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2/156)

* * *

아치볼드와 약속한 다음 날이 밝았다.

나는 드레스 대신 에렐에서 검을 배울 때-결국 검을 배우는 건 실패했지만- 입었던 승마복을 입고 잘 보이는 허리춤에 유피테르를 찼다. 기사라면 누구나 성검을 궁금해 할 테니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유피테르를 차면 호기심과 호감을 불러올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는 게 좋으니까.’

머리까지 하나로 질끈 묶고 나온 나를 보며 아치볼드는 의외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내 누이가 이런 복장도 해?”

“그럼 제가 드래곤을 때려잡을 때도 드레스를 입고 있었을까요?”

“그건 또 그렇네.”

아치볼드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전부 포션인가?”

아치볼드가 내가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가며 물었다. 커다란 천이 덮여 있어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치볼드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음. 꽤 무거운 걸 보니 포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구나.”

“네. 아무래도 빈손으로 가는 건 민망해서요. 주방에 부탁해서 훈련하는 기사들에게 나눠 줄 간식거리도 좀 챙겼어요.”

“녀석들이 크게 환영하겠네. 훈련할 때는 다들 돌도 씹어 먹을 기세거든.”

아치볼드가 어깨를 으쓱하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먼저 동쪽으로 가자. 제1기사단부터.”

“서리기사단의 본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죠?”

“응. 오베론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이 모인 곳이지. 서리기사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

외부에서 오베론의 서리기사단이라고 부르는 곳도 바로 제1기사단이었다. 연무장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우렁찬 기합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연무장의 풍경은 대단했다. 검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모든 기사들의 움직임이 비범해 보였다.

[전체적인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과연 오베론의 서리기사단이군요.]

유피테르도 이렇게 감탄하는 것을 보면 내 눈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단장.”

내가 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사이, 아치볼드는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던 중년의 남자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우렁찬 기합 소리를 뚫고 전해지기에는 작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단장은 단번에 고개를 들어 아치볼드를 바라보았다.

“아치볼드 님.”

단장이 기사의 곁을 떠나 아치볼드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훈련을 지켜보려고 나오셨습니까?”

“네. 그런데 오늘은 나 말고 내 동생이 궁금하대서 왔습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죠, 발더스 경?”

아치볼드의 말에 단장의 시선이 그 옆에 선 나를 향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허둥대며 고개를 숙였다.

“이브리아 님. 제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라 잠시 못 알아 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베론 저택에서 이브리아는 늘 완벽한 화장에 갖춰진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화장도 하지 않고 승마복을 입은 채 머리도 대충 묶어 올렸으니 눈썰미 없는 기사가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내가 많이 바뀐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웃으며 아치볼드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가리켰다.

“기사들을 격려할 겸 간식을 가져왔는데. 잠시 휴식하면서 먹으라고 해도 될까요?”

“간식을요?”

발더스가 의외라는 듯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으로 나는 예전의 이브리아에게 이런 센스가 전혀 없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간식과 휴식이라면 마다할 녀석들이 아니지요. 다들 기뻐할 겁니다.”

발더스가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에게 휴식을 허락했다.

‘그럼 난 간식을 나눠줄까.’

바구니의 천을 걷은 뒤 간식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기사들이 내 주변에 우르르 몰려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간식이 그렇게 먹고 싶었나?’

나는 서둘러 기사들에게 간식을 나눠주었다. 훈련 중인 기사들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도록 주방에 특별히 부탁해 만든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기사들은 내게 간식을 받아간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내 주변에 모여 있었다. 간식으로 나눠준 샌드위치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혹시 맛이 없나요?”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을 쓰겠다고 했지만,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오히려 삐끗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걱정스러운 내 질문에 기사들이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그렇게 외친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엄청난 속도로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그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 번에 입속으로 욱여넣은 기사도 있었다.

‘저건 거의 묘기 아닌가.’

“와. 정말 잘 먹네요.”

내가 감탄하여 그 기사를 바라보자 주변의 기사들이 말없이 그를 흘겨보았다. 어디선가 작은 소리로 ‘나도 저렇게 한 번에 먹어버릴걸!’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나는 바구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성인의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병이었다. 실제 판매될 포션은 이보다 훨씬 큰 병으로 제작하여 유통할 생각이었다.

“기사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오셨습니까?”

내가 포션을 꺼내는 모습을 보며 발더스 단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막 엄청난 속도로 간식을 먹어 치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물을 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은 없지.’

나는 설렘 가득한 기사들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이건 제가 에렐에서 지내며 만든 포션이에요. 신전에서 만든 것보다는 못하지만 외상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답니다.”

나는 말하는 동안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가 만든 포션의 효과를 보여주기에 적당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기사들을 둘러보니 마침 적당한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팔에 피가 묻어 나온 붕대를 감고 있는 기사였다.

“경. 잠시 앞으로 나와주겠어요?”

“저 말입니까?”

“네. 경이요.”

지목을 받은 기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상처를 좀 살펴볼게요.”

“예? 이브리아 님께서요?”

내 말에 기사들이 경악했다. 그 와중에 ‘저렇게 다친 게 나여야 했는데!’ 하는 중얼거림도 섞여 있었다.

“아가씨께서 이런 상처를 보시다니요. 좋은 풍경이 아닐 겁니다.”

“내 소문 못 들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보다 더한 것도 많이 봤어요.”

“하지만…….”

다친 기사가 당장에라도 팔을 뺄 기세여서, 나는 재빨리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손이 제 어깨에 닿자마자 몸을 빼려던 기사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제대로 제압했군.’

나는 기사의 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고 그의 상처를 살폈다. 깊고 긴 자상이었다.

“훈련하다가 다친 건가요?”

“예. 대련 중에 잠시 딴 생각을 했더니…….”

얼굴이 살짝 붉어진 기사가 자신의 상처에 대한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상처가 생긴 이유는 결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며, 앞으로는 대련에 집중하여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반성도 이어졌다.

나는 기사가 열심히 변명과 반성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상처에 포션을 전부 쏟아부었다. 반짝이는 은빛 별가루가 떠다니는 붉은 액체가 순식간에 기사의 상처로 스며들었다. 로이가 제 몸을 희생해 실험했을 때처럼 기사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팔뚝에 길게 베인 커다란 상처였는데도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어?”

서서히 상처의 고통이 사라지는 걸 느꼈는지, 상처가 생긴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던 기사가 입을 떡 벌렸다.

“상처가…….”

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상처가 있던 자리를 더듬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도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아치볼드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어제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 역시 포션의 효과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성공적이군.’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기사들에게 준비해 온 포션을 나눠주었다.

“다들 하나씩 가져가세요. 곧 판매를 시작할 포션인데, 오늘은 무료로 나눠줄게요.”

내 말에 기사들이 간식을 받을 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에서 효과를 직접 보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혹시 포션이 더 필요하다면 에렐로 주문을 넣어요. 우리 서리기사단에겐 특별히 저렴하게 판매할 테니까요.”

기사들뿐만 아니라 오베론 가문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도 일반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제공할 생각이었다.

‘일종의 임직원 할인이지.’

나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을 바라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볼일은 모두 마쳤으니 이제 제2 기사단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그 뒤에도 제3, 제4 기사단을 만나야 했다.

“훈련 중에 시간을 내주어서 고마워요. 난 이제 그만 떠날게요.”

하지만 기사들은 내게 배웅 인사를 하는 대신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이브리아 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기사들을 대신해 발더스 단장이 나섰다.

“혹 기사들에게 검술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모두 성검의 주인께서 어떤 검술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발더스 단장이 주먹을 쥔 손으로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기사에게 존중을 담아 보내는 인사였다. 단장이 내게 그런 인사를 했다는 건, 그가 나를 한 사람의 기사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거 엄청나게 찔리는데.’

성검을 뽑기만 했을 뿐, 기사로서의 능력은 쩜오보다 못한 내가 받을 인사는 아니었다. 난처해져 기사들을 둘러보니 그들 역시 내게 발더스 단장과 같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절대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유피테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피테르. 나한테 빙의할 수는 없어요? 내 안에 들어와서 유피테르가 막 화려하게 검을 휘두르면 안 되나?]

‘소설에서 보면 그런 일도 많이 일어나던데.’

하지만 유피테르의 답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주인님. 저는 마검이 아닙니다. 선량한 성검이지요.]

[그럼 마검이라면 빙의도 가능하다는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주인의 몸을 통제하는 마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안타깝네요. 지금 유피테르가 그런 마검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주인님…….]

제법 진심이 담긴 한탄에 유피테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한테는 유피테르가 최고의 검이에요.]

[이미 본심을 다 들키셨습니다. 늦으셨어요.]

유피테르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빛으로 기사들의 시선을 교란시키는 건 어떨까요?]

[시선을요?]

[예. 주인님께서 검을 휘두르실 때마다 빛을 뿜어내서 제대로 못 보게 만드는 거지요.]

[기사들은 시력이 남다르잖아요. 고작 빛으로 눈이 흐려지진 않을 것 같은데요.]

나의 걱정에 유피테르가 간단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만큼 더 강한 빛을 내면 되지요.]

[……그런가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뿜어내는 빛은 최고니까요.]

유피테르가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네. 그럼 간단하게 시범을 보일까요.”

나는 기사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등을 떠밀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유피테르를 뽑아 들었다. 말로만 들었던 성검의 등장에 기사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잔뜩 기대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검에는 젬병인 내가 시범을 보이다니.’

나는 오래전 라이오넬에게 기초 검술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자리를 잡았다. 그때 라이오넬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고작 기초 베기 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분명 5살 때 그 베기를 모두 마스터했겠지.’

하지만 그게 내가 알고 있는 검술의 전부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사인은 분명 수치사일거야.’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검을 들었다.

“그럼…… 할게요…….”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나는 유피테르를 번쩍 들어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그어 내렸다. 검은 형편없이 비틀거리며 어설프게 허공을 갈랐다.

피슈웅-하고, 검이 맥없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저만 믿으십시오, 주인님!]

엄청나게 강한 빛이 번쩍하며 연무장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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