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7/156)

* * *

나는 고요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사방이 새하얀색으로 물든 공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태양신이 만들어 낸 공간임을 알아챘다.

‘정신병원도 아니고 이게 뭐람.’

태양신에게 불만이 많아서인지 특별할 것도 없는 하얀 공간조차 불만스러웠다.

“왔군요, 이브리아.”

투덜거리는 내 앞에 태양신 솔이 나타났다. 날 보며 활짝 웃고 있는 것이, 지금 내 심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래요. 나 왔어요, 솔.”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솔 앞으로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내 기세를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가 내 두 손을 붙잡고 방방 뛰며 기쁨을 토해냈다.

“드디어 다섯 조각을 모아 심장이 완성됐네요! 이제 나도 힘을 모두 찾았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생…… 그래요. 나 고생 많았죠.”

고생이라는 말에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장면은 이지를 잃은 해리의 모습과 그가 받게 될 벌을 전하는 아스페리츠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우선 한 대, 아니, 몇 대만 좀 맞아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솔은 복부를 노리고 들어간 나의 주먹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진정해요, 이브리아. 고생한 거 알겠으니까…….”

그제야 내가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솔이 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진정? 진저엉?”

나는 뒷목을 잡으며 슬그러미 도망치려는 솔을 따라잡았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딴 거지 같은 꽃길을 걷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그, 그래도 이제 다 해결됐잖아요! 내가 다시 힘을 찾았으니까 뭐든 해줄 수 있어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신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솔이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호언장담하는 솔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난 신은 당신 하나뿐인데, 당신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더라고요.”

“이젠 달라요. 심장을 되찾아 전지전능한 신의 힘을 다시 얻게 되었으니까요.”

솔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뒤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눈을 어지럽혔다. 만약 인간이 신의 모습을 상상해 그림을 그린다면 지금 내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릴 것이다. 신성하고 경건한 풍경.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탄하며 고개를 조아렸겠지만, 그녀가 부여한 임무 덕분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 나는 달랐다.

“빛 꺼요, 솔. 지금 신성함이나 뽐내고 있을 때인가요?”

“……예. 그럴 때는 아니죠. 그렇고 말고요.”

나의 타박에 솔의 뒤에서 쏟아지던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싸늘한 내 시선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한 솔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심장을 되찾아줬으니, 그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솔이 태양을 닮은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물었다.

“이브리아. 당신의 소원은 뭔가요?”

나를 바라보는 솔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무엇이든 말해봐! 내 전지전능함을 보여줄게!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힘을 되찾아 잔뜩 신이 난 그녀가 내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선수를 쳤다.

“지금 당장 보내줄 수도 있어요. 물론 비행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솔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지난 삶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밤낮없이 일하며 쌓아온 경력과 내가 꿈꾸던 미래도 그곳에 있었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어요. 미련은 미련으로 남겨둬야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이브리아 오베론이었다. 이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인연 덕분이었다. 그중에서도 해리의 지분이 가장 컸다.

“그럼 역시 소원은 테오하리스와 연관이 있겠군요. 그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으니까요.”

어두워진 내 얼굴을 보며 솔이 부드럽게 웃었다. 가라앉은 내 분위기 때문인지 어느새 솔의 태도 역시 차분하게 변해있었다.

“그가 인간이 되면 어때요?”

솔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 테오하리스는 계약을 어긴 벌을 피할 수 있어요. 악마가 아닌 자에게 악마의 규칙은 필요 없지요.”

솔의 제안은 썩 괜찮은 방법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리의 삶을 비틀고 싶지 않아요.”

해리는 악마였다. 그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자신만만한 해리의 성격, 그가 가진 강력한 힘, 긴 수명과 아름다운 외모. 모든 것은 그가 악마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이다. 나는 내 손으로 그의 본질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

‘악마에서 인간이 되는 건 인간에서 원숭이가 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만약 해리가 그 본질을 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린 일일 것이다. 결코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솔 역시 내 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다음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릴 건가요? 테오하리스가 계약을 위반하기 전으로?”

그것 역시 그럴듯한 해결책이었지만, 나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국왕은 계략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눈앞의 사건은 피할 수 있겠지만, 또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나겠죠.”

짐작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는 나와 해리를 강력한 적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떨쳐내려고 할 거예요.”

만약 되돌아간 시간에서 내가 카시안을 후계자로 선택한다 하더라도 국왕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마음에 품은 의심은 몸집을 불리기만 할 뿐, 절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혹 의심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 된다. 의심은 잠시 몸을 숨긴 채 다시 고개를 내밀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 테니까.

‘게다가 난 이제 카시안을 후계자로 지목해서 국왕 그놈이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도 없는걸.’

그렇다면 상황은 또다시 국왕과 대립각을 세운 끝에 그를 죽이는 것으로 몰려갈 뿐이다. 뻔히 미래가 보이는 일에 아까운 소원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국왕을 향한 확실한 복수와 해리의 완벽한 구원을 원했다. 전지전능한 신이 들어주는 소원은 그렇게 써야 가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브리아, 당신의 소원은 이거겠네요!”

솔이 드디어 알아차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테오하리스의 벌을 면제해달라고 하고 싶은 거겠죠? 문제가 되는 계약 조항을 무효화해서 벌을 피할 수도 있어요. 나는 악마와의 계약에도 손을 쓸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니까 걱정 없어요.”

나는 자신만만한 솔의 미소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태도에 솔이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소원을 빌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당신에게는 뭐든 대답해줄게요, 나의 대리인.”

솔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소 과장된 몸짓이었지만 그녀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는 행동 같았다.

“왜 하필 캐서린이었어요?”

내 질문에 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내게 보여준 이야기의 주인공도, 마지막 심장 조각을 가진 것도 모두 캐서린이었잖아요.”

<레이디 캐서린>이 단순한 소설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쭉 궁금했던 이야기였다. 내게 이브리아의 삶을 살게 할 거라면, <레이디 캐서린>이 아닌 <레이디 이브리아>를 보여주는 쪽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솔은 이브리아가 아닌 캐서린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하필’ 그녀였던 게 아니라, ‘꼭’ 그녀여야만 했어요.”

솔은 마치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째서요?”

“그녀는 오래전 내 심장을 가지고 도망간 자의 환생이니까요. 그녀가 모든 일의 시발점인 셈이죠.”

그렇게 말하는 솔의 얼굴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나를 바라볼 때의 따뜻하고 친근한 미소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인간에게 언제든 단죄를 내릴 수 있는 절대자의 잔혹함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자는 인간들을 부추겨 내 심장을 조각내어 곳곳에 흩어놓고, 마지막 조각은 자신이 지녔어요.”

조용하고 느리게 이어지는 솔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굴만큼이나 서늘했다.

“조각을 손에 넣은 덕분에 아주 강한 마력을 갖게 되어 죽을 때까지 부와 권력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죠.”

강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 지금 캐서린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했다.

‘캐서린이 강한 마법사가 된 것도 전부 전생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태양의 심장 조각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태양의 심장 조각과 함께 캐서린의 엄청난 마력도 사라졌을 것이다.

‘전생에서부터 부당하게 얻은 힘을 다시 빼앗긴 거야.’

하지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캐서린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일 것이다.

“나는 심장과 함께 신의 권능을 잃었습니다. 의심을 배웠고, 배신을 깨달았지요. 그전까지 나는 피조물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순수한 신이었는데…….”

솔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서늘했던 시선에 어느새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이브리아.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한 번 품기 시작한 의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신이기에 그런 의심을 떨쳐버려야만 했습니다.”

솔이 천천히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서 같은 인간을 대리인으로 삼았어요. 인간으로 얻은 의심은 인간으로밖에 씻을 수 없잖아요? 결과적으로 내 선택이 옳았지요.”

곱게 휘어진 솔의 눈에는 애정과 신뢰가 가득했다.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같은 눈이었다.

“그러니 소원을 말해봐요, 이브리아. 나는 무엇이든 들어 줄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내 소원은 간단해요.”

나는 솔에게 내 소원을 전했다. 사실 캐서린의 방 창문을 넘을 때부터 솔에게 말할 소원은 정해져 있었다. 국왕을 향한 확실한 복수와 해리의 완벽한 구원.

“내 소원은…….”

이어지는 이야기에 솔의 눈이 커졌다.

* * *

“허억!”

국왕은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뜨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악마에게 목이 비틀려 턱 막혔던 숨이 한 번에 밀려들자 새카맣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그는 조금씩 선명해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그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생명의 증거인 심장의 고동 소리가 요란하게 몸을 울리고 있었다.

‘내가 산 것인가?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악마에게 목이 꺾이며 생전 처음 겪는 고통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온 천장이 익숙했다. 자신의 방이 분명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국왕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핫!”

‘그래!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지.’

한 나라 왕이 그렇게 죽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나.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일이었다. 국왕은 자신이 그런 우스운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건 악마가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결국 향이 제대로 먹혀 악마를 제압한 것이 분명했다.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웃기는 소리.’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코웃음을 흘렸다.

‘역시 그놈도 어쩔 수 없는 악마였어.’

국왕은 건국왕의 일기장에 남은 기록을 가지고 비밀리에 흑마법사들을 만났다. 악마의 본능을 자극하고 중독시켜 종래에는 굴복시키는 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건국왕처럼 사형수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고 악마를 소환해 실험까지 마쳤다.

‘역시 건국왕께서는 위대하셨어.’

악마는 감히 제레인트의 건국왕을 머저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국 그 머저리가 남긴 기록 때문에 머저리의 후손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기가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 건방진 악마 놈.’

국왕은 당당하게 입을 열어 이제는 자신의 충실한 종복이 되었을 악마를 불렀다. 이제 악마를 손에 넣었으니 신전에서 신탁의 주인을 가려내기 전에 서둘러 그 여자를 없애야 했다. 자신이 쓰러지고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마음이 더욱 급했다.

“으억마야아.”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히 악마야-라고 말했는데, 소리가 괴상하게 일그러져 입 밖으로 쏟아졌다.

‘내가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나?’

국왕은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아 목이 메마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면 나아지겠지.’

그는 물을 가져다줄 하인을 부르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고 설렁줄을 당겼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그의 몸뚱이는 여전히 침대에 딱 붙어 있었다.

‘몸까지 굳어버린 건가……?’

국왕은 그제야 제 몸이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아주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들어보려고 애썼다. 손이라도, 아니, 손가락만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이익!’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무겁다는 말로도 이 감각을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마치 온몸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기이한 감각을 깨닫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불안했다. 너무도 불안했다.

“이제 눈을 뜨셨나 봐요.”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국왕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 대신 눈동자를 굴려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이브리아가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느어…….”

국왕은 놀라서 이브리아를 불렀으나, 그 말조차 제대로 된 소리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브리아는 국왕이 자신을 불렀다는 걸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많이 궁금하실 거예요.”

이브리아가 천천히 국왕 곁으로 다가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그러자 국왕의 두 눈에 이브리아의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당신은 이미 한 번 해리의 손에 죽었어요. 하지만 내가 태양신의 힘을 빌려 다시 살려냈죠.”

이브리아의 말에 국왕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태양신의 힘을 빌려 자신을 살려냈다는 말도 믿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사실이래도 그녀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브리아 오베론의 적이었다. 그녀의 악마를 뺏으려고 했고, 악마를 이용해 그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자신을 되살려주는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으어에…….”

“왜냐고요?”

발음은 여전히 부정확했지만 이브리아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이해했다.

“뭐,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말 살려만 놓은 것뿐이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국왕의 눈빛에서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이브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폐하의 상처는 아주 깊었어요. 목이 부러졌고 화상도 심했죠. 그 상태에서 정말 숨만 되찾아 왔으니…….”

이브리아의 시선이 국왕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한때 왕좌에 앉아 거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몰골의 남자가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왜 몸이 안 움직이는지 이제 아시겠죠?”

“느어으, 니에으녀으이!”

국왕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이를 바드득 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곁을 지키고 선 이브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 죄송해요. 도무지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

조롱이 담긴 이브리아의 말투에 국왕이 더욱 분개해서 소리쳤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국왕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는 당장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그리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값비싼 포션을 쓴다면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브리아의 눈에도 그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태양신에게 국왕을 다시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 때도, 이브리아는 그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원에 단서를 달았다.

“이제 당신의 몸에는 포션이 통하지 않아요. 신성력도, 마법도. 그 어떤 것도 당신의 몸을 회복시키지 못할 거예요.”

이브리아의 말에 국왕의 외침이 뚝 끊어졌다.

“그러니 죽는 날까지 이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당신의 꿈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겠죠.”

국왕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브리아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브리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진실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이 그대로 죽는 건 너무 과분하더라고요. 죽으면 다 끝인데, 죽은 사람한테 복수해서 뭐해. 그러니 당신이 살아서 전부 지켜봐야죠.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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