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4/156)

* * *

에렐에서 만든 포션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문의 중심은 역시 기사들이었다. 서리기사단에서 시작된 소문은 순식간에 수도의 기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들은 누구보다 포션이 많이 필요한 집단이었고, 자신들끼리 강력한 네트워크도 형성되어 있었다.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기에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었다.

기사들에게서 시작된 소문은 서서히 수도의 일반인들과 귀족들에게까지 빠르게 전해졌다. 기사가 귀족과 평민을 모두 접하는 특수한 계층이라 벌어진 현상이었다.

‘사실 그런 효과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었다. 나는 의외의 행운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물론 반갑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신전의 움직임이었다.

“신전의 대신관이 노발대발했대요. 감히 신성력이라는 이름을 팔아 장사를 한다고요.”

사용인들과 어울리며 빠르게 수도의 소문을 가져온 엠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나는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신성력을 무기 삼아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던 건 신전이었다. 그들이 진정한 성직자라면,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포션을 무료로 나눠줘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신전을 유지하겠다는 명목으로 포션을 비싼 값에 팔아왔던 과거는 모두 잊은 것인지 우리를 비난하고 나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이거냐.’

처음 듣는 논리는 아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 개똥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대처 방법은 간단하지.’

개무시. 나는 신전의 항의를 철저히 무시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신전의 성직자들은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서 지내며 은둔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속세와 떨어져 수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말로는 열심히 우리를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이겠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다. 수도나 에렐까지 쳐들어와서 포션 판매를 막는 등의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에렐의 포션을 찾고 있었다. 만약 신전이 그간의 은둔을 깨고 행동에 나선다면, 상대는 에렐이나 내가 아니라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치유 효과를 가진 포션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들의 신도와 싸우는 신전과 성직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어떤 방향으로든 신전은 우리에게 포션 문제로 시비를 걸 수 없었다.

‘게다가 걔들은 태양신을 모신다고 했잖아. 난 태양신이랑 친하다고.’

무려 태양신이 직접 꽃길을 깔아준 몸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태양신이 잘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신전과의 문제에 아주 당당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엠마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신전인데요.”

태양신은 대륙의 유일한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있었다. 대륙 모든 사람들이 곧 태양신의 신도였고, 덕분에 신전은 큰 힘을 휘두르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탁이 끊어진 것이 오래전이라 그 명성에 금이 갔다고는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마음 속에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았다.

‘태양신의 실체를 알게 되면 다들 믿음을 버리고 싶어질 텐데.’

나는 다소 방정맞았던 새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힘을 다 모으지 못해 어설픈 모습으로 나타난 거라지만, 그런 방정맞은 새는 너무하지 않은가.

“괜찮아. 신은 내 편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아가씨.”

하지만 엠마는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고 믿지만, 그런 소리를 하셨다간 허세병에 걸렸다며 손가락질을 받으실걸요.”

“허세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허세병의 전형적인 증상이지요.”

“그래. 나도 이게 내 허세였으면 좋겠어.”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허세병 환자 같은 대사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엠마의 시선이 점점 더 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초대장들이 좋은 화젯거리가 되어 주었다.

“초대장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어머. 많다니요.”

내가 초대장을 뒤적이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자, 엠마가 무슨 소리냐는 듯 펄쩍 뛰었다.

“요즘 수도에서 아가씨보다 화제인 사람은 없는걸요. 그렇게 화제인 분이 에렐에만 계속 계시다가 겨우 수도로 왔으니 초대가 쏟아지는 건 당연하지요.”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은데.”

원래도 파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 중에 딱히 흥미로운 이름도 보이지 않았다.

“선택은 아가씨께서 하시는 거니까요. 초대를 거절했다고 노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다들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보낸 것이 분명해요.”

“내가 그렇게 파티에 참석 안 하는 이미지였나?”

에렐로 떠나기 전 원래 이브리아는 온갖 파티를 휩쓸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 아가씨께서 워낙 대단하신 분이니 바쁘실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대서사시의 영웅이시잖아요?”

“으. 그 대서사시 이야긴 그만하는 걸로 정리되지 않았어?”

“아차.”

엠마는 실수했다는 듯 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도 뿌듯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영웅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꼭 참석해야 하는 파티는 없어?”

“그거라면, 국왕폐하께서 주최하시는 전야제 파티가 있지요. 그건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는 행사이니 아가씨께서도 꼭 참석하셔야 해요.”

나는 엠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실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발견했다. 건국제의 전야제 파티에 나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바탕 피곤한 기싸움을 해야겠네.”

수도의 모든 귀족이 모인다고 했으니 캐서린도 참석할 것이 분명했다. 이브리아의 캐서린 살해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이후, 캐서린과 같은 파티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었다. 캐서린의 추종자와 나를 비난했던 귀족 영애, 영식들도 모두 파티에 나올 것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한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엠마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가씨.”

엠마가 나를 비장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영 불길했다.

“이번에도 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아가씨의 성인식을 위해 뭉쳤던 그 삼인방, 다시 소집하겠습니다.”

* * *

지난번 나의 성인식을 위해 힘을 써 주었던 세 디자이너가 다시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에도 저희만 믿으세요!”

의상 디자이너 라나, 헤어 디자이너 데이지, 메이크업 디자이너 제니. 스스로를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으로 부르는 세 사람이 내게 차례로 인사했다. 나는 의욕에 불타오르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길게 하품했다.

“응. 그래. 반가워. 덕분에 지난 성인식은 훌륭했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확실히 놀라웠다.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공이 컸다. 나의 인사에 세 여인이 다시 한번 의욕으로 반짝였다.

“이번에도 믿고 맡겨주신 만큼 최고의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전야제 파티에서 그 누구도 아가씨보다 빛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수도의 귀족 영식들 모두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겠지요!”

세 사람은 벌써 머릿속에 파티장의 풍경이 그려진다는 듯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믿고 맡길게.”

“꼭 그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르르 내 곁으로 몰려온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은 내 상태를 확인하며 혹평을 쏟아냈다. 시작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제니였다.

“세상에. 지난 성인식 때보다 피부가 더 거칠어지셨군요! 초원에 우뚝 선 나무껍질도 이렇게 거칠고 퍽퍽하진 않을 거예요.”

다음은 데이지였다. 그녀는 내 머리를 빗다 뚝 부러진 빗을 허망한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머리카락은 이제 빗을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군요.”

마지막은 라나였다.

‘라나에게는 혹평 받을 이유가 없지!’

그러나 안심하고 있던 내게 라나의 신랄한 평가가 쏟아졌다.

“세상에. 아가씨. 전보다 살이 더 빠지셨군요. 이렇게 마르시면 드레스 선이 예쁘게 표현되지 않아요!”

빠르게 나의 상태를 점검한 세 여인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비장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 아가씨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합니다.”

최악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의 눈치를 봐서 돌려 말한다는 인상이었다.

‘그렇게 심각한가?’

내가 보기에는 성인식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옷을 입으면 조금 헐렁하기에 살이 조금 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피부나 머리카락의 상태는 늘 똑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심각한 세 여인의 표정을 보니 전문가들의 눈에는 보이는 차이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여기서 구르고, 저기서 구르고. 사방에서 구르다 보니 레이디로서 나 자신을 관리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저희는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이니까요.”

“이번에도 완벽한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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