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3/156)

* * *

해리는 이브리아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로이를 질질 끌고 겨우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이 못내 불만스러운지 로이는 침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입을 비죽였다.

“여기 싫어. 이브 옆에 있을래.”

“덩치에 안 어울리는 짓 좀 하지 마. 이러다 침대 부서지겠다.”

“침대를 지키고 싶으면 날 이브에게 보내줘.”

“그건 안 돼. 이브를 좋아한다면 그 애의 생활을 존중해줘야지, 꼬마야.”

“난 그런 거 몰라. 이브 옆에 있을래!”

“……어휴. 이 멍청한 꼬마를 어쩌면 좋지.”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난 원래 이렇게 칭얼대는 쪽이지 달래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

언제나 이브리아에게 이렇게 할래, 저렇게 할래 칭얼거리기만 하던 해리였다. 이렇게 반대의 상황이 되어서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녀석을 달래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 녀석은 자신보다 더 막무가내-물론 해리의 생각이다-라 달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너 계속 그러면 다시 저택으로 돌려보낼 거야.”

해리는 로이를 어르고 달래는 대신 협박을 선택했다. 자신의 경험상 이쪽이 더 효과적이었다.

“……흥. 날 어떻게 돌려보내는데? 난 드래곤이라 엄청나게 세거든.”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말로는 걱정 없다고 하지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해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너 강하지. 그런데 아직 꼬마라 힘 다루는 게 미숙하잖아. 내게 당해낼 수는 없을걸?”

“……치사해.”

로이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침대에 늘어졌다. 다행히 침대를 지켜낸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로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참는 법을 배워. 자연에서 살아갈 거라면 멋대로 해도 되지만, 인간과 섞여 살아가려면 그게 필요해. 넌 계속 이브의 옆에 있고 싶은 거잖아. 그렇다면 어른스러워져야지.”

해리의 말을 듣던 로이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의외야.”

“뭐가?”

“해리는 아빠지만 어리광쟁이잖아.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어?”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첫 번째 계약자를 만났을 때는 그런 걸 몰랐다. 악마들의 세상에서 하던 것처럼 마음대로 날뛰었고, 계약자는 두려움에 휩싸여 명령으로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두 번째 계약은 달랐다.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내숭을 부린 게 유효했다. 이브리아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으로 그를 강제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해리는 첫 번째 계약보다 자유롭게 인간 세계를 활보할 수 있었다. 계약자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해리는 지금의 생활이 썩 마음에 들었다.

‘살육의 본능을 이렇게까지 오래 억눌러둔 건 처음이지만…….’

해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계에 있을 때는 늘 피로 물들어 있던 손이 지나치게 깨끗해서, 이렇게 제 손을 볼 때마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젠 오히려 피 묻은 손이 낯설 정도라고.’

다른 쪽의 쾌락으로 몸과 마음이 충만해서 이제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악마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해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동안 로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해리의 주변을 맴돌며 진지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킁킁대며 냄새까지 맡았다.

“뭐 하는 거야?”

로이의 이상한 행동에 생각에 잠겨 있던 해리가 현실로 돌아왔다. 황당한 해리의 시선에도 로이는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네. 왜 해리한테 이브 냄새가 나지?”

“냄새? 늘 같이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아냐. 그거랑은 달라. 좀 더 깊은 곳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로이가 곧 답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번식 행위!”

“……뭐?”

“이브랑 번식 행위를 한 거야? 그런 거야? 이제 나 동생 생겨?”

로이의 말에 해리의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그,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이카난이 알려줬는데. 이브랑 해리 없을 때 이카난이 나랑 많이 놀아줬어.”

인간보다는 엘프가 드래곤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었다. 이브리아와 해리가 저택을 비운 동안 그가 로이를 맡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해리는 태연하게 번식 행위라는 말을 입에 올리던 몹쓸 제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엘프 놈!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이카난은 마법을 배우는 것만 빠른 게 아니라 남들에게 이상한 말을 가르치는 데도 선수였다.

“동생은 언제 태어나? 오늘? 내일?”

로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해리는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흘렸다.

“야. 같이 밤을 보낸 게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애가 나오겠냐? 게다가 아직 겨우 한 번밖에…….”

“그렇구나. 이브랑 해리는 얼마 전에 딱 한 번 잤구나.”

로이가 어느새 순진한 말투를 던져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동생이 태어나는 건 아무리 빨라도 내년 여름이겠군.”

로이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차분하게 날짜를 세었다. 그 모습이 아주 태연했다.

“이…….”

180도 달라진 모습에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자, 로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그에게 당부했다.

“아, 그리고 그 전에 몇 번 더 잘 거지?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확실히 동생이 생겨!”

그 말에 해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너, 전부 알면서 순진한 척을 하고!”

로이에게 어른스러워지라고 조언하던 의젓한 해리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씩씩대며 로이를 노려보았다.

“너! 이브 앞에서도 일부러 순진한 척하면서 덥석 안긴 거지? 전부 다 알면서!”

“무슨 소리야, 아빠. 난 아무것도 몰라.”

로이가 다시 순진하게 눈을 반짝이며 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순진한 청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법한 모습이었다.

“필요할 때만 순진한 척하다니. 역시 드래곤은 요물이야.”

해리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왕성에서 해리를 찾아올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유일한 사람인 이브리아는 조금 전 카시안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떠났다.

‘누구지?’

해리가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시종이 서 있었다. 그는 해리를 발견하자마자 깊게 고개를 숙이며 반갑지 않은 말을 전했다.

“위대하신 대마법사님. 국왕께서 마법사님과의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국왕이?”

해리가 차갑게 되물었다. 로이 앞에서 얼굴이 벌게져 씩씩대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종은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예. 온실에서 좋은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으시다 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리와 국왕은 나란히 앉아 정답게 차를 마실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있음은 확실했다. 전야제 파티에서 국왕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해리는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 국왕 역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 분명했다.

‘이브리아의 곁에서 떨어지는 건 불안하지만…….’

지금은 로이가 있었다. 드래곤인 그가 곁에 있다면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힘을 다루는 건 미숙해도 성체가 된 드래곤 아닌가. 왕성에서 그를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왕립기사단장인 엘 로이츠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 역시 이브리아의 편이니까.’

안심하고 국왕과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좋아. 가지.”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온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제가 온실까지 안내하겠습니다.”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로이를 바라보았다.

“로이.”

별다른 말 없이 이름만 불렀을 뿐이지만 로이는 해리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다.

“걱정하지 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를 보며 해리가 몸을 돌렸다.

* * *

유리로 만들어진 온실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내부는 마법으로 늘 적정 온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서늘한 바깥 공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평화로운 공간 속에 국왕과 해리가 마주 앉아 있었다. 평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청요석이네.’

해리는 유리 온실을 둘러보다 에렐의 청요석을 발견하고 슬쩍 미소지었다. 이걸 만들고 판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브리아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열심히 하는 이브리아는 예쁘지.’

그런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느라 실실 웃고 있는 해리에게 국왕이 차를 권했다.

“여기서 직접 기른 허브로 우린 차라네.”

해리의 시선이 국왕에게 닿았다. 청요석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이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번에 오베론 공녀를 초대했을 때에도 대접했던 차야. 공녀는 맛이 깔끔하다고 좋아하더군.”

해리는 제 앞에 내밀어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주홍빛으로 예쁘게 우러난 차가 좋은 향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럴 때는 차가 필요하지 않겠나.”

“우습군.”

해리는 다시 한번 제게 차를 권하는 국왕을 비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찻잔이 향한 곳은 그의 입술이 아니었다. 해리는 그대로 찻잔을 뒤집었다. 찻잔에 담겨 있던 주홍빛 물이 그대로 쏟아져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을 적셨다. 하얀 테이블보가 푹 젖어 끝에서 주홍빛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내가 왜 네가 주는 차를 마시겠어?”

해리가 씩 웃으며 빈 잔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전야제 때 이브리아의 샴페인에도 이상한 수작을 부린 놈이 준 차를, 내가 뭘 믿고?”

저 멀리서 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여유로운 척 웃고 있던 국왕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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