놓은 커다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로이와 아스페리츠가 만들어준 길을 지나 해리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렵지 않게 문에 기대어 앉은 해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어…….”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해리가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나는 해리가 정신을 차리고 멀리 도망가버리기 전에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가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내 손이 제게 닿자마자 해리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움찔했다.

“내가 잡았어요.”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해리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해리는 내 손 못 뿌리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도망 못 가.”

역시나 해리는 내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에게 그런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와 해리는 미묘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치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아스페리츠가 로이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꼬마 흑룡. 이제 우리는 가자.]

“왜?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넌 눈치도 없냐!]

“난 이브 옆에 있을 거야.”

아스페리츠가 아무리 잡아끌어도 로이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로이를 보니 그가 내 옆에 딱 붙어 해리를 불안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 불안한 눈빛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느낀 건 아마도 시선을 받은 해리였을 것이다. 해리가 로이를 향해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여기 있어. 내가 또 언제 돌아버릴지 모르잖아.”

그 목소리에 로이가 움찔했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불안과 경계도 한 꺼풀 벗겨지는 듯했다.

“그러면 망설이지 말고 날 공격해. 내가 상하는 건 생각하지 말고 제일 강하게…….”

나는 자조적으로 이어지는 해리의 말을 참다못해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로이. 괜찮으니까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응.”

내 말에 로이가 해리를 힐끗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페리츠가 기다렸다는 듯 로이의 팔을 끌고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해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막혀 있던 입이 자유로워졌는데도 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을 뿐이었다. 기가 죽어 어쩔 줄 모르는 머리통을 보고 있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국왕 이 망할 자식. 네가 우리 해리 기를 죽여?’

나는 또다시 국왕을 향한 응징을 굳게 다짐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왜 고개 숙여요.”

“내가 널 어떻게 봐.”

“나 다치게 해서요? 그거 미안해서?”

해리가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꽂은 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안하면 고개 들어서 나 봐요.”

내 말에 해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차마 내게 뻗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어서요.”

내 재촉에 해리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해리의 손을 붙잡아 그날처럼 내 목에 가져다 댔다.

“멀쩡하죠? 유피테르가 깨끗하게 고쳐줬어요.”

하지만 해리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손으로 느껴지는 나의 심장의 박동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해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나를 공격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손을 감쌌다.

“해리. 당신은 날 너무 우습게 봐요.”

언젠가 해리도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내가 무섭지도 않냐고, 왜 이렇게 날 우습게 보냐고 내게 화를 냈었다. 하지만 상대를 우습게 보고 있는 건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당신 손짓 하나에 죽을까 봐? 내 생명력도 보통은 아니거든요?”

무려 비행기 사고로 죽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눈을 뜬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생명력 강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아마 한 명도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 옆엔 해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더 강해질 흑룡도 있고, 정령들의 왕도 있고, 따뜻한 곳이 좋아서 요양 중인 와이번 대장도 있단 말이에요. 문제가 생기면 함께 힘을 써서 바로 잡아줄 존재들이 있다고요.”

모두 강한 존재들이었다. 일대일로 해리를 상대하기는 버겁겠지만, 모두 힘을 합치면 최악의 상황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정말 수습이 힘든 상황이 오면 태양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면 된다. 내가 갖은 고생을 하며 심장을 되찾아줬으니 어려운 순간에 나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그런 문제조차 생기지도 않을 거야. 그게 너한테 제일 좋아.”

“나한테 제일 좋은 건 당신이 옆에 있는 거예요.”

“넌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다치고 아픈 게 싫지도 않아?”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속이 답답한지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죽는 거? 당연히 무섭죠.”

나는 해리의 질문에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죽음은 생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평범한 두려움을 가진 인간일 뿐이었다. 그 다음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다치고 아픈 거? 당연히 싫어요.”

고통을 즐기는 존재들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이어지는 내 대답에 해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 그럼 그렇지. 내가 없는 게 훨씬 낫지. 그렇게 체념하려는 속내가 그대로 보였다.

하지만 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들보다도 해리가 좋아요. 해리가 옆에 있으면 난 전부 다 괜찮아요. 진심으로.”

가식 없는 진심에 해리의 눈이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라니.”

나는 픽 웃으며 해리에게 물었다.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면, 나 때문에 당신이 다치고 아플 수도 있다면. 그럼 나 피할 거예요? 버리고 도망갈 건가?”

“아니. 내가 어떻게 그래? 난 절대 안 그래.”

“그러니까요. 해리도 그런데, 나라고 왜 안 그러겠어요.”

내 말에 해리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떡 벌렸다.

“너도…… 날 그만큼 사랑해?”

“응. 그만큼 사랑해요.”

나는 얼떨떨하게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해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못 놔줘요. 내 옆에 있는 건 해리의 욕심이 아니라 내 욕심이니까.”

멍하던 해리의 눈에 점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건 열기에 가까운 생기였다.

“이브리아. 내 주인님.”

해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입술을 겹쳐왔다.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다급하고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런 해리의 마음에 응해주었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이며 호흡이 달아오르고 예민한 감각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서로의 몸도 더욱 가까이 맞붙었다. 지금 느껴지는 체온이 내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도 불확실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더 높아지는 온도를 붙잡았다. 이곳은 실내이되 실내가 아니었다.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어 누군가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나는 뒤늦게 나의 지난 결정을 후회했다.

“괜히 벽을 부쉈나 봐요.”

헐떡이며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 해리 역시 달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벽? 다시 만들지 뭐.”

해리가 가벼운 손짓으로 힘을 부려 무너져 내린 벽을 다시 세웠다.

누가 보면 이 벽이 무너져 내렸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깔끔한 수리였다. 악마의 힘을 고작 벽을 고치는 데 쓰다니. 나는 황당해져 헛웃음을 흘리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악마의 힘을 이런 일에 써요?”

“이런 일이라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해리가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당장 드레스를 찢어버리지 않은 건 그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하던 거 계속해도 돼?”

해리의 목소리에 억눌린 열기가 담겨 있었다.

“하던 거 계속해도 되냐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다 있어요?”

나는 웃으며 그가 입고 있는 옷의 단추로 손을 뻗었다.

“하던 거 계속 안 하면 화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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