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5/156)

* * *

이미 솟아오른 불길 때문에 왕성은 어수선했다. 시종과 시녀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동이를 들고 불길이 치솟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아스페리츠를 타고 그들을 지나쳐 소란의 중심 속으로 날아갔다.

[여기야.]

아스페리츠가 나를 내려준 곳은 불길이 시작된 유리 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온실을 힐끗 쳐다본 뒤 음산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빽빽하게 유리 온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쳐 갈수록 그 기운이 강해졌다.

‘해리가 여기 있어.’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존재는 악마뿐일 것이다. 이것이 해리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이 떨렸다. 나는 애써 떨림을 진정시키고 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우뚝 선 해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변에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새들이 대여섯 마리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지난번 유리 온실을 향해 걸을 때 귓가를 울렸던 맑은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리가 새들을 전부 죽여버린 것이다.

“해리.”

나는 조심스럽게 해리를 불렀다. 그러자 죽어버린 새들을 발로 짓이기고 있던 해리가 천천히 뒤돌아 나를 보았다. 해리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를 불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았던 그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차가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치맛자락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는 동안 해리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마자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해…….”

깊게 심호흡하고 다시 한번 해리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해리가 내 목을 붙잡았다. 심장의 박동이 손끝에 느껴지는지 해리가 씩 웃었다. 내가 처음 보는 진짜 악마의 모습이었다.

“윽.”

목을 쥔 해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버거운 압박감과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해리.”

나는 차분하게 해리의 이름을 부르며 목을 틀어쥔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이러면 안 돼요. 정신 차려.”

손을 떨쳐내지 않고 저를 타이르는 내 태도가 신기한지 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다는 듯 탐색하는 시선이 나를 훑었다. 해리는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고개만 숙여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평소의 해리였다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칭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해리는 그런 다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내 냄새에 집중했다.

‘꼭 먹이를 탐색하는 맹수 같아.’

이대로 잡아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해리가 내 목덜미를 강하게 깨물었다. 평소처럼 애정이 담긴 행동이 아니라 상처 내기만을 위한 야만적인 행위였다.

“읏!”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해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런 반항이 해리를 자극한 것 같았다. 목을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해리가 그대로 나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대로 지면에 부딪히는 강한 고통에 숨이 턱 막혀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인님!]

유피테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너무 아파 뭐라고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해리는 괴로움에 헐떡이는 내 위로 여유롭게 올라타 나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지를 잃은 차가운 눈이 싸늘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해리가 처음으로 폭주했을 때는 본능이 요구하는 쾌락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해서였다. 문제를 인식한 뒤 나와 해리는 쾌락을 충전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 이후로는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다.

‘얼마 전에 함께 잤으니 충전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테고.’

결국 누군가 일부러 해리의 본능을 자극해 이 사달이 났다는 소리였다.

‘국왕이 벌써 손을 쓴 모양이네.’

루크가 말했던 대로 흑마법사들을 이용해 비겁한 수를 쓴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 위에 올라탄 해리가 다시 목을 조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윽!”

처음 내 목을 틀어잡았던 이유가 탐색과 경고를 위해서였다면, 이번 손길의 목적은 살상이 분명했다. 더욱 강해진 손길이 목을 죄어오자 숨이 턱 막혔다. 산소가 부족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름!’

나는 본능적으로 해리를 저지할 방법을 떠올렸다. 해리의 진명은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의 목줄이었다.

“테오하리스! 멈춰요!”

나는 재빨리 해리의 이름을 부르며 명령했다.

“나중에 정신 차리면 나한테 미안해서 어쩌려고 이래요?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때 정신 차려요!”

방법이 유효했던지 내 목을 조르던 해리가 멈칫하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제 정신이 돌아온 건가?’

하지만 해리의 두 눈은 여전히 흐렸다.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진짜 이름을 불러도 안 돌아온다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해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커다란 움직임에 등에서 아릿한 둔통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름을 듣고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해리가 힘없이 내 손길을 따라 끌려왔다.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해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맞닿는 온기에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늘어져 있던 해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효과가 있어!’

방법을 찾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해리의 입술을 핥았다. 가벼운 자극에 그의 입이 저항 없이 열렸다. 나는 그 속으로 파고들어 여린 속살을 쓸어내렸다. 말캉한 혀와 함께 서로의 숨이 질척하게 뒤섞이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흐으…….”

해리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자극하는 울림에 나는 재빨리 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가웠던 그의 눈에 어느새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돌아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해리의 멱살을 놓고 그의 입술에서 입을 뗐다. 그 순간 해리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손을 뻗어 거칠게 내 턱을 붙잡은 해리가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고는 그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내가 놀라서 몸을 비틀자, 다른 손이 내 어깨를 짓눌러 가볍게 나를 제압했다.

‘으아. 돌아온 게 아니었어!’

돌아오기는커녕 다른 쪽의 본능을 제대로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목을 졸리거나 바닥에 내던져지는 것보단 이게 낫긴 한데…….’

이 방법으로도 해리를 진정시킬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해리의 입맞춤은 더욱 농밀해졌다. 어깨를 제압하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한 번 제대로 하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이대로 그냥 해?’

하지만 나는 금세 그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아냐. 여긴 밖이잖아. 누가 보면 어떡하냐고. 하더라도 안으로 데려가서 해야지.’

그러니까 우선은 해리를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 고민이 그렇게 막힌 벽에 다다른 순간.

“윽!”

맞닿은 해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의 몸이 그대로 내 위에 무너져 내렸다. 나를 압박하는 무게가 상당히 버거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브!”

해리의 몸으로 가려진 시야 뒤편에서 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겨우 몸을 비틀어 해리의 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로이의 손에 척 보기에도 단단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로이. 그걸로 해리를 친 거야?”

“응. 하지만 괜찮아. 해리는 이걸로 때려도 튼튼해서 죽진 않아.”

로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몽둥이를 던져버렸다.

“원래 해리라면 이런 공격에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정신이 완전히 팔려있어서 제대로 때릴 수 있었어.”

로이가 뿌듯하게 말하며 내 위에 겹쳐 있는 해리의 뒷덜미를 잡아 가볍게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나를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편안하게 숨을 쉬며 상체를 세웠다.

“여긴 어떻게 왔어?”

[내가 데려왔어.]

로이에게 한 질문인데 대답은 아스페리츠에게서 나왔다.

[나 혼자서는 쟬 못 감당할 것 같아서 불러왔지.]

“안 보이길래 꽁무니를 뺀 줄 알았더니.”

[무슨 소리야? 정령들의 왕은 그렇게 쉽게 도망가지 않아.]

“하지만 해리와 싸울 땐 늘 도망가잖아.”

내 지적에 아스페리츠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하늘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이야. 하늘이 참 맑아.]

‘하늘이 맑긴 뭐가 맑아.’

하늘은 지금 유리 온실에서 시작된 검은 연기로 엉망이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해리를 달랑 들고 있는 로이에게 눈을 돌렸다.

“로이. 해리를 방으로 데려갈 수 있겠어?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응.”

“해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잘 지켜보고, 혹시 정신을 차린 뒤에도 상태가 이상하면 지금처럼 기절시켜버려. 잘할 수 있지?”

“응. 할 수 있어.”

로이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해리를 손에 들고 있는데도 몸짓이 아주 가벼웠다. 로이는 그대로 나무를 타고넘어 왕성의 중심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으…….”

나는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고 있었던 신음을 토해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억눌러 놓았던 통증이 밀려온 것이다.

‘유피테르가 필요해.’

나는 다리를 더듬어 유피테르를 손에 쥐었다.

“유피테르.”

[예. 뭐가 필요하신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유피테르가 번쩍 빛을 내며 치유 기능을 써주었다. 빛이 퍼짐과 동시에 온몸을 붙잡고 있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무리 움직여도 아픈 구석이 없었다.

‘루크가 아직 미로 정원에 있을까?’

혹시나 해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를 대비해 그를 깨울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법은 국왕과 접촉했다는 흑마법사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루크를 통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미로 정원으로 가보자.’

이미 루크가 떠나고 없다면, 리던을 찾아가 그와 연락을 취해야 한다.

[이브리아 오베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내 옆으로 아스페리츠가 따라붙었다.

[아까 너무 급해서 못한 말이 있어.]

“뭔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스페리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시답잖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갔다.

[악마가 인간들의 왕을 죽였어.]

“뭐라고? 인간들의 왕을 죽여? 해리가?”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왕이 이상한 향을 써서 악마를 자극했거든.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된 거고.]

경악에 찬 내 시선을 받은 아스페리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악마의 본능을 자극해서 그 녀석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했나 봐. 하지만 당연히 실패했고, 본능이 깨어난 악마의 손에 끽, 죽고 만 거지.]

“정말로 죽었어? 국왕이?”

당황해서 되묻는 나를 보며 아스페리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난리야? 인간의 왕이 죽은 게 뭐가 그리 큰 문제라고.]

“당연히 큰 문제지!”

[어차피 온실에 불이 났으니 사고사로 위장해도 되잖아. 그래서 내가 일부러 불을 안 끄고 온 거라고.]

아스페리츠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국왕이 죽은 건 큰 문제지만, 어떻게든 수습하고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방법은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된다.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일수록 쉽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쉽게 만드는 권력과 명성을 가진 쪽이었다.

문제는 해리가 국왕을 죽였다는 것. 그 자체였다. 나는 해리에게 살인을 금지했다. 우리의 계약 조건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해리는 살인은 물론이고 나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살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리가 국왕을 죽였다니.

“……계약을 위반한 게 돼버리잖아.”

나는 리피와 레피를 불러냈을 때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계약을 위반하는 건 악마들에게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겨져 엄청난 벌을 받는다고 했다.

‘다음 생에 하급 악마로 태어나 평생 욕망을 탐하지 못하고 산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은? 지금 삶에서는 계약을 위반한 악마가 어떤 벌을 받게 되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악마의 계약에 대해 잘 아는 자가 필요했다. 리피와 레피라면 답을 알 것이다.

“아스페리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아스페리츠를 불렀다.

“에렐로 가서 리피와 레피에게 악마가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고 답을 가져와 줘요.”

[……응. 알았어.]

심각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아스페리츠가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나는 나무 사이에 홀로 남아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 * *

겨우 불길을 잡은 유리 온실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음에도 국왕의 사망 소식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온실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시신의 훼손이 매우 커서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얼굴 부분의 훼손이 심각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체의 곁에서 국왕의 왕관이 발견된 데다, 유리 온실 자체가 국왕의 공간이라는 사실이 더해져 사람들은 그 사체가 국왕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죽음은 그렇게 짐작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국왕의 두 아들, 카시안과 리던의 의견을 구한 뒤 부검까지 마친 뒤에야 공식적인 국왕의 죽음이 확인될 거라고 했다. 그 뒤에는 국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를 찾기 위한 수사가 시작될 것이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하던 왕성이 더 시끄러워졌어.’

주인을 잃은 신탁이 내려진 이후 왕성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시끄러운 왕성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의문을 나눌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러나 왕성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나는 죽은 자가 국왕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나는 죽은 듯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해리의 머리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잠들어버린 거예요? 우리 해리는 아마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인가 봐.”

‘그럼 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을 깨우는 왕자인가?’

어쩐지 우스운 생각이 들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리피와 레피를 만나고 온 아스페리츠는 내게 계약을 위반한 악마가 받게 되는 벌이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계약을 위반한 악마는 다음 생에 하급 악마로 태어나지. 욕망은 배제당한 채 잡일을 도맡아 해.

-그건 알아. 문제는 지금 이번 생이지. 이번 생의 벌은 뭔데?

-…계약은 파기되고, 악마는 계약자와의 기억을 모두 잃어. 그 기간의 삶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거지. 그게 현생의 벌이야.

해리가 원해서 계약을 위반한 게 아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그는 절대로 나와의 계약을 위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다. 국왕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해리는 벌을 받게 된다. 아니. 이미 벌을 받아 머릿속에 나에 대한 기억이 없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다행인가.’

나는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래. 공주님을 깨우는 왕자. 내가 하지 뭐.”

기적이 뭐 그리 어려운가.

‘태양신의 심장 조각 하나만 더 모으면 돼. 그럼 소원을 말할 수 있어.’

남은 태양신의 조각은 하나. 게다가 위치 역시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캐서린 우드베르슨. 내가 읽은 책의 주인공. 그녀가 마지막 심장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그냥 악역으로 살겠습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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