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7/156)

* * *

나는 강한 빛을 뚫고 나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강한 빛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리 없다. 당연히 유피테르의 솜씨였다.

[오늘은 빛이 너무 강한 거 아니에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더욱 신경 써서 힘을 썼습니다.]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유피테르는 후광 효과를 쓸 때 가장 즐거워 보이네요.]

[제 능력 중 가장 유용하고 멋진 것이니까요. 부디 자주 사용해주십시오.]

[지금도 충분히 많이 사용하고 있거든요. 문이란 문을 열고 다닐 때마다 후광을 뿜어댈 수는 없잖아요.]

[문이란 문을 열 때마다 후광이라니. 너무나 멋진…]

유피테르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뒀다가는 정말 그렇게 할 기세라,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유피테르.]

[예에…… 멋진 일은 마음 속에 품고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법이지요…….]

단호하게 말이 잘리자 유피테르가 아쉬움이 역력한 목소리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실망한 유피테르가 서서히 후광을 거둬들이자 새하얀 빛에 가려져 있던 파티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티장의 모든 사람이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후광 효과가 확실하긴 하구나.’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니 최근에 보았던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나의 성인식 생일파티에 와서 축하해줬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왕세자의 약혼식과 내 성인식 생일파티.

‘내 파티는 왕세자파와 1왕자파의 기싸움에 이용당한 것뿐이지만…….’

어쨌든 둘 중에서 내 쪽을 선택해주었던 사람들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호의가 있었다.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내 시선을 받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자지러질 듯 놀라며 얼굴이 벌게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화장하고 꾸몄는데도 악역 얼굴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는 거야?’

나이가 들어 인상이 변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아치볼드와 함께 먼저 파티장에 들어와 있던 오베론 공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중년의 오베론 공작이 아직도 악역 얼굴의 효과를 뽐내고 있는 것을 보면, 나 역시 나이가 들어도 인상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브리아 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내 앞에 엘이 다가왔다.

‘캐서린 앞에 있지 않았나?’

그녀 앞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것을 보았는데, 어느 순간 그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까지 왕립기사단장일 필요는 없는데요. 나도 성검의 주인일 필요는 없고요.”

“……네.”

엘이 내 말에 대답하면서도 어리둥절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내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더 직설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굳이 내 옆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내 옆에 계신 신사분으로도 호위는 충분하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해리가 눈을 부라리며 맹렬한 기세로 엘을 경계하고 있었다.

“로이츠 경도 전야제 파티를 즐겨야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까지 엘이 곁을 지키고 있던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럽게 내 앞에서 이러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캐서린 옆에서 재미있게 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쪽을 바라보자마자 나는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갑자기 저기가 왜 이렇게 휑해졌지?’

엘과 함께 캐서린 옆을 지키고 있던 메이슨과 리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약혼자인 카시안만이 캐서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캐서린의 얼굴이 어둡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다들 어디 갔냐.’

리던과 메이슨 모두 파티에서 캐서린의 옆을 떠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방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파티는 주인공 옆에서 즐겨야 제일 재미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요. 그런데 드레스에 붙어 있는 이 다이아몬드는 상당히 높은 등급이군요.”

리던과 메이슨이 어느새 내 옆에 서서 마치 일행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메이슨은 등장부터 지식폭력배의 면모를 자랑하며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커팅도 섬세하고 빛의 반사도 훌륭하니, 이 정도의 다이아몬드라면 이샤 영지에서 나온 거겠죠.”

그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는 다이아몬드의 산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메이슨은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커팅하는 것이 좋은지, 유색 다이아몬드는 왜 가치가 높은 것인지 떠들어댔다. 리던은 익숙하게 그의 강의를 한 귀로 흘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국왕께서 뭐라고 하시든 신경 쓰지 마.”

“폐하께서요?”

“지난번에 제대로 망신을 당했잖아. 그게 왕성 내에도 소문이 쫙 퍼져서 말이야. 그걸 만회하려고 뭔가를 또 꾸미고 계실지도 몰라. 내가 아는 그분은 그러실 분이거든.”

리던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해리는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아직도 다이아몬드 강의를 하고 있는 메이슨을 경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워낙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니까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태로 조용히 있는 건 싫으시겠죠.”

하지만 나 역시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가 싸움을 걸어오면, 이번에는 해리가 아닌 내가 미친개가 되어 판을 뒤엎을 생각이었다.

왕성에 온 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짓누르려 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인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려고 하는 건 비겁하지 않나.

‘다시 그런 수작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알아서 적당히 대접해줄 텐데.’

나는 정말 조용히 후계자만 선택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국왕 스스로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만 않는다면, 이 평화는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내일 제가 그 높은 자리에 앉을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게 좀 우습네요.”

“왜? 위대하신 성검의 주인이시잖아, 그대는.”

리던이 과장스럽게 정중한 태도로 내게 인사했다. 말투며 행동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나 역시 그 장단에 맞춰 일부러 오만한 척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맞아요. 내가 좀 대단하긴 하죠.”

“그래. 그댄 정말 대단해.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늘 놀랍지.”

하지만 돌아온 리던의 말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장난기가 섞여 있던 눈에도 어느새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진지해지면 잘난 척 한 제가 좀 민망해지거든요?”

“겨우 이런 걸로 민망해한다고? 난 그대가 생각보다 더 뻔뻔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고.”

“전하께 저는 그런 사람인가요…….”

리던 앞에서 보였던 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한숨을 내쉬니 어쩐지 얼굴이 따가웠다. 슬쩍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피자 아직도 파티장의 귀족들이 전부 나를 보고 있었다.

‘등장할 때는 후광 때문에 그렇다고 쳐.’

그런데 왜 아직도 다들 나만 보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주변을 살핀 뒤 금세 이유를 알아챘다.

‘내 옆에 몰려 있는 이 화려한 남자들 때문이군.’

리던, 엘, 메이슨. 모두 수도 귀족들의 주목을 받고있는 유명인사들이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시선이 꽂히는 건 당연했다.

‘난 조용히 해리랑 놀고 싶단 말이야.’

나는 리던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그에게 속삭였다.

“왕자님. 이제 그만 캐서린 양한테 돌아가세요.”

“뭐? 지금 당장 꺼지라고?”

“이왕이면 로이츠 경과 메이슨 재상님도 같이요.”

“이왕이면 두 사람을 다 데리고 꺼지라고?”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조금 순화했을 뿐이지 딱 그런 말이었잖아.”

그렇게 리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거대한 문이 열리고 이 파티의 마지막 참석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국왕과 왕비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옷을 입고 등장한 두 사람을 향해 모두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들라. 오늘은 축제의 전야이니, 모두 춤추고 노래하며 축배를 들 것이다.”

중앙의 단 위로 나아간 국왕이 잔을 높이 들었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아래쪽의 귀족들에게도 와인이 담긴 잔을 나눠주었다.

“자. 모두 잔을 들어 제레인트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지.”

국왕의 제안에 따라 모두가 잔을 높이 들었다. 그는 파티장의 귀족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레인트의 번영을.”

국왕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잔에 든 와인을 모두 비워냈다.

“제레인트의 번영을!”

국왕을 따라 귀족들 역시 하나둘씩 들고 있던 잔을 비워냈지만,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국왕의 시선이 이상하게 불길해 쉬이 잔을 비우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모든 귀족들이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남은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었다.

“오베론 공녀. 왜 술을 들지 않지?”

국왕의 지적에 그를 향해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성검의 주인이 기원하는 제레인트의 번영을 모두 듣고 싶을 터인데.”

“……제레인트의 번영을.”

나는 고개를 숙여 국왕의 시선을 피한 뒤 손에 든 잔을 바라보았다.

[계약자!]

고개를 숙이자마자 잔 속에서 아스페리츠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다행히 잔에서 튀어나온 아스페리츠의 얼굴은 엄지손톱만큼 작은 크기여서,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잔은 들고 있는 나 하나뿐이었다.

[이거 마시지 마!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독이라도 들었어? 그럼 정화해 줘. 너 그거 잘하잖아.]

웨어울프의 피도 정화하는 정령들의 왕이 고작 인간이 부린 수작을 정화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스페리츠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내게 속삭였다.

[조용히 정화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안 되네? 성분도 잘 모르겠고… 뭔가 좀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었나 봐.]

나는 눈만 살짝 굴려 국왕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국왕이 비죽 웃음을 흘렸다.

‘와. 진짜 비열해.’

그가 내게 건네질 잔에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이거 마시면 죽을까?]

[사람이 죽을 만한 독은 아닐 것 같아. 그래도 술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불길하니까 네가 이걸 안 마셨으면 좋겠어.]

하지만 마시지 않을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국왕이 내린 술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난처한 기분이 되어 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잔을 가져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내 손에 있던 잔을 든 해리가 망설임 없이 제 입으로 술을 털어 넣는 모습이 보였다.

“아. 한 잔으로는 술이 부족해서.”

모두의 시선을 받은 해리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빈 잔을 다시 내 손에 돌려주었다. 씩 웃는 해리를 보며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구두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왜 걷어차? 대신 마셔 줬는데 칭찬을 해줘야지.”

나는 입을 비죽이며 불만을 토로하는 해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걸 먹으면 어떡해요! 아스페리츠 말 못 들었어요? 이상한 게 들었다잖아요.]

[아. 들었지.]

해리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뭐, 어차피 인간이 부린 수작일 거 아냐. 악마의 몸은 인간보다 훨씬 튼튼해서 그런 약물에 영향을 안 받는다고.]

[아스페리츠도 정화를 못 한다고 했다고요. 악마의 몸에도 영향을 주는 강력한 약일 수도 있잖아요!]

나는 서둘러 해리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해리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이상 징후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이브리아.]

해리가 분주히 제 몸을 살피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왜 이렇게 날 우습게 봐? 나 악마라니까. 그것도 모든 악마들의 첫 번째에 서는 대악마. 악마 중에 나보다 높은 놈이 없다고. 난 고작 인간이 만든 약에 당하지 않아.]

해리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곧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저와 춤이나 추시죠, 주인님?”

“춤? 추움?”

나는 황당해져 헛웃음을 흘렸다. 해리가 뭘 마셨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무슨 춤을 춘단 말인가.

하지만 해리는 황당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끌어 중앙으로 나아갔다. 중앙은 이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귀족들로 가득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 역겹다더니 춤은 무슨 춤이에요?”

“응. 역겨워.”

가운데 자리를 잡은 해리가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거리가 입맞춤을 할 때처럼 아주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네 냄새만 느껴지게 이렇게 딱 붙어 있어. 여기선 춤출 때 말고는 이렇게 가까이 못 붙어 있잖아.”

해리의 손이 등을 쓸어 내린 뒤 허리에 가볍게 안착했다.

“음…… 춤은 천 년 전이랑 달라진 게 없겠지?”

그가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람들은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브리아와 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빙글 돌 때마다 이브리아의 치마에서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어머. 저 춤은 카타롬이네요.”

누군가의 속삭임에 사람들은 춤의 정체를 깨달았다. 천 년 전 건국왕 시절에 유행하던 춤이었다. 지금은 카타롬보다 빠르고 경쾌한 테세네가 유행이었지만, 오늘은 천 년 전의 유행이 더 잘 어울리는 날이었다.

“건국제의 전야에 잘 어울리는 춤이네요.”

중앙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 역시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어느새 자리에서 물러났다. 덕분에 무대는 두 사람만의 자리였다. 그러나 서로에게 푹 빠진 두 사람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오늘의 주인공은 오베론 공녀였어요.”

파티 시작 전 열심히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토론하던 이들이 감탄하며 결론을 내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캐서린도, 국왕도, 왕자들도 아니었다. 지금 중앙에서 춤을 추는 저 두 사람이야말로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파티의 주최자인 국왕 역시 모두의 주목을 가져간 이브리아와 해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쫓는 국왕의 두 눈이 눈에 띄게 차가웠다. 그의 시선은 두 사람 중에서도 해리를 더욱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역시 그랬어.’

국왕이 눈을 내리깔며 주먹을 꽉 쥐었다.

‘건국왕께서 남긴 경고는 거짓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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