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상하네.’
나는 카시안의 뒤를 따라 걸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겠다더니, 그는 영 엉뚱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미로 정원인데…….’
미로 정원은 왕성의 명물이었다. 작정하고 만든 미로는 아니었지만, 머리 위까지 자란 나무와 복잡하게 얽힌 길 덕분에 미로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워낙 크고 복잡하다 보니 밀회를 즐길 수 있는 장소도 많아 파티가 열리면 연인들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 미로 정원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니 나랑 왕세자가 갈만한 곳은 아니란 말이지.’
“전하.”
나는 의심 끝에 뒤따르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카시안을 불렀다.
“여긴 전하의 방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내 지적에 카시안이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곧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복도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카시안이 몸을 돌려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보다 카시안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는 게 먼저였다.
“그 방은 안 됩니다.”
카시안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를 똑바로 향하는 그 시선에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거 설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 방에도 이 얼굴을 한 사람이 또 있나 보죠?”
카시안, 아니, 카시안인 척하고 있는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붙잡힌 손목을 빼냈다.
“왜 카시안으로 변한 거야?”
“네가 순순히 따라나설 사람이 이 녀석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나, 카시안이 불렀다고 순순히 따라 나가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
“하지만 이렇게 따라왔잖아. 그럼 됐지.”
루크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한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조용히 따라와. 누구 눈에 띄면 곤란해. 오늘은 급하게 들어오느라 카시안 그놈을 못 재웠어.”
루크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미로 정원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나는 그를 따라잡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좋아. 여기면 되겠다.”
한참을 걸어가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춰선 루크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헉헉대는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이거 걸었다고 이 상태야?”
“내 쓰레기 같은 체력에 뭐 하나 보태준 거라도 있으신지? 그렇다면 그렇게 비난하는 걸 허락하겠어.”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또 왕족을 사칭했네. 그것도 왕성에서.”
“어쩔 수 없었어. 국왕으로 변하지 않은 게 어디야?”
“그랬다면 진짜 반역죄로 목이 잘릴걸.”
나는 루크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이런 대담함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실제로도 루크의 변장은 아주 훌륭해서, 그가 먼저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왕족사칭죄를 무릅쓰고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또 사고 싶은 정보가 있어?”
그거라면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신관들이 광장에서 요란하게 신탁을 발표한 이후, 모두의 관심은 그쪽에 쏠려 있었다.
“신탁의 주인에 대한 거라면 나도 몰라. 그건 신전에 가서 물어보는 게 빠를 걸?”
“이미 그러고 있어. 너한테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루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내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읽었다면 나의 착각일까.
“멀쩡하네.”
하지만 루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내 생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상태 보려고 찾아온 거야? 왜?”
“그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루크가 자신도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직도 외관은 카시안이었기 때문에, 나는 카시안이 머리를 벅벅 긁는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너한테 하려는 말도 엄청 비싼 정보인데.”
루크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문제였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를 빼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정보값이야. 청요석으로 만든 귀걸이니까 꽤 비싸지. 부족하면 이걸 선금으로 쳐.”
“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맨입으로 말해주기엔 정보가 아깝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자 루크가 다시 한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그의 입에서 긴 한숨과 함께 비싸다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국왕이 최근에 특이한 약재를 사들였어.”
“약재?”
“흑마법사들, 그러니까 마법사 중에서도 어둠의 마법에 심취해 협회에서 추방당한 마법사들과도 접촉했다고 해. 이런 시기에 국왕이 그런 위험한 쪽에 손을 댈 이유는…….”
루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 하나뿐이겠지.”
나는 그가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이어 붙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놈의 국왕.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 * *
“네 정체를 알고 있는 내 앞에서 뭘 믿고 그리 건방지게 굴지?”
국왕의 말에 해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인간이 이딴 식으로 협박을 하다니.”
자신의 손짓 하나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녹아내릴 인간에게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머저리 놈이 후손에게 좋은 걸 가르쳤군. 정작 그놈은 나만 보면 오줌 마려운 개처럼 벌벌 떨었는데 말이야.”
제 선조를 모욕하는 말에 국왕이 발끈했다.
“감히 그런…….”
“아. 실제로 지린 적도 있었던가?”
해리는 픽 웃으며 국왕을 향해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같은 악마들 역시 이 기운을 정통으로 받아내면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고는 했다.
‘그러니 네깟 놈이 이걸 견뎌낼 리가 없지.’
“큭!”
해리의 예상대로 국왕은 기운을 견뎌내지 못했다. 자신을 덮쳐 오는 기운에 숨이 턱 막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목을 부여잡으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해리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싸늘한 눈으로 국왕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인간들 사이에 잘 섞여 지내기 위해 이런 기운을 억눌러 두지만, 제게 건방지다며 입을 놀린 인간에게 그런 배려는 필요 없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다시는 자신을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저 인간의 뼈에 공포를 새겨놓아야 한다.
사실 해리는 고작 인간 따위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사실에 큰 감흥이 없었다. 인간들도 제 주변을 얼쩡거리는 파리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길길이 날뛰진 않을 것 아닌가. 언제든 짓눌러 제압할 수 있는 상대에게는 누구나 관대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주인님까지 우습게 보는 건 내가 못 참거든.’
해리는 기운을 조금 더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신이 나서 날뛰기 시작한 살기가 고스란히 국왕의 몸을 짓눌렀다.
“커헉!”
국왕이 핏기없는 얼굴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국왕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커헉, 그만……!”
국왕은 핏발이 바짝 선 눈으로 간절하게 해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날 죽이면, 크흑, 그 애도, 헉, 곤란해진다……!”
“글쎄. 너 하나 죽인다고 별로 곤란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해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널 죽였다고 날뛰는 놈들의 목을 하나씩 날려버리면 온 세상이 조용해질걸?”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브리아가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해리와 이브리아가 나눈 그 약속을 알지 못한다. 해리는 눈앞에서 떨고 있는 연약한 인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내가 요즘 우리 주인님 덕분에 너무 상식적으로 살았지? 그러니 너 같은 조무래기가 이딴 어이없는 협박을 하는 거 아냐.”
해리는 조금 더 기운을 풀었다. 그러자 국왕의 눈에 지독한 공포가 서렸다.
“그만, 컥! 이제는, 못, 견디는, 크억!”
“내가 멈춰주길 바란다면 제대로 사과를 하셔야지. 응?”
해리의 말에 국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치욕으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미안, 크흑, 미안하다!”
“미안? 말이 짧다. 죄송하다고 해야지, 머저리의 후손아.”
“크헉! 죄송, 합니다.”
국왕이 고개를 푹 숙이며 겨우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악마가 아니었다.
“에이. 태도가 공손하지 못하잖아?”
영문모를 해리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폐부를 찌르는 살기에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겨우 시선이 마주치자 다리를 꼬고 앉은 해리가 씩 웃으며 발을 까딱였다.
“여기. 내 발밑에 와서 머리를 조아려야지.”
“뭐, 라고……!”
국왕의 눈빛에 분노와 굴욕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 깊은 분노와 굴욕감도 살아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 국왕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해리의 앞을 향해 엉금엉금 기었다. 온몸을 압박하는 기운 탓에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만큼 굴욕의 시간도 길었다. 국왕은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리의 시선을 받으며 겨우 그의 앞까지 기어가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 크헉, 합니다.”
해리는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국왕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건방지다며 혀를 차던 인간이 고작 몇 분 만에 이처럼 초라하게 자비를 구걸하고 있다니.
“별로 사죄가 마음에 와닿진 않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낸 말과 달리 해리는 그대로 기운을 제 속으로 갈무리했다. 창백하게 질려있던 국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해리는 다리를 뻗어 정신없이 공기를 흡입하고 있는 국왕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컥!”
무방비하게 주저앉아 있던 국왕의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단단한 구두에 살이 찢겼는지 머리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브리아가 죽이지 말랬지 때리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해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심한 국왕의 꼴을 쳐다보았다. 왕성의 신하들이 보면 기겁을 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해리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밟아줘야겠는데?’
그러나 해리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바닥에 널브러진 국왕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크핫!”
작게 터져 나왔던 웃음은 점점 커져 금세 유리 온실을 가득 채웠다.
“으하하!”
엉망이 된 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국왕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한 대 맞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해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 국왕이 겨우 웃음을 수습하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그의 왼쪽 얼굴이 푹 젖어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피로 옷까지 엉망이었다. 국왕은 손으로 상처 부위를 눌러 쏟아지는 피를 막으며 해리를 힐끗거렸다. 제대로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공포심이 몸에 남아있는 듯했다.
“과연. 이게 악마의 힘이군.”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해리는 그 소리를 잡아챘다.
“그래. 이게 악마의 힘이야.”
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알게 됐으니 똑바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거다, 머저리의 후손.”
“큭. 글쎄.”
해리의 경고에 국왕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제압당해 기죽은 인간의 반응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어긋난 반응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기이한 불안함이 밀려와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려댔다.
“……뭐야. 그 반응은?”
“건국왕께서는 너를 두려워했지. 그래서 수많은 실험을 했다.”
하지만 국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해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흑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 악마를 완전히 제압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러는 동안 바친 영혼이 몇 개인지…… 왕국 사형수들의 영혼은 모조리 그 실험에 쓰였어.”
국왕의 두 눈이 해리를 향했다. 어느새 두려움은 씻겨 내려간 채 기이한 광기가 그의 눈빛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희생 끝에 건국왕께서는 방법을 찾아냈다. 악마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뭐?”
해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국왕이 큭큭대며 웃었다.
“악마였다는 대마법사의 후손이 나타나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전야제 파티에서 약이 든 술을 먹고도 멀쩡한 네놈을 보고 인간이 아님을 확신했지. 그걸 마시고도 멀쩡할 인간은 없으니까.”
“……처음부터 내 정체를 확신하기 위해 약을 푼 거였군.”
“그래. 너희는 계약자가 죽게 내버려 두지 못하잖아?”
큭큭대며 웃던 국왕이 비틀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충성스러운 악마를 내가 갖게 되다니!”
국왕의 광기 어린 눈이 무섭게 반짝였다.
“넌 이제 나를 위해 움직이게 될 거다, 악마여.”
“내 주인님은 이브리아야.”
“그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렇겠지.”
지나치게 당당한 국왕의 태도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국왕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포를 겪은 인간이 이토록 당당할 수는 없었다. 해리가 경계심에 찬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그 시선이 황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두 팔을 벌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향기가 좋지 않나? 아주 독특한 향이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향기?’
해리는 후각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유리 온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기묘한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했었다. 그렇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달콤한 꽃향기가 유혹하듯 해리의 후각을 사로잡았다. 점점 짙어지는 향기에 머리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으.”
“네놈이 차를 마시지 않을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향을 준비한 거야. 이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악마, 네 놈의 패배였다.”
해리는 국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짚었다. 머리부터 시작해 몸 전체가 서서히 둔해져 그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기운이 도는 모양이군.”
그렇게 몸이 둔해져 가는 와중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머리를 채우고 있던 수많은 생각이 사라지고 심장의 고동에서 시작된 본능만이 강하게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빠.’
해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이 온몸을 울리는 순간.
“내 목소리를 들어라, 악마.”
거친 심장 소리를 뚫고 국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해리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 뒤로도 환희에 찬 국왕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해리는 그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했다. 분명히 소리는 들리는데 들끓는 본능에 흐려진 머리가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
비틀거리던 해리가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을 붙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아.”
해리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릿하게 온몸을 자극하는 본능이 너무 짜릿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하려, 테오하리스.’
해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날뛰는 본능을 잠재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본능을 지나치게 오래 억눌러 두었던 부작용인지 쉽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짜릿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 본능이 너무 짜릿해서 이대로 날뛰도록 손을 놓고 싶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해리를 보며 국왕이 크게 웃음을 터드렸다.
“서로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졌구나, 건방진 악마야.”
국왕은 승리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해리 앞에 다가섰다. 해리는 날뛰는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국왕은 몸을 숙여 해리와 눈높이를 맞추고 손으로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조금 전처럼 건방지게 날뛰어 보지 그래? 응?”
뺨을 두드리는 손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창백한 해리의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렇게 다룰 수 있다니 악마도 별거 아니군. 본능에 충실한 저급한 생물 같으니라고.”
마지막으로 강하게 해리의 뺨을 내려친 국왕이 그의 머리를 헤집어 뒤통수를 잡아챘다. 날뛰는 본능이 주는 쾌락에 해리의 두 눈이 이미 흐릿했다. 국왕은 이지를 잃은 눈동자를 보며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건 악마를 홀리는 마약이지. 본능을 자극하는 향에 정신이 흐려지고, 계속 이 향을 맡고 싶고, 그러니 향을 주는 자에게 복종하게 돼.”
국왕이 틀어쥐고 있던 해리의 머리를 바짝 잡아당겨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아주 기분이 좋지? 그래서 미치겠지?”
해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계속 그 상태로 있고 싶다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다.”
국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던지듯 거칠게 해리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제대로 이해했다면 화가 들끓었을 말이지만 해리는 그 말을 이해할 정신이 없었다. 해리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잡고 있었다. 이걸 놓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약속했어. 이브리아랑, 약속을…….’
해리는 이브리아의 얼굴과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오로지 그것만이 해리의 이성을 붙잡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존재를 되새겨봐도 소용없었다. 코를 타고 흘러드는 향이 너무 강력했다.
‘안 되는데…….’
유리 온실을 채운 향이 짙어질수록 해리의 저항은 점점 얕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에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어졌다. 진짜 해리를 잠재우고 있던 벽이 무너지고 본능이 봇물 터지는 쏟아져 나왔다. 해리는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지도, 바닥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텅 비어버린 얼굴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해리를 보며 국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완전히 인형이 됐군.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국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주인님이라고 불러라, 악마여.”
텅 빈 해리의 시선이 국왕을 향했다.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명령을 듣지 못했나?”
국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당장 무릎을 꿇고…….”
하지만 국왕의 명령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멍하니 국왕을 바라보던 해리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틀어쥔 탓이었다.
“크윽!”
무방비하게 서 있던 국왕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당장, 크흑, 놔라! 이게 무슨 짓, 크억!”
국왕의 호통에도 해리는 그의 목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그의 목을 조였을 뿐이다.
“어째서, 큭! 향에, 크흑, 쾌락에!”
목을 쥐어짜인 국왕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숨이……!’
국왕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제 목을 틀어쥔 해리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을 세워 그의 손을 긁어댔다. 하지만 해리는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도 여전히 무표정하게 국왕의 목을 죌 뿐이었다. 혼자서는 악마를 제압할 수 없었다.
“크헉, 거기, 누구, 허억! 없나!”
국왕은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악마와 대면하기 위해 주변을 물린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간곡한 요청을 듣지 못했다.
[쯧.]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국왕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내버려 둔 찻잔에서 아스페리츠가 솟아난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고작 이런 향으로 첫 번째 악마를 다루려고 했다니.]
우아하게 찻잔 속에서 빠져나온 아스페리츠가 여유롭게 국왕과 해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조무래기 악마들에게는, 그래. 이런 방법이 잘 통했겠지. 하지만 얘는 그런 피라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덤볐으니 이런 꼴이 되는 거야, 인간.]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 지금 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나의 관대한 처사 덕분이야. 널 인정해서가 아니라, 네 상황을 좀 파악했으면 해서 특별히 내 언어를 이해하도록 해주었지.]
국왕의 두 눈이 다급하게 그를 쫓았다.
“크헉! 누구, 허억, 도와, 큭!”
[아? 내가 누구냐고?]
아스페리츠는 국왕의 간절한 요청을 무시하고 느긋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정령들의 왕이다. 너는 인간들의 왕이니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진 셈이구나.]
“정령, 왕?”
국왕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갑자기 정령왕이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거물이라면 폭주해버린 이 악마를 제압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날, 커헉, 도와줘! 대가를, 헉, 지불하겠다! 무엇, 큭, 이든!”
[응. 싫어.]
아스페리츠는 귀를 후비적대며 국왕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했다. 이렇게 깔끔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터라 국왕이 눈을 크게 떴다. 아스페리츠는 손으로 국왕의 머리를 토닥이며 씩 웃었다.
[사실 나도 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거든. 내 계약자를 무시하는 게 영…….]
아스페리츠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계약자를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계약, 자……?”
국왕이 흔들리는 눈으로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아스페리츠는 어느새 굳은 얼굴로 변해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게 왜 건드려서는 안 될 인간을 건드렸어, 인간의 왕.]
아스페리츠가 혀를 차며 차가운 물처럼 서늘하게 웃는 순간, 국왕의 목에서 으드득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억!”
동시에 국왕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더니 그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부릅뜬 채 생기를 잃은 국왕의 두 눈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혼란을 담고 있었다.
[죽었네.]
아스페리츠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국왕의 사망을 확인하며 길게 하품했다. 해리 역시 무감한 눈으로 늘어진 국왕의 몸을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국왕의 몸이 그대로 온실의 꽃 사이에 처박혔다. 아스페리츠는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친 뒤 해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칭찬했다.
[참 잘했어, 악마.]
그러나 칭찬의 보답으로 돌아온 건 거대한 불덩어리였다. 아스페리츠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해리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던 탓에 오른쪽 팔이 날아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뭐야! 난 왜 공격해?]
아스페리츠는 오른쪽 팔을 재생시키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제 인간의 왕은 죽었으니까 진정하고…… 으악!]
알겠다는 말 대신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이번 공격에는 아스페리츠의 아름다운 하반신이 날아가 버렸다.
[진정하라니까! 정신 차려!]
아스페리츠는 서둘러 제 꼬리를 재생시키며 해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해리는 아스페리츠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연신 불덩이를 날려댈 뿐이었다. 해리의 눈동자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본능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으으.]
이리저리 공격을 피하느라 아스페리츠의 꼴은 어느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유리 온실 곳곳에도 불이 붙어 불길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아스페리츠는 이 미친 악마를 자기 혼자 달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개를 달래려면 주인님이 오셔야지.]
이번에는 얼굴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불이 얼굴을 수증기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아스페리츠가 사방으로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은 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 있는 생명을 탐색하는 눈이었다.
‘죽여. 다 죽여버려.’
본능이 쉴새 없이 해리를 부추겼다.
‘저쪽이야. 저쪽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있어.’
날카로운 본능이 곧장 다음 표적이 있는 곳을 감지해냈다. 해리의 걸음이 그곳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루크가 내 모습을 샅샅이 살피며 물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내 몸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성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보다시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몸이 멀쩡했다.
나는 이곳이 적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미 전야제 파티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일에도 신중을 기했다. 무엇이든 먹고 마실 것이 생기면 아스페리츠를 불러내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국왕은 음식에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신전의 대답이 올 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볼 심산인가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루크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이 꽤 오래전인 듯했다. 아마 신전의 신탁으로 후계자 선택이 흐지부지되어 버린 그날부터 수작질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지금 나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설마 표적이 내가 아니라 해리인가?’
나는 국왕의 협박이 내가 아닌 해리를 향했던 것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국왕은 내가 가진 패를 정확히 모른다. 해리만 제압하면 나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치기 전에 해리를 먼저 노릴지도.’
흑마법사와 접촉했다는 점도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해리가 걱정돼. 국왕이 흑마법사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어.’
내가 그렇게 마음먹고 발을 떼려는 순간, 루크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연기?”
의아한 그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는 건 어디선가 불이 났다는 소리였다.
‘설마…….’
[해리!]
나는 불길함에 재빨리 해리를 불렀다. 하지만 내 대답에 응답한 건 해리가 아닌 아스페리츠였다.
[계약자!]
부른 적도 없는 아스페리츠가 풀잎에 맺힌 이슬에서 솟아 나와 내 앞에 나타났다.
“이건 또 뭐…….”
갑자기 튀어나온 아스페리츠의 모습에 루크가 놀라서 뒷걸음질쳤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 앞에 선 아스페리츠의 얼굴이 상당히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벌써 무슨 일이 터진 게 틀림없어.’
내 예상은 적중했다.
[큰일 났어! 악마 놈이 폭주했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날뛰는 중이야!]
아스페리츠가 다급하게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스페리츠를 재촉했다.
“어디야? 해리, 지금 어디 있어?”
[이쪽…… 아니, 그냥 내 위에 올라타!]
방향을 설명하려던 아스페리츠가 제 몸 위에 나를 태우고 목표 지점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꽉 잡아, 계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