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신관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신전의 모든 신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대적인 토론의 장을 열었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왕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에렐을 비울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막히지 않아 나는 인세티아 남작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다. 왕성 사람들이 편지의 내용을 검열하겠지만, 어차피 숨길 만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당히 우편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우편은 대부분 마법화되어 있었다. 각 영지의 주요 거점에 우편소가 있어 마법으로 전달되고, 거기서부터는 인편으로 배달되는 식이었다. 덕분에 넓은 땅덩이에 비해 빠른 속도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인세티아 남작의 편지가 도착했다. 매년 에렐을 괴롭히던 우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다행히 편지에 담긴 내용은 긍정적이었다. 두 노예 왕자가 힘써서 만든 보와 제방 덕분에 이번 우기에는 피해가 전혀 없다고 했다.
수도에 소문이 쫙 퍼진 에렐 포션 역시 성황리에 판매 중이었다. 남작은 주문이 너무 많이 밀려들어 포션 업무를 담당할 사람을 뽑아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물론 기분 좋은 투덜거림이었다.
하지만 워낙 포션의 인기가 좋다 보니 웨어울프들의 피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 청요석을 만드는 수액이 부족하면 채취량을 늘릴 수 있지만, 웨어울프들의 피는 특성상 그렇게 공급량을 늘릴 수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어. 한정 수량으로만 판매해야지.’
때로는 한정판이 더욱 매력적인 법이다.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지금보다 더욱 인기가 높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남작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대로 편지 작성에 집중하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활짝 열리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덕분에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던 편지지가 사방으로 흩날려 순식간에 내부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종이로 엉망진창이 된 방을 허탈하게 바라보다 이 난장판의 원인이 된 창문을 노려보았다. 명색이 왕성이면서 어떻게 창문을 고장 난 채로 둘 수가 있나.
하지만 이를 바드득 갈며 바라본 창문에 의외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태연하게 창문을 넘어 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남자였다.
‘……누구지?’
나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1층이 아니다. 이렇게 쉽게 창문을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국왕이 암살자라도 보낸 건가?’
그렇다기엔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낸 점이 너무 이상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암살자가 오는 것도 이상하고.’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갑자기 창문을 넘어 온 검은 남자의 정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청난 실력자라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건가? 어차피 죽이고 나면 얼굴을 봤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남자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해리.]
어쩐지 위협적인 느낌에 내가 다급하게 해리를 부르는 순간, 어느새 코앞에 다다른 남자가 내게 팔을 뻗었다.
“악!”
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칼에라도 찔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몸에는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는 안정감 있게 나를 꼭 끌어안으며 제 얼굴을 내 뺨에 부벼댔다.
‘……으응?’
아무리 봐도 나를 해치려고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브리아! 무슨 일이야!”
황당한 상황에 내가 굳은 채로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해리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박살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과 문. 두 가지를 모두 잃은 방 안에 태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바람이 요란하게 들이닥쳤다.
“너 이 자식, 도대체 누구야!”
해리가 나를 꼭 껴안고 있는 검은 남자를 보며 씩씩댔다. 한걸음에 달려온 해리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당황한 해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해리의 힘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설마…….’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내게 찰싹 들러붙은 검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두 눈이 물기로 촉촉했다.
“너 설마 로이야?”
내 질문에 나를 껴안은 남자가 더욱 깊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실 남자의 덩치가 훨씬 커서 내 품에 파고들었다기보다는 나를 더욱 깊게 껴안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뭐? 로이? 그때 그 코흘리개가 이렇게 컸다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해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은 남자, 로이를 훑어보았다. 저택에 두고 올 때만 해도 겨우 허리춤에 닿던 로이가 이제는 우리보다 훨씬 컸다.
“금방 온다고 했어. 한밤만 자고 온댔는데…….”
로이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거리며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왕성에 갈 때도 겨우 달래서 떼어 놓았는데 한참이나 저택에 돌아가지 못했으니 안달이 나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미안해, 로이. 혼자 외로웠어? 못 보는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응. 나 이제 어른이야.”
“어른은 이렇게 안 우는데.”
“그럼 안 울게.”
로이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겉은 어른인데 속은 아직도 애잖아.’
나는 웃으며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응. 걸어서 왔어.”
“걸어서? 누가 막지 않았어?”
왕성의 경비는 삼엄했다. 창문을 넘어온 걸 보면 제대로 절차를 거쳐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응.”
나의 의문에 로이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길을 막길래 한 대 툭 쳤더니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갔어. 몇 명을 그렇게 날려 버렸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날 막지 않았어.”
‘사고를 제대로 치고 왔구나.’
하지만 뿌듯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로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선택했다.
“잘했어! 왕궁 놈들은 한 번 그렇게 날아가 봐야 정신을 차리지!”
해리 역시 로이를 칭찬하며 은근슬쩍 그를 내게서 떼어냈다.
“하지만 이건 안 돼.”
이번에는 좀 더 강한 힘을 쓴 건지 로이가 쉽게 떨어져 나갔다. 훌쩍거리던 로이가 해리의 손에 끌려가며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코흘리개 시절이었다면 몰라도, 이젠 어른이 됐으니 이브리아한테 덥석덥석 안기는 건 그만둬야지?”
해리는 두 손으로 로이의 양 뺨을 잡아 늘리며 그에게 경고했다.
“으에어?”
로이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했다. 입이 양옆으로 벌어진 탓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어째서?’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걸 해도 되는 어른 남자는 나 하나뿐이니까!”
해리가 당당하게 외치며 로이를 놓아주었다.
“그런 거라면 괜히 어른이 됐어. 그냥 어른 안 되고 이브 안고 싶은데.”
로이가 그새 빨갛게 달아오른 양 뺨을 쓰다듬으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해리는 그런 로이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이마를 두드렸다.
“늦었어, 꼬마.”
“나 꼬마 아냐.”
“나이로 따지면 꼬마 맞거든?”
나는 투닥거리는 악마와 드래곤을 보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분명 해리도 철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철없는 로이 앞에 있으니 그가 상당히 어른스럽게 보였다.
“여기다!”
내가 묘한 기분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박살 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문짝을 밟으며 한 무리의 기사들이 뛰어들었다.
“침입자를 잡아라!”
로이의 손에 몇 명이 날아간 뒤 한두 명만으로는 제압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지 엄청난 수의 기사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다.
‘이게 무슨 뒷북이람.’
“날 보호한다고 왕성에 묶어 두더니,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보호해줄 수 있겠어요?”
내 지적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로이가 정말 암살자였다면 나는 벌써 칼에 맞아 드러누워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얜 침입자 아니에요. 내 동료니까 그냥 돌아가도 좋아요.”
“저 괴물이 레이디의 동료라고요?”
내 말에 기사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로이를 쳐다보았다. 기사들의 시선을 받은 그 괴물은 해리와 열심히 투닥대며 내가 더 이브리아와 가깝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브는 내 거야!”
“웃기시네. 왜 이브리아가 네 거야? 이브리아는 이브리아 거지!”
“그 말이 아니잖아, 이 바보!”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인댔는데. 네가 바보구나 이 꼬마야!”
둘은 몰려온 기사들에게는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유치한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기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기사들이 멍한 얼굴로 그 싸움을 지켜보았다.
‘창피하다! 부끄럽다!’
나는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기사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저 애는 위험하지 않으니까 다들 돌아가세요. 돌아가는 길에 부서진 문짝 고쳐 줄 사람이나 불러주시고요.”
“……제가 좋지 않은 때에 찾아온 것 같군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카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를 뵙습니다!”
기사들이 우르르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카시안은 손을 들어 그들의 인사를 물렸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이야기요…….”
나는 난처하게 웃었다. 문짝은 박살 났고, 기사들은 멍청한 얼굴로 서 있고, 해리와 로이는 여전히 투닥거리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난장판.’
“음, 그 이야기라는 게 문짝이 없는 곳에서도 나눌만한 이야기인가요?”
“……제 방으로 모시죠.”
모두의 앞에서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왕위 계승에 관한 문제겠지.’
그런 이야기라면 문짝이 없는 공간에서 나눌 수 없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어떻게든 이 난장판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나는 카시안의 옆으로 다가가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안내해주시죠, 왕세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