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8/156)

19장. 결정

긴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 음악이 멈추면 곧 나와 해리의 춤도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앙의 댄스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그것이 평범한 사교 활동이었다. 대화를 통해 친교를 쌓고 교양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귀족적인 활동 아니겠나.

하지만 나와 해리 모두 귀족적인 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귀찮네.’

나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싶어 벌써부터 눈을 반짝이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슬쩍 해리를 불렀다.

“해리.”

나와 비슷하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있던 해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귀찮은데 도망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분명 해리가 혹할만한 제안일 것이다.

“그래도 돼?”

내 예상대로 해리가 반색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저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직 국왕이 있으니 그보다 먼저 파티장을 떠날 순 없죠. 하지만 파티장 안에도 도망칠 장소는 충분히 있거든요.”

나는 턱 끝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테라스를 가리켰다. 파티가 워낙 긴 시간 이어지다 보니, 어떤 파티든 저런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테라스에 들어간 뒤 커튼을 치면 이미 휴식하는 사람이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내 성인식 파티 때도 그렇게 도망갔었잖아요.”

“한 번 도망쳐봤으니, 두 번은 더 잘할 수 있어.”

“얼마나 잘하시려고.”

호언장담하는 해리를 보며 픽 웃음을 흘리자마자 음악이 끝났다. 댄스홀 밖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의 눈이 반짝였다.

“해리. 이제 도망…….”

해리의 손목을 잡으며 그를 재촉하기도 전에 몸이 뒤로 기울며 두 발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앗!”

어느새 해리의 씩 웃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껌뻑이던 나는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자기 왜 날 안아 들어요?”

나는 지금 해리에게 안겨 있었다. 그것도 파티장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도망가려면 이게 편하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주목을 받아 버렸는데.”

원래 도망의 미덕은 은밀함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 상황은 은밀함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내 지적에도 해리는 당당했다.

“주목은 처음부터 받고 있었잖아. 몰래 도망가는 건 무리였어.”

“그렇다고 더 주목받을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아냐. 이쪽이 더 낫다니까.”

해리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런 모습으로 걸어가는 연인을 붙잡을 정신 나간 인간은 없을 테니까.”

“이런 모습으로 걸어가는 정신 나간 연인도 없죠. 보통은요.”

“잠깐 정신 나간 연인 하지, 뭐.”

“그런 걸 하고 싶으면 미리 내 동의도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런 건가? 다음에는 미리 동의를 받을게.”

“아뇨. 다음부턴 정신 나간 연인을 안 하면 되거든요.”

나의 한숨에 해리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미리 봐두었던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해리의 장담처럼 이야기를 나누자며 우리를 붙잡는 정신 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해리가 걸어가는 방향에 서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물러나 알아서 길을 터주기까지 했다.

‘왜 민망함은 나의 몫이지.’

뻔뻔하게 테라스를 향해 걷는 해리와 달리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는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딴청을 부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이제 편하게 있어도 돼.”

누구도 막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테라스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고 커튼을 치자마자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듣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

‘다들 정신 나간 연인 이야기나 하고 있겠지, 뭐.’

하지만 그게 뭐가 대수겠나. 한차례 민망함은 지나갔고, 이제 테라스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편안하게 늘어질 시간이었다. 나는 곧장 불편한 구두를 벗어 던졌다. 해리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구두를 주워 내 옆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발이 빨갛다.”

해리의 눈이 불편한 구두에 혹사당한 내 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민망해져 치마 속으로 발을 숨겼다.

“구두는 예쁘면 예쁠수록 불편하거든요.”

“만져줄까?”

해리가 치마를 살짝 걷어 내 발을 붙잡았다. 일부러 발을 숨긴 보람이 없었다.

“더러워요. 만지지 말지.”

“더러워? 네 발인데 뭐가 더러워?”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내 발을 주물렀다. 해리의 손이 닿자마자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늘어졌다.

‘으. 시원하기는 한데.’

루크에게 발 마사지를 하라며 장난을 쳤을 때와 달리 마냥 시원함을 즐길 수가 없었다.

‘계속 기분이 이상해진다고.’

나는 기분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해리를 만류했다.

“그만해도 돼요.”

하지만 해리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왜? 더 해줄게. 발 아프잖아.”

“아니, 그게…”

‘네가 발을 만지니까 계속 이상한 생각이 나서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고.’

내가 생각해도 변태 같은데.

“목이 말라서 그래요. 발은 됐으니까, 마실 거 좀 가져다줘요.”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냈다. 다행히 이번 이야기는 해리에게도 잘 먹혀 들었다.

“샴페인?”

“네. 그거면 돼요.”

“응. 금방 다녀올게.”

해리가 테라스를 나서고 나는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는 귀엽지만 위험한 존재였구나.’

나는 발끝을 타고 올라왔던 감각을 잊으려고 애쓰며 괜히 손으로 부채질을 해보았다. 손짓이 불러온 바람은 미약했지만, 기분 탓인지 두 뺨에 오른 열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굳게 닫혀 있던 커튼은 생각보다 빠르게 열렸다. 당연히 해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낯선 시녀였다.

“무슨 일이지?”

이런 파티에 배속된 시녀라면 굳게 쳐진 커튼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설마 또 국왕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경계심 가득한 내 눈빛에 시녀가 다소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귀찮네.”

시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내의 것이었다. 심지어 내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루크?”

“응. 나야.”

루크는 자연스럽게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겉모습은 여전히 시녀였다.

“루크. 당신, 여자로 변장하는 거 되게 좋아하나 봐.”

처음엔 엠마로 변장하더니, 이번에는 시녀였다. 엠마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시종들도 많았는데.

“여자한테 접근하려면 여자로 변장하는 게 제일 편하잖아. 다 계산된 거라고.”

“그렇게 열심히 계산해놓고 왜 끝까지 연기 안 해?”

“어차피 넌 금방 알아챌 거잖아. 뭐하러 귀찮게 연기하면서 기력을 낭비하겠어?”

“변장을 자주 들키는 편이야? 포기가 빠르네.”

내 말에 시녀의 모습을 한 루크가 발끈했다.

“날 알아차리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야. 걔들도 매번 알아차리는 건 아니라고.”

“그 중에 하나가 나야? 이거 영광이네.”

“영광은 무슨.”

일부러 과장스럽게 인사하며 웃자 루크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들켰으니까 이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럴 거면 먼저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았지. 어차피 오늘 변장은 너한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어.”

“나한테? 왜?”

“당연히 네 정보가 돈이 되기 때문이지.”

루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반짝였다.

“나한테 정보를 팔아.”

“무슨 정보?”

“내일 누굴 후계자로 선택할 거야? 결정은 이미 내렸을 거 아냐.”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

“설마 몰라?”

내 말에 루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수도에 커다란 도박판이 열렸거든. 네가 누굴 후계자로 선택할지.”

“이런 일에 돈을 걸고 도박판을 벌인단 말이야?”

“사람들은 모든 승부에 돈을 걸지. 재밌잖아. 게다가 이번 도박은 단순히 재미 문제만은 아니니까.”

루크가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는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귀족들은 아주 필사적이야. 어느 왕자에게 줄을 대야 하나.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쪽 세계의 정보까지 구하러 와. 그들에겐 가문의 미래가 걸린 일이잖아?”

“그렇겠지.”

아마 이렇게 테라스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루크가 아닌 귀족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배당은 어느 쪽이 더 높아?”

“왜? 도박에 관심 있어?”

“재밌잖아.”

긍정이 섞인 말에 루크의 눈에 경계심이 스쳤다.

“네가 참여하는 건 반칙이야. 결정을 내리는 당사자니까.”

“그럼, 내게서 얻은 정보로 네가 도박판을 흔드는 건 반칙이 아니고?”

내 질문에 루크의 입이 꾹 다물렸다. 생각지 못한 부분을 찔린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왕세자가 유리하다고 생각해.”

루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네가 왕세자를 좋아했던 건 워낙 유명하고, 또 오랫동안 왕의 후계자로서 이름을 알렸던 건 그쪽이잖아?”

“그럼 배당은 1왕자 쪽이 높겠구나?”

“아무래도.”

루크는 나와의 대화 속에서 조금이라도 힌트를 찾기 위해 열심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봐도 말 안 해줄 거니까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해리도 곧 돌아올 텐데.”

“아. 그 대마법사의 후손 말이지.”

내 말에 루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걘 금방 돌아오기 힘들걸? 국왕에게 붙잡혀서는 뭐라고 이야기 중이던데.”

“……국왕과 해리가?”

참으로 불길한 조합 아닌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불편한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대화는 즐거웠어. 잘 가!”

나는 황당해하는 루크에게 인사하고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애써 해리의 위치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국왕과 독대 중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일이 터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늘한 얼굴로 국왕을 바라보던 해리의 표정이 일순간에 돌변했다.

“헉!”

해리가 국왕의 멱살을 틀어잡는 것을 본 귀족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파티장 곳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해리에게 검을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하하!”

국왕은 제 멱살을 붙잡은 해리의 손을 떼어내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물러서. 위협이 될 일은 없다.”

국왕이 손을 들어 기사들을 물렸다. 해리는 여전히 국왕을 노려보고 있었고, 국왕은 그런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국왕이 해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해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네.’

저렇게 가만히 당하고 있을 해리가 아니었다. 내가 테라스에서 뛰쳐나온 이유도 해리가 미친개처럼 날뛸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국왕은 마치 자신이 우위에 선 사람처럼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지금 상황만 떼놓고 본다면 확실히 국왕이 우위에 서 있었다.

‘와. 이거 열 받네?’

왕성에 도착했던 날. 해리가 왜 미친개처럼 날뛰며 판을 엎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귀한 내 남자가 별것도 아닌 놈에게 저런 취급을 받고 있으니 속에서 열이 났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차갑게 억누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불편한 구두가 발을 짓누르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폐하.”

국왕을 노려보며 앞을 향해 걸었더니 나는 금세 그의 앞에 다다랐다. 내가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자, 국왕이 승리자의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개를 제압했으니 나 정도는 우습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국왕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지.’

나 역시 해리 못지않은 미친개라는 걸.

“그대가 없어 마법사와 잠시 독대 중이었어.”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마법사가 귀족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실수가 잦던데. 제대로 예의를 가르치는 게 좋겠군.”

“예의. 네. 그거 중요하죠.”

나는 웃으며 치마 속에 손을 넣어 허벅지에 차고 있던 유피테르를 꺼내 들었다. 고민 없이 치마를 걷는 내 손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낸 성검 때문이었는지. 해리가 국왕의 멱살을 잡았을 때보다 더 놀란 목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게 뭔지 아시겠죠, 폐하?”

나는 국왕을 향해 검을 겨누며 웃었다. 검을 물렸던 기사들이 다시 검을 뽑아 내게 겨누었지만, 내 뒤에도 기사가 있었다. 성검의 주인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던 왕립기사단장 엘이었다.

엘이 자신들을 노려보자 왕의 기사들이 놀라서 흠칫 떨었다. 엘 로이츠의 검은 왕국 최고였다. 웬만한 기사들 수백이 몰려와도 그를 제압하긴 힘들었다.

“이건 성검 유피테르입니다. 건국왕께서는 이걸 뽑는 자가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하셨다죠. 왕의 자격을 가진 자라고요.”

나는 국왕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왕관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 ‘왕의 자격’을 쥐고 있는 건 저인가요, 폐하인가요?”

나는 국왕을 겨누고 있던 유피테르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살짝 던졌을 뿐인데도 유피테르가 바닥 깊숙하게 꽂혔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바닥에 깊이 박히기. 유피테르가 가진 쓸모없는 기능 중 하나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볼까요? 폐하께 왕의 자격이 있나, 없나.”

국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닥에 꽂힌 유피테르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어떠한 움직임도, 어떠한 말도 없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국왕을 도발했다.

“왜요? 검을 뽑을 자신이 없으신가요?”

국왕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는 제레인트의 왕이었다. 이미 왕위를 가진 사람이 검을 뽑아서 왕의 자격을 증명하 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지만 성검을 뽑아 자격을 증명한 사람을 앞에 두고 정작 왕인 그가 검을 뽑지 못한다면?

‘꼴이 상당히 우스워진다고.’

국왕의 입장에서는 검을 뽑으면 본전이오, 뽑지 못하면 망신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국왕과 나의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길어지는 침묵에 파티의 분위기도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렸다.

‘오늘 파티는 여기서 끝이구나.’

사실 해리가 국왕의 멱살을 잡았을 때부터 즐거운 파티는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적당히 치고 빠질 타이밍이었다. 한 번 그의 체면을 바닥에 처박았으니, 이번에는 적당히 띄워줄 차례였다.

“뭐. 제가 뽑은 이 검을 폐하께서 뽑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나는 국왕을 향해 웃으며 보란 듯이 유피테르를 뽑아냈다. 유피테르가 뽑혀 나간 자리에 검이 꽂혀 있던 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저는 성검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 이리 고개를 숙이고 있지요.”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올려 국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께서 저와 제 사람들을 존중해주신다면, 저 역시 성검의 주인으로서 폐하께 정중한 인사를 올릴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충성스러운 신하인 듯 정중한 인사를 올렸지만, 결국 반대의 경우라면 국물도 없다는 경고였다. 나는 이게 경고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대접해줄 때 적당히 하세요, 폐하. 쓸데없는 견제 하다가 진짜 곤란해지는 수가 있으십니다.’

인사를 올리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나의 시선에 국왕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국왕이 서로 존중하고 각자의 길을 가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부딪힐 일은 없었다.

‘거절하고 한 판 붙자는 식으로 나온다면 곤란해지겠지만…….’

나는 국왕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레인트 사람들은 나라를 세운 건국왕을 신성하게 여기고 존경한다. 성검을 뽑은 나는 그의 전설을 잇는 존재. 나와 척을 졌다간 아무리 국왕이라도 거대한 비난과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그대와 그대의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을 리가 있겠나.”

국왕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대답에 꽁꽁 얼어 있던 파티장의 분위기가 조금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파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저희가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책임지겠습니다. 다른 벌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그 역시 따르겠습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국왕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다. 벌이라니 당치도 않다. 떠나는 것을 허락하겠다.”

“관대하신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팔꿈치로 해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빨리 국왕한테 대충 인사해요. 집에 가야겠어요.]

내 말에 해리가 허둥대며 국왕에게 대충 고개를 숙였다. 예법으로 따진다면 말도 안 되는 인사였지만 그걸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왕에게 인사까지 마쳤겠다, 이제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우리가 당장 파티장을 떠난다고 해도 붙잡을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해리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뒤로 물러서다 유피테르가 바닥에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

“참. 잊을 뻔했네요. 깨진 바닥 타일 값은 제 앞으로 청구하세요. 기꺼이 배상하겠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손에 든 유피테르를 가볍게 흔들었다.

“거기에 검을 꽂은 것도, 다시 검을 뽑은 것도 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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