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기분 좋은 날씨와 함께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을 테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죽을 것 같아.’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파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저질 체력인 내 몸이 버텨내기에 지난밤은 너무 격렬했다.
‘그래도 거기서 끝난 게 어디야.’
나는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해리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해리의 페이스에 맞춰 일을 치렀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까지도 잠들지 못했을 거다.
‘그랬다면 난 사망이라고, 사망.’
나는 내 옆에서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해리를 슬쩍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이놈은 악마였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계속 나를 구슬리고 달래더니, 결국에는 전부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해리를 보며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는 내게 유피테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유피테르.]
어젯밤 정신없는 와중에 무어라 떠들어대는 유피테르를 해리가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유피테르가 창문 아래쪽 벽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위치를 보아하니 해리가 유피테르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려다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된 타이밍에 눈을 떴군요.]
[제대로 된 타이밍이요?]
내 질문에 유피테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중간에 몇 번이나 눈을 떴는데, 그때마다 아직도 계속 그걸 하고 계셔서…… 악마의 체력을 제가 너무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악마가 왜 악마라고 불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너무 힘드시다면 제가 치료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치료요?]
[예. 제게는 주인님의 외상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잖습니까. 근육통도 치료해드릴 수가…….]
뿌듯하게 설명을 이어가던 유피테르가 곧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시무룩하게 물었다.
[설마 잊고 계셨습니까?]
[……미안해요.]
유피테르에겐 쓸모없는 기능만 많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런 유용한 기능이 있다는 걸 어느새 깜빡하고 있었다.
‘그럼 기사단원들에게 검술 시범을 보였던 날에도 유피테르의 능력을 썼으면 간단하게 회복됐을 거라는 말이잖아?’
나는 유피테르를 우습게 보았던 과거를 반성하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슈미즈를 대충 꿰입었다.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끙끙대며 유피테르를 손에 쥐자, 그가 제 능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번쩍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쯤에는 무거웠던 몸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와. 유피테르 진짜 성검은 성검이었네요.]
[……이제라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감탄하고 있으니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오늘 건국제 연설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엠마가 평소와 달리 안으로 들오지 않고 밖에서 일정을 알려주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라 어젯밤 나와 해리가 무슨 일을 치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해가 떠오른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드디어 오늘이 후계자를 결정하는 날이구나.’
오늘만 지나면 국왕과의 어쭙잖은 기싸움도 드디어 끝이었다.
* * *
나는 연설을 하는 왕자들과 함께 국왕의 뒤에 서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의 길고 긴 연설이 끝난 뒤, 비로소 후계자를 선택하는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나와 왕자들의 뒤에는 왕립기사단과 해리, 왕비와 캐서린도 있었다.
나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은 국왕의 연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광장은 왕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연설 뒤에는 후계자 선택이라는 재미있는 이벤트까지 있어 예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정신을 놓은 채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갑자기 그들에게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아마 국왕의 연설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제 나의 후계자를 선택할 시간이다. 성검의 주인이 건국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한으로 다음 대의 왕을 선택할 것이다.”
국왕의 말에 아래에 선 사람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와아!”
나는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시종의 안내의 따라 왕자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성검의 주인이 선택한 왕은 성군이 되어 제레인트를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 존재.”
국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성검의 주인이여. 그대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가.”
“물론입니다.”
나는 유피테르를 손에 든 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성검의 모습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기분이 좋아진 유피테르가 제멋대로 번쩍 빛을 쏟아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오오!’하고 감탄하며 박수를 쏟아냈다. 그 소리에 빛이 더욱 강해졌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픽 웃으며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에게도 얼굴이 있다면, 지금 아주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그냥 둘까.’
제가 가진 능력 중 가장 멋진 것이 후광을 뿜어내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유피테르 아닌가. 이런 기회에 원 없이 재주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이런 기회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에렐 같은 시골에서는 이런 능력을 뽐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나는 유피테르의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긴장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선택한 다음 왕은…….”
내 입에서 후계자의 이름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모두 비키시오!”
광장의 끄트머리에서 누군가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뭐야!”
“누군데 그래?”
뒤쪽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광장은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소란을 일으킨 것은 하얀 옷을 차려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옷을 차려입고 당당하게 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의 옷차림이 조금 다른 것을 보니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사람들은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순순히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깊게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전?”
중요한 순간에 판을 깨버린 자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카시안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까워진 그들의 모습을 보고 무리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탑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신관들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외쳤다.
“우리는 태양신의 성전에서 온 신관들입니다.”
“옷차림으로 알아보았소.”
국왕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국가의 권력에서 벗어난 존재. 아무리 국왕이라도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나는 불길한 심정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혹시 국왕이 제보한 건가? 해리가 악마라고?’
어젯밤의 난리통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주한 국왕의 얼굴에도 감출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국왕 역시 나처럼 신관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국왕이 꾸민 일은 아니로구나.’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해리 역시 찡그린 얼굴로 신관들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어수선한 와중에 국왕이 앞으로 나섰다.
“태양신을 모시는 사제들께서 이 자리에 어쩐 일이시오.”
“우리는 신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신의 말씀이라면…….”
“태양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신탁이라는 말에 온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이고 국왕과 리던, 카시안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정말 태양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단 말이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국왕의 말에 신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신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신탁이 끊긴 것이 오래전이니 하는 말입니다.”
국왕의 지적에 신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신의 말씀이 오랫동안 끊어졌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며칠 전 대신관께서 직접 신의 전언을 받으셨습니다.”
“신께서 빛의 형태로 나타나 대신관께 말씀을 전하셨지요.”
“우리는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신관들의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신관이 머리 위로 두루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곳에 태양신께서 전하신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모두 예를 갖춰 신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신관의 외침에 광장에 선 사람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신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저희에게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며 국왕과 왕자도 무릎을 꿇었다.
“……신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그들 역시 왕족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신을 따르는 신도였던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사람들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신관을 주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신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신관이 서서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은 신관의 입을 향해 있었다.
“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나의 대리인을 너희에게 보냈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 신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혼란을 바로 잡을 자. 평화를 가져올 자. 번영을 이룰 자. 모두 내 축복을 받은 자를 따르고 경외하여라.”
신관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사람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왕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날이었다. 하필 이런 날 신이 내린 신탁이 전해졌으니, 엄청난 성군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레인트에 또다시 엄청난 왕이 나타날 거야! 광장을 채운 사람들의 눈빛이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오로지 나만이 불안함에 덜덜 떨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신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해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건…….’
꽃길이다. 미친 태양신이 깔아준 거지 같은 꽃길의 예감이다.
‘그리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지.’
내가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와중에 우두머리 신관의 시선이 분명하게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이 마주친 신관을 향해 눈빛으로 간절한 메시지를 전했다.
‘말하지 마! 그게 무슨 말이든 그냥 하지 말라고!’
하지만 신관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태양신께서는 그 신탁의 주인이 오늘 이 자리, 탑 위에 서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국왕이 불안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질문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특히 제가 후계자로 점찍은 카시안이 저 신탁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런 면에서 나와 국왕의 생각은 비슷했다. 신관이 가져온 저 신탁의 주인공은 리던이나 카시안이어야 한다.
‘나만 아니면 누구든 좋아.’
국왕과 나는 각자 다른 의미로 긴장한 채 신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다소 싱거웠다.
“그건 저희 역시 알지 못합니다.”
“뭐라고?”
허무한 대답에 국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관들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 역시 실망으로 웅성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 반쪽짜리 신탁은.”
“결국 누가 태양신께서 점지하신 왕이라는 거야?”
맥빠진 사람들의 투덜거림이 점점 높아지자 신관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대신 태양신께서 신탁의 주인을 가릴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신관이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작은 상자 속에는 붉은빛을 품고 있는 보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신관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단번에 그 보석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태양신의 심장 조각이잖아.’
보석 속에서 일렁이는 붉은 빛이 아주 익숙했다.
“이건 태양신께서 이 땅에 남겨 두신 심장의 조각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신관이 보석의 정체를 모두에게 공개했다.
“태양신의 심장에 대한 전설은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심장은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져 땅의 각지에 흩어졌는데, 그중 하나를 저희 신전에서 보관 중이었습니다.”
잠시 붉은 보석을 바라보던 신관이 그것을 두 손에 받쳐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 심장 조각이 신탁의 주인을 가려줄 것입니다!”
우두머리 신관이 비장하게 외치자, 그 뒤에 서 있던 신관들이 작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 같은 목소리였다. 엘프들이 거대한 세계수 앞에서 기도할 때와 비슷한 신성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에 홀려 넋을 놓고 있었다. 공간을 울리는 신성한 소리에 맞춰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신성함에 빠져들 정신이 없었다. 대신 나는 우두머리 신관의 손에 들린 보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석 속에서 일렁이던 붉은 빛이 그들의 목소리에 맞춰 요동치기 시작한 탓이었다. 보석 속에서 요동치던 붉은 빛은 곧 더 넓은 세상으로 튀어나왔다.
‘너무 격렬한 거 아니야?’
신관들의 기도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붉은 빛은 지난 세 번의 심장 조각을 모을 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격렬하게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빛의 목적지는 같았다. 공간을 크게 돌아 군중의 머리 위를 스쳐 간 붉은빛이 내 손의 반지로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반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붉은빛을 모두 먹어치운 반지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어떻게 신탁의 주인을 증명한다는 거야?’
붉은빛은 내 눈에만 보인다. 지난 세 번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래서야 빛을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신탁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길이 없지 않나.
‘차라리 잘된 건가? 그냥 모르는 척하고 서 있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약삭빠른 국왕이 신탁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할 것이다.
‘자기가 신탁의 주인이라고 우긴 뒤에 뭐든 맘대로 할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국왕의 행보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누가 후손 아니랄까 봐, 그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일삼았던 제레인트의 시조와 똑 닮았다. 주인 잃은 신탁이 있다면 신이 나서 이용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신탁의 주인이라고 하면 일이 복잡해지는 거 아냐?’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신탁의 주인이 왕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그건 싫단 말이야!’
나의 꿈은 소박했다. 돈 많은 백수 영애로 호의호식하며 조용하게 사는 것. 이 간단한 꿈을 이루기가 이토록 힘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붉은빛을 품은 자여!”
나의 고민과 함께 신관들의 기도 역시 절정을 향했다.
그 순간, 얌전하게 잠들어 있던 반지가 신관들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4개의 심장 조각에서 나온 기운을 흡수했던 반지는 지금까지 모아 온 빛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신관의 외침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썩 놀라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 붉은 빛도 내 눈에만 보일 거 아냐.’
하지만 이번에는 주위가 술렁거렸다.
“빛이다!”
“탑 위에서 붉은 빛이!”
“누가 뿜어낸 빛이야?”
사람들의 반응에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탑 위에 선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보여요?”
나는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리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리던이 정확히 빛이 뿜어져 나오는 반지를 바라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어.’
머리 아프게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놈의 태양신은 빼도 박도 못하게 나를 꽃길에 집어넣을 작정이었다.
“흐윽!”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경악하는 그때, 뒤쪽에 물러나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부여잡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캐서린이 있었다. 땀에 젖은 캐서린의 모습이 무척이나 처연해 보였다.
“린!”
카시안이 놀라서 캐서린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의 부축을 받은 캐서린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그만…… 심장이 너무…….”
가슴을 부여잡은 캐서린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도문을 외고 있는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잖아?”
캐서린의 옆에 서 있던 왕비가 놀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말처럼 숨을 몰아쉬는 캐서린의 가슴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반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붉은 빛과 색이며 기운이 완전히 똑같았다.
‘어? 왜 캐서린이 저 빛을 가지고 있지?’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멍한 얼굴로 나와 캐서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더 깊게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떨던 캐서린이 결국 혼절해버린 탓이었다.
“린!”
카시안이 다시 한번 캐서린의 이름을 부르며 축 늘어진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기절한 캐서린의 가슴에서 여전히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탑 아래의 신관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