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소원
캐서린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처럼 신탁의 주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왕성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데도 캐서린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나는 먼저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캐서린에게 만남을 청했다. 이런 정중한 방식이 캐서린을 덜 불안하게 할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방문을 이처럼 당당하게 청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건국제 연설에서 쓰러진 이후 아직까지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만남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어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나’만 만나기 곤란하다는 소리였다.
‘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이브리아는 캐서린을 독살하려다 발각된 전적이 있었다. 그녀가 나와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지금 그걸 이해하고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그렇다면 방법은 이런 쪽뿐이다. 잠입. 침입. 침투.
‘하나같이 범죄 같고 참 좋네.’
악역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이보다 어울리는 일이 있겠나. 나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캐서린의 방 창문을 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이가 캐서린의 방 창문을 넘었고, 나는 그의 등에 업혀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나는 로이와 함께 창문을 넘자마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캐서린과 마주쳤다.
“어…….”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캐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곧 경악에 찬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면 일이 귀찮아진다.
“꺄아… 읍!”
나는 재빨리 캐서린의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주겠어요, 우드베르슨 양? 사람들이 몰려오면 내가 좀 곤란해져서요.”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캐서린 입장에서는 조금 친절한 말투의 협박일 뿐이겠지. 나는 읽고 있던 책까지 바닥에 떨어뜨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캐서린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난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비명 지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손 내릴게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서히 캐서린의 입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캐서린이 다시 비명을 지르면 재빨리 입을 틀어막을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조용했다. 대신 겁에 잔뜩 질려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대화를 할 수가 없잖아.’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 사건 이후 캐서린은 이브리아와 마주치기만 하면 이렇게 덜덜 떨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마주하는 건 당연히 두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내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로이에게 눈짓했다.
“로이.”
내 신호에 로이가 처음 창문을 넘을 때부터 들고 있던 인형을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목에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는 귀여운 곰인형이었다.
“어?”
그것을 본 캐서린의 두 눈이 창문을 넘어온 나와 로이를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커졌다.
“어릴 때부터 안고 자던 인형이죠? 커서도 머리맡에 항상 두고 지내고요.”
캐서린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우드베르슨 가에 사람을 보내서 가져온 거예요.”
사실 우드베르슨 가에 보낸 건 사람이 아닌 정령왕이오, 인형은 가져온 것보단 몰래 훔쳐온 것에 가까웠다. 아스페리츠는 내가 이제 인형까지 훔쳐와야 하느냐며 투덜거렸지만,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냈다.
“그런 거라도 있으면 좀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가장 편안한 상태일 때 곁에 두는 물건이 품 안에 있다면 조금이나마 경계심을 풀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형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이브리아 양이 이 인형을 알고 있어요?”
“알려준 사람이 있어서요.”
물론 캐서린은 그 사람이 태양신 솔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태양신이 내게 보여준 <레이디 캐서린>의 주인공은 캐서린 우드베르슨이었다. 그 책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시안도 모를 텐데…….”
캐서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내 짐작대로 익숙한 물건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다.
“좋아요.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네요. 밤도 깊었고, 나와 오래 마주하는 건 우드베르슨 양도 불편할 테니 본론만 말할게요.”
나는 캐서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캐서린이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모르겠다는 듯 긴장된 눈으로 나를 쫓았다.
“가슴을 보여줘요.”
“……예?”
캐서린의 입에서 맥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 가슴이요?”
“네. 우드베르슨 양의 가슴을 꼭 보고 싶어요.”
“……진심이세요?”
“진심입니다.”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를 바라보는 캐서린의 눈에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이브리아 양께서 지금 제 가슴을 보고 싶어서 창문을 넘으신 거라고요? 몇 번이나 만남을 청하셨던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캐서린이 재차 확인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는 우드베르슨 양의 가슴 속에 있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요.”
내 말에 캐서린이 더욱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가슴 속에 뭐가 있는데요?”
“신관들이 신탁의 주인을 찾기 위해 태양신의 심장을 깨웠죠. 그때 당신의 가슴에서 붉은빛이 피어올랐고요. 난 그게 필요해요.”
캐서린 역시 그날의 놀라운 일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날 붉은빛이 피어올랐던 곳을 정확하게 부여잡으며 손을 덜덜 떨었다.
“지금 제 가슴을 가르고 이 속에 든 걸 가져가시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신탁의 주인이 되고 싶으세요?”
“아뇨, 우드베르슨 양. 만약 신탁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줄 세운다면 제가 그 첫 번째에 서 있을걸요.”
잔뜩 질린 목소리에서 제법 진심이 느껴졌던지 캐서린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풀어졌다.
“……그럼 왜 제 가슴 속에 든 게 필요하신 건데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는지 캐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모든 사연을 캐서린에게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말하긴 힘들어요. 어차피 다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요.”
악마의 존재와 태양신이 부여한 임무.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을 전부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서린 앞으로 다가갔다. 내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캐서린의 어깨가 조금씩 더 움츠러들었다.
“난 오늘 우드베르슨 양에게서 원하는 걸 가져갈 거예요. 협조하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겠죠. 하지만 웬만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요. 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캐서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걸 잃으면 난 신탁의 주인이 될 수 없잖아요.”
“신탁의 주인이 되고 싶어요?”
“네. 그래야 시안이 왕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신탁의 주인이 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캐서린 역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상황일 뿐이었다.
“안타깝네요. 카시안 제레인트가 왕이 될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째서요?”
“내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국왕은 카시안이 왕이 되기를 바랐다. 나 역시 그 생각이 그리 나쁘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그는 해리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비열한 인간이 바라는 결말을 맞이하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꿈을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평화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 같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악역답게 갈 걸 그랬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로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캐서린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목을 가볍게 내리쳤다. 하지만 캐서린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여리게 보이지만 그녀 역시 마력치 9의 마법사였다.
“이브리아 양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전 최선을 다해 막을 거예요.”
마법을 일으켜 로이의 손짓을 튕겨 낸 캐서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투명한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캐서린의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로이였다. 이제 막 성체가 되었다지만 드래곤은 드래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그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그래요. 당신의 입장을 이해해요. 하지만 나도 내 입장이 있거든요.”
나는 로이에게 다시 한번 눈짓했다. 로이는 제게 맡겨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캐서린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대등하게 맞서는 것 같았던 캐서린은 금세 로이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한 로이가 조금씩 강한 힘을 사용한 탓이었다. 견고해 보였던 방어막은 금세 산산조각이 났다. 로이는 무너져내리는 방어막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캐서린의 뒷목을 내려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나는 바닥에 축 늘어진 캐서린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나는 이 속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빛이 새어 나왔던 자리에 반지를 낀 손을 얹었다. 어떤 원리로 반지가 심장 조각의 힘을 흡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사례를 떠올려보면 조각의 가까이 갔을 때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반지 가까이에 조각의 기운이 닿자 신관들이 신탁을 이야기하던 그 날처럼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네 번의 경험과 달리 밀려오는 기운이 버거웠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밀려드는 거대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온몸을 짓누르는 강한 압박감에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이브!”
놀란 로이가 내게 손을 뻗었지만 강한 기운이 그를 밀어내 버렸다. 나는 당황한 얼굴의 로이를 쳐다보며 끊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하지만 압박감이 점차 강해지자 나의 노력도 금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브!”
다급한 로이의 목소리를 끝으로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