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9/156)

* * *

나는 그대로 해리의 손을 붙잡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엠마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온 나를 보며 상당히 놀란 눈치였지만, 내 손에 질질 끌려오고 있는 해리를 보고서는 말없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나는 해리를 침대에 앉히고 그 앞에 서서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분위기가 영 이상한데.’

평소라면 열심히 떠들어댔을 해리가 돌아오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말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안색도 영 좋지 않았다. 해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던 나는 결국 답답해져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국왕한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래요?”

“어?”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해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아무 말도 안 들었어.”

“거짓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본인이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걸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왜 계속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 말도 안 들었는데 반응이 이렇다고요?”

“그냥 역겨운 인간 냄새에 시달려서 그래. 피곤해서.”

“아닌 것 같은데….”

해리가 집요하게 따라붙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좀 쉬어야겠어. 그럼 괜찮아질 거야.”

나는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 찬 해리의 손목을 붙잡아 그의 도주를 저지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무슨 말 들었는지 말해주기 전까진 못 가요.”

“말하기 싫어.”

해리가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건 흔치 않았다.

“나 해리한테 명령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냥 말해주면 안 돼요?”

나는 해리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해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빴다.”

해리가 바짝 다가와 내 어깨에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어.”

“……심각한 일이에요?”

해리가 평소처럼 나를 껴안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인 것이 불안해서, 내가 먼저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래도 해리는 나를 마주 안아 주지 않았다.

“국왕이…….”

해리가 여전히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뭘요?”

“내가 악마라는 거.”

“……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깜짝 놀란 내 목소리에 해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와 어깨를 간질였다.

“내 첫 계약자인 그 머저리 놈, 그러니까 그 건국왕이라는 놈이 기록을 남겼대.”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니 그 뒤로는 쉬웠다. 해리의 입에서 국왕과 단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제레인트의 왕들은 즉위식이 끝나고 건국왕이 후손들에게 남긴 일기를 볼 수 있다고 하더군.”

건국왕의 일기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설마 거기에…….”

“응. 자기가 악마를 불러 도움을 받았다는 고백이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대. 그 악마가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라는 사실도, 그 악마를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도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악마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운 것은 자신의 신성함과 정당성을 모두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때문에 건국왕이 이를 절대로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악마를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거로군.’

제레인트의 시조는 자신의 신성함과 정당성을 지키는 것보다 후손들에게 악마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두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은 위험하니 왕이 되는 자들에게만 그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 왕이 내가 악마라는 걸 폭로하고, 내가 주인으로 모시는 널 마녀로 몰아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해리를 협박했어요?”

해리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은 협박일 뿐이야. 해리가 악마라는 게 밝혀지면 제레인트 왕실의 약점도 동시에 드러나게 되니까, 쉽게 폭로할 수는 없을 테지.’

하지만 국왕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게 문제였다.

“……해리를 대마법사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는 게 아니었어요.”

건국왕이 남겼다는 일기에서 해리를 어떻게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해리를 그냥 평범한 기사인 척 내버려 뒀다면 국왕이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국왕이 어떠한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 실수예요.”

자책하는 내 말에 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네 잘못 아냐!”

침울한 내 얼굴을 발견한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냥 내가 악마라서, 그래서 그런 거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다 내가 감당할 문제야.”

“무슨 말이에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 악마를 불러낸 건 나라고요. 그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연히 내 책임이고요.”

원래 그런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건 주인님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혼자 책임지겠다고 질질 짜면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어?”

해리가 놀란 듯 눈을 껌뻑였다. 그 눈이 마치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해리 생각이야 뻔하죠. 내가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그거 절대 허락 못 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이고 자시고 안 된다고요. 내 옆에 있어요. 이건 명령이에요. 이걸 어기면 계약위반으로 벌 받는 거 알죠?”

다음 생은 리피와 레피처럼 힘없는 하급 악마가 되어서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강한 힘과 파괴만이 의미를 갖는 악마들에게는 최고의 벌이었다. 내 명령에 해리의 얼굴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해리를 꼭 껴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국왕도 함부로 폭로하진 못해요. 왕실의 정당성도 함께 엮여 있는걸.”

“알아.”

“그걸 알면서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했어요?”

“국왕은 이미 내가 악마라는 걸 알고 있잖아. 내가 네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식이 널 어떻게 모욕했는지…”

화가 나서 소리치던 해리가 곧 실수했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국왕이 날 욕했어요?”

“……방금 그 말은 잊어.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해리는 그 말을 듣고 화냈잖아요. 그래서 국왕 멱살도 잡고.”

내 말에 해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내 얼굴을 살피고 있으니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해리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일부러 밝게 웃었다.

“왜요? 내가 악마한테 몸을 팔아서 힘을 얻었대요?”

“그……!”

직설적인 말에 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할 말을 잃고 ‘그, 이, 저!’하며 허둥대는 해리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또 어떻게 알았냐고요?”

내 질문에 해리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설마 이번에도 내가 소리 내서 생각을 말했어?”

“아뇨.”

귀여운 생각에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권력을 가진 사내들이 악마를 불러낸 여자한테 할 말이야 뻔하잖아요. 여자한테는 바칠 수 있는 게 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이시라.”

“그러니까, 난 그게 싫다고.”

어느새 해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그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넌 아무것도 안 했잖아. 왜 내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그딴 더러운 취급을 받는데. 넌 왜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나는 울먹이는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다지 안 억울한데.”

“뭐?”

“그렇잖아요. 해리랑 이것저것 해서 즐거움을 얻고 있는 건 맞기도 하니까……?”

내 말에 해리가 입을 떡 벌렸다.

“아. 몸을 바치는 건 내가 아니라 해리인가? 그럼 좀 억울하네요. 다들 내가 바친다고만 생각할 거 아냐.”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앞으로 다른 사람이 물어보거든 몸을 바치는 건 내가 아니라 해리라고 꼭 말해줘요. 알았죠?”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해리가 얼빠진 얼굴로 한참 나를 바라보다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와 함께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불안과 두려움이 함께 쓸려나갔다.

“이제 기분 풀렸어요?”

“응.”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처럼 나를 꼭 껴안았다.

“이 세상에 악마를 위로하는 인간은 너 하나뿐일 거야.”

“괜찮아요. 인간한테 몸을 바치는 악마도 해리 하나뿐일 테니까.”

“야!”

해리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펄쩍 뛰었다.

“너, 너, 너, 너는 어? 그런 말을 막, 어? 함부로 하고 말이야!”

“왜요? 나한테 몸 바치기 싫어요? 지금 나한테 몸 좀 바치라고 하려고 했는데.”

“누가 싫대? 그냥 그런 말 좀 막 하지 말라…….”

질색하며 손을 내젓던 해리가 곧 무엇인가를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눈을 좌우로 굴리며 고민하던 해리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브리아.”

“네.”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아. 네가 나한테 지금 몸을 바치라는 한 소리를 들었어.”

“다행이네요. 해리의 귀는 정상이에요. 축하해요.”

내 말에 해리가 느리게 눈을 껌뻑였다.

“내 귀가 정상…….”

잠시 굳어 있던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누가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몸을 바치라고? 지금?”

“네. 마담 루이제 식으로.”

“가, 가, 가, 갑자기?”

해리가 두 팔로 제 몸을 가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별로 갑자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지금까지 안 그런 게 이상했지.”

나는 해리가 뒤로 걸을 때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가 그를 따라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의 등이 벽에 닿았다. 나는 두 손을 뻗어 해리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이, 이브리아…… 그게…….”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해리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꼭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 같네.’

나는 씩 웃으며 해리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얌전히 옷 벗어요. 도망치기 전에 오늘 내 거라고 제대로 도장을 찍어둬야겠으니까.”

“……네? 벗어요? 옷을요?”

눈을 동그랗게 뜬 해리의 입에서 갑자기 평소에 쓰지도 않던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악마를 당황스럽게 하면 존댓말을 들을 수 있구나.’

나는 새로운 정보-그러나 그다지 쓸모는 없어 보이는-를 머릿속에 새긴 뒤 해리의 셔츠를 붙잡았다.

내 손이 닿자마자 해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있어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알아서 안 벗으면 내가 벗기죠, 뭐.”

나는 해리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벌어진 셔츠 틈 사이로 제 가슴팍이 조금씩 드러나자 해리가 당황한 얼굴로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아, 아, 아, 안 벗긴다는 선택지는 없어?”

“안 벗고 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긴 해요. 꼭 벗어야만 몸을 맞출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해리가 새빨개진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핑계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너!”

한참이나 할 말을 찾던 해리가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왜 안 벗어. 벗을 거면 너부터 벗어.”

“나부터요?”

“그래. 주인님이 모범을 보이셔야 나도 따라하지.”

“알았어요.”

“거봐. 너도 벗으라니까 못…… 어? 알았다고?”

“네.”

가볍게 흘러나온 대답에 의기양양하던 해리의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뒤돌아서 그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런데 내 드레스는 혼자 못 벗어요. 끈이 뒤에 있어서요. 해리가 도와줘야 되는데, 그동안 공부 많이 했어요?”

해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등 뒤가 조용했다.

“해리?”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멍한 얼굴로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드레스 벗기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음. 어려울 것 같으면 그냥 찢어버려요.”

가만히 굳어 있던 해리가 내 조언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리의 손이 닿은 곳은 드레스가 아니라 그 위로 드러난 어깻죽지였다.

“진짜네.”

그가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작게 감탄했다.

“뭐가 진짜예요?”

“네가 그랬었잖아. 전야제 날은 피부가 더 부드러울 거라고.”

해리의 입술이 어깻죽지에 내려앉았다.

“좋은 냄새도 나. 맛있을 것 같아.”

“먹어볼래요? 진짜 맛있는지.”

“응. 먹어 볼래.”

해리가 픽 웃으며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단단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드레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주인님이 모범을 보였으니, 다음은 당신 차례예요.”

나는 돌아서 미처 벗기지 못했던 해리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해리도 피하지 않았다. 해리는 얌전히 서서 내가 제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뻐.”

그렇게 중얼거린 해리가 제 옷이 미처 벗겨지기도 전에 내 두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춰왔다. 부끄러움과 함께 참을성까지 저 멀리 던져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어때.’

나는 참을성 없는 해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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