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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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에 불타오르는 세 사람 덕분에 전야제 파티까지 나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목욕한 뒤 제니가 준비해 온 향유로 마사지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데이지가 직접 만들었다는 헤어팩으로 머리카락을 관리했다. 해가 떨어져 저녁이 되면 겨우 두 사람에게 해방되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공작과 아치볼드가 함께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매일 식사를 함께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에렐에 머무르는 바람에 얼굴 볼 일이 많지 않으니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자는 아치볼드의 제안에 따라 오베론 가족은 매일 저녁을 같이 먹었다.

덕분에 해리는 나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상심한 해리가 내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며 칭얼대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늦었어. 평소보다 훨씬 더 늦었다고.”

해리가 침대에 엎드려 고개만 돌린 채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해리를 달래고 그와 놀아주는 것이 내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오늘의 해리는 평소보다 늦어진 내 귀가 시간에 단단히 삐친 듯했다.

“하지만 30분 정도밖에 안 늦었는데요.”

“30분이 짧아? 30분 동안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그래요? 예를 들면요? 30분 동안 어떤 많은 걸 할 수 있어요?”

“그건…….”

해리가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소리쳤지만, 구체적인 예까지는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왜 몰라요? 나는 알 것도 같은데.”

“알긴 뭘 안다는 거야.”

나는 토라진 해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입술이 제 뺨에 닿자마자 투덜거리던 해리의 입이 꾹 다물렸다. 대신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던 해리의 두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

“오늘도 이런 걸로 나 달래려고?”

해리의 질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또 내가 해리의 몸만 좋아한다고 하려고요?”

“아니. 그게 아닌 건 이제 알아. 넌 나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다 알아.”

해리가 씩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죠?”

장난기 섞인 내 질문에 해리가 등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네가 이런 걸 허락하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잖아.”

해리가 드레스를 살짝 끌어 내려 어깻죽지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내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는지, 귓가에 해리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난 자신감이 넘쳐. 우리 주인님이 날 특별히 예뻐해 주셔서.”

“그럼 이제 30분 늦은 걸로 화 안 내는 거예요?”

“우리 주인님 너무하시네. 겨우 뺨에 입 맞춰준 걸로 끝내시려고?”

해리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나는 몸을 돌려 해리를 마주 보았다.

“그럼요?”

“몸으로 달래주시려면 그것보단 더 해주셔야지.”

해리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볍게 두드렸다. 키스해달라는 말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작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해서 입을 떡 벌렸다.

“와. 언제 이렇게 음흉해졌어요? 누구한테 이런 거 배웠어!”

“누구긴. 우리 주인님을 잘 보고 배운 덕분이지.”

“나요? 내가 이렇게 음흉한 수작을 부려요?”

“그걸 몰랐어?”

해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황당함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이 상당히 민망했다.

‘내가 음흉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할 말이 없네.’

나는 민망함을 피하고자 슬쩍 눈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눈을 피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해리에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됐다. 내 주인님이 안 해주면 그냥 내가 하지 뭐. 너무 기다리기만 하는 애완견은 매력 없잖아.”

“뭘 한다는…….”

내가 다시 해리에게로 눈을 돌리기도 전에 그가 내 입술을 깨물었다. 해리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며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이 밀착했다. 해리의 손은 내 등을 쓸어 내렸고, 나는 해리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동안 거칠어진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귀를 자극하는 건 거친 숨소리만이 아니었다. 입을 맞추며 발생하는 수많은 소음들이 귀를 어지럽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느새 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내 위에 올라탄 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입을 맞췄을 뿐인데 어쩌다 이런 자세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리의 손이 내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부드럽다.”

“요즘 열심히 관리를 받고 있거든요. 전야제 날은 더 부드러울 거예요.”

내 말에 해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보다 더 부드럽다고? 그럴 수가 있나?”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뺨을 쓰다듬는 해리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어 그의 손을 매만졌다. 느리게 내 뺨을 쓰다듬던 해리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해리 피부도 엄청 부드러운데. 몰랐어요? 어쩌면 나보다 더 부드러울지도 몰라.”

해리의 피부는 완벽했다. 관리를 안 하는 건 나와 똑같은데, 어쩜 이렇게 깨끗하고 부드러울 수가 있을까.

‘악마는 전부 이런 걸까?’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레피와 리피도 상당히 피부가 좋아 보였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악마라는 종족의 특성이라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참 부러운 일이었다.

‘악마들한테는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이 필요 없겠어.’

매일 그녀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내게는 그것이 가장 부러운 점이었다.

“이제 화 안 낼 거예요?”

나는 멍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리에게 물었다. 내 목소리에 굳어 있던 해리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씩 웃으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처음부터 화 안 났어.”

“그럼…….”

“너한테 예쁨 받고 싶어서 수작 부린 거지.”

해리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예쁘게 웃는 해리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도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한다는 건 진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악마가 이럴 리가 없었다.

‘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라 이 모습을 보여주는 건 민망했다.

“왜 얼굴을 가려? 그렇게 가려도 빨개진 거 다 보여.”

“그래도 이렇게 가리면 난 해리가 안 보이잖아요.”

“그게 뭐야.”

해리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더니 내 손을 붙잡아 아래로 팔을 끌어 내렸다. 덕분에 빨개진 내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도대체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거야?”

“해리가 너무 잘 생겨서요.”

“……그, 매일 보는 얼굴인데 왜 새삼스럽게.”

“그 매일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잘생겨서요.”

태연하게 흘러나온 내 말에 이번에는 해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야, 너는, 무슨 말을, 어? 그런 말을 막, 그렇게 쉽게 하고 그래?”

나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해리를 보며 씩 웃었다.

“잘 생겼다는 말이 그렇게 부끄러워요? 평생 그런 말 듣고 살았을 거면서.”

“잘 생겼다는 소리야 많이 들었지만…….”

해리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평범한 사람이 했다면 상당히 재수 없을 만한 대사였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해리라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해리는 정말 잘 생겼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잘생겼다, 예쁘다 칭찬을 하면 해리는 늘 얼굴을 붉혔다.

“네가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란 말이야.”

해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생겼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보다 그의 얼굴이 더 빨개져 있었다.

“그러니까 넌 그런 소리 좀 함부로 하지 마.”

해리가 내 두 손을 놓아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해리의 경고는 완전히 틀렸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였다. 나는 붉은 기가 조금 남아 있는 해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잘 생겼어요.”

“어어…….”

해리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무엇엔가 홀린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방금 뭐라고…….”

“잘 생겼다고요. 우리 해리.”

나는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해리를 칭찬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해리. 잘 생겼다는 말에 진짜 약하네요.”

내가 자신을 놀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전히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해리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툭 쳤다.

“바보야. 이번엔 그 말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거든?”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요?”

나는 눈을 껌뻑이며 질문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해리가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말 안 할래.”

“왜요?”

“말하면 이걸로도 계속 나 놀릴 거잖아.”

“안 놀려요. 내가 왜 해리를 놀려요?”

내 말에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거참 신뢰가 가는 말이네.”

누가 들어도 반어법이 확실했다. 눈곱만큼도 신뢰가 안 간다는 뜻이었다.

“이거 진짜 나쁜 주인님이네.”

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혀를 끌끌 찼다.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든지. 뭐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해?”

“어? 나 이미 입에 침은 발랐는데요?”

나는 타액이 남아 있는 입술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내 입술을 이렇게 만든 건 당연히 내게 거짓말 타령을 하고 있는 해리였다.

“누가 내 입술을 물고 빨고 하는 바람에 벌써 입에 침 잔뜩 묻었어요.”

“그, 야, 너는…….”

해리의 얼굴이 다시 한번,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해리를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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