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3/156)

* * *

이브리아가 떠난 뒤에도 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평소라면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기사들을 혼냈을 발더스 단장도 오늘은 너그러웠다. 오늘은 성검의 주인, 오베론의 아가씨. 이브리아가 훈련을 보러 와 준 날이지 않나. 성검의 주인이 훈련을 보러 와준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데, 이브리아는 간식과 선물까지 준비해 왔다.

“봤어? 그 아름답고 위엄 넘치는 얼굴!”

“역시 성검의 주인이셔.”

기사들이 황홀한 얼굴로 이브리아를 찬양했다. 그중 한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했다고. 분명 눈이 마주쳤어!”

샌드위치를 한입에 먹어 치워 이브리아의 시선을 받았던 그 기사였다. 그의 자랑에 다른 기사들의 기세가 금세 흉흉해졌다.

“그래. 저 녀석, 샌드위치를 한입에 먹어치워서 이브리아 님의 시선을 독차지했지.”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어. 치사한 자식!”

“어디서 그런 수법을 배워 온 거야?”

“치사한 놈은 죽어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발길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몰매를 맞으면서도 기사는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고작 눈빛 교환이 뭐가 대수야?”

그 소란에서 한 발 떨어진 채 여유로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있던 기사가 코웃음을 흘렸다.

“나는 이브리아 님의 손길을 받았다고. 그분의 손이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지!”

이브리아가 포션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기사였다.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분의 손길이 닿았던 내 왼팔을 절대 씻지 않을 거라고.”

흐뭇한 얼굴로 제 왼팔을 쓰다듬는 기사를 보며 단원들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 자식, 대련 중에 일부러 다친 게 틀림없어. 검을 맞대고 있는데 일부러 힘을 빼더라니까?”

“자해까지 해서 관심을 얻으려고 하다니. 이 치사한 자식!”

물론 기사는 대련을 하다가 일부러 다친 것도, 자해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와. 진짜 무서운 놈이네.”

“너도 죽어라, 이 자식!”

“저 더러운 몸에서 이브리아 님의 손길도 씻어 내자!”

“옳소! 몸을 아주 박박 닦아내야지!”

이제 이브리아의 치료를 받았던 기사가 새로운 표적이 되었다. 기사들이 물이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우르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몸을 닦는 건 절대 안 돼!”

여유롭게 기사들의 비난을 듣고 있던 그가 물통을 발견하고 질색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이겨낼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그는 머릿수에 밀려 금세 동료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묵은 때까지 전부 벗겨 주마!”

기사들은 그의 몸에 물을 끼얹어 왼팔을 집중적으로 닦아내며 열심히 발길질을 해댔다. 그렇게 응징이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브리아와 눈빛 교환을 했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은 뒤 바닥에 늘어져 있던 기사였다.

“그런데 이브리아님의 검술 말이야. 어딘가 조금 어설프지 않았어?”

그의 말에 기사들이 하나 둘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 검에서 나온 빛이 너무 강렬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화려한 검술은 아니었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검만 휘두르셨으니까 말이야.”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기초 베기와 비슷했던 것 같아.”

기사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금세 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자신들을 질책하는 발더스 단장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검술이 경지에 이르면 화려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때부터는 아주 간단한 동작으로도 강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게 되지.”

옳은 말이었다. 대단한 기사는 간단한 손짓 하나로 적을 제압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브리아 님의 동작은 간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묘하게 어설퍼 보였습니다.”

눈이 멀어버릴 듯 번쩍이는 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브리아가 선보이는 간단한 동작들이 깔끔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맞아.”

“그랬어.”

다른 기사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발더스 단장이 그들을 더욱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어리석은 놈들. 그러니 너희가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발더스 단장은 검을 뽑아 직접 자세를 잡았다. 정석과도 같은 빈틈 없는 자세였다.

“너희가 싸울 상대가 이런 자세로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

기사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착실하게 발더스 단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하니 경계할 겁니다.”

“상대가 공격하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수를 계산할 겁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발더스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꿨다.

“그럼 상대가 이런 자세라면 어떻지?”

이번에는 어설프고 흐트러짐이 많은 자세였다. 눈만 깜빡여도 빈틈이 보였다.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볍게 먹겠지요.”

“당장 달려들어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기사들의 대답에 발더스 단장이 픽 웃었다.

“그래. 하지만 너희 앞에 있는 나는 그런 어설픈 기사인가?”

절대 아니었다. 발더스는 서리기사단 제일의 실력자가 아닌가.

“어설프게 보인다고 진짜 어설픈 적인가? 내가 완벽하다고 늘 완벽하게 맞설 것인가?”

발더스의 말에 기사들이 벼락을 맞은 듯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럼 이브리아 님께서는…….”

“그래. 이브리아 님은 너희에게 그런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던 거다.”

발더스 단장이 자세를 풀어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감격한 얼굴이었다.

“성검의 주인께서 저희에게 그런 가르침을 주셨다니.”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가슴에 새기고 어떤 적이든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기사들의 외침이 연무장을 울렸다.

* * *

나는 차례로 기사단을 방문한 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왜 다들 검술 시범을 보여달라는 거야…….’

제1 기사단에 이어 방문한 나머지 기사단에서도 눈을 빛내며 검술 시범을 요청하는 바람에 나는 민망한 기초 베기를 3번이나 더 선보여야 했다.

그때마다 유피테르는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며 온 힘을 다해 빛을 뿜어댔다. 하지만 기사들의 눈이 꼼꼼하게 내 행동을 쫓고 있었던 걸 보면 그다지 효과는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수치스럽다. 지구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져 발을 동동 굴렀다. 나를 바라보던 기사들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수치심이 증폭됐다. 하지만 민망함을 떨치고자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검술 시범을 보이느라 힘이 쭉 빠져버린 두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보면 대단한 검술이라도 펼친 줄 알겠네.’

겨우 기초 베기를 했을 뿐인데, 이 쓰레기 몸은 목숨을 건 치열한 대련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으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브. 아파?”

그때 침대 옆에서 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힘겹게 고개만 돌려 침대를 붙잡고 서 있는 로이를 바라보았다.

“언제 왔어?”

“이브가 트롤처럼 어기적거리면서 방에 들어올 때부터.”

“……트롤이라니. 너무하네.”

나는 리안트로 숲에서 상대했던 트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조금, 아니, 많이 어기적대며 걸어왔기로서니 트롤과 비교를 하다니!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로이가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브. 정말 아파?”

로이의 어린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응. 아파.”

그런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려는 순간. 로이가 울상을 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브 아파! 아프면 안 돼!”

나는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간 로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였다.

‘내가 아프다는데 왜 도망을 치는 거야?’

그렇게 뛰쳐나간 로이는 나의 황당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브!”

하지만 이번에는 로이 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이브리아가 아프다니!”

로이의 옆에는 놀란 얼굴로 씩씩대고 있는 해리가 함께 있었다.

‘……해리를 데리러 간 거였어?’

내가 어이없어 로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길길이 날뛰던 해리가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브리아! 어디가 아파? 응?”

“그래, 이브! 어디가 아픈데?”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악마와 드래곤의 눈을 보고 있으니 나의 상황을 설명하기가 심히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과 달리 연약한 인간인 나는 고작 검을 몇 번 휘두른 것으로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 고작 그 근육통에 놀라서 너희 둘이 펄쩍 뛰며 내게 달려왔다는 이야기는 또 어떻게 하고.

“……많이 아픈 거야?”

“그러면 안 돼!”

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해리와 로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이상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입을 떼 작게 속삭였다.

“……통이요.”

“뭐?”

“근육통이라고요.”

“뭐라고? 근육통이라고! 큰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펄쩍 뛰어올랐던 해리가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육통이라고?”

“네. 근육통이요.”

해리의 얼굴이 여전히 멍했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기사단을 돌면서 검술 시범을 보여줬거든요. 평소에 안 움직이던 근육을 써서 그런지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파요.”

“……네가 무슨 검술 시범을 보여줘?”

내 검술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해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더욱 민망해져서 크게 헛기침했다.

“아니, 그, 라이오넬 경한테 배웠던 기초 베기를 보여줬어요.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것 뿐이니까.”

내 말에 해리가 좌우로 눈을 굴렸다.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도로록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내가 아는 기초 베기?”

“네. 해리가 아는 그 기초 베기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계속 물어서 날 더 민망하게 만들어야겠어요? 나도 고작 그거 했다고 근육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내 몸이 믿기지 않거든요.”

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해리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로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브. 아픈 거 아니었어?”

“아픈 거 맞는데, 심각한 건 아냐. 그냥 움직이는 게 조금 불편한 정도? 며칠 지나면 깨끗하게 나을 거야.”

그동안 트롤처럼-로이의 표현을 따르자면- 어기적대며 걷게 되겠지만 말이다. 내 확답에 로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이브는 오래오래 살아야 돼.”

‘이건 꼭 손자들이 할머니에게 하는 명절 인사 같은데.’

이 나이에 오래오래 살라는 인사를 듣다니. 어쩐지 폭삭 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의사가 아니라 해리를 불러왔어?”

“무슨 일이든 해리가 전부 해결해 줄 테니까. 해리는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로이의 아빠야. 아빠는 못하는 게 없어.”

로이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도 짜증나는 할아버지를 혼쭐내줬잖아. 어울리지도 않은 왕관을 쓰고 있던 그 할아버지 말이야.”

해리가 왕성에서 국왕을 혼쭐냈던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라니.’

국왕이 장성한 두 아들을 두고 있긴 하지만, 아직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아마 국왕이 이 소리를 직접 들었다면 분노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을 것이다. 국왕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고 있는 내게 해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근육 풀어줄까?”

“어떻게요?”

“뭉친 근육을 마사지해주면 훨씬 움직이기 편할 거야. 다음날도 고생하지 않고.”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악마는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당연히 근육통에 시달릴 리가 없고, 근육통에 좋은 마사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짐작이 틀린 모양이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만큼 더 열심히 몸을 굴리니까. 근육통에 시달리는 일도 당연히 있다고.”

해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 팔을 가볍게 누르며 문질렀다.

“으악!”

아주 살짝 눌렀을 뿐인데도 요란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아프잖아요!”

“이브 아프게 하지 마!”

나와 로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자 그가 쩔쩔매며 내 팔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파? 그런데 이 정도로는 풀어줘야 다음 날이 편해.”

“그건 그렇겠지만…….”

지금의 고통을 감수하고 내일이 편안해지느냐, 지금 고통을 피하고 내일 고생하느냐. 내 성격을 생각하면 더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내일의 편안함을 위해 오늘의 고생을 감수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래의 호의호식을 위해서 지금 성검의 주인이니, 대마법사의 주인이니 하며 고생하고 있지.’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비장한 얼굴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하세요! 내가 비명을 질러도 절대 멈추지 말고 계속 문질러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되게 분위기가 이상해지거든…….”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내게 손을 뻗었고, 그날 내 방에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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