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1/156)

* * *

나는 공작과 아치볼드의 오해를 깨끗하게 풀어준 뒤 로이를 찾아 나섰다. 다시 한번 그의 입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수도는 아주 컸다. 그만큼 눈과 귀가 많은 건 당연했다. 덕분에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도 훨씬 빨랐다. 에렐에서는 오베론 가문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수도는 여러 가문과 왕실의 힘이 모두 작용하는 곳이었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쉽게 잠재우기 힘들었다. 그러니 더욱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무사히 건국제를 보내고 문제 없이 에렐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지 않아도 국왕이 예민하게 털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그가 더욱 나를 경계하며 귀찮게 할 요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로이를 따끔하게 훈육해야겠어.’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로이의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야단을 맞고 있었다.

“야. 너 왜 이브리아를 곤란하게 하는 거야? 어?”

국왕을 상대할 때처럼 불량한 모습의 해리가 로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오히려 해리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역시 바보잖아. 내가 도와준 거라는 걸 왜 몰라?”

“뭐? 네가 돕긴 뭘 도왔는데?”

해리가 황당하다는 듯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이가 더욱 한심한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브의 아빠가 널 싫어했잖아. 넌 멍청하게 아무 말도 못 했고. 그래서 내가 나선 거라고.”

“어어…….”

공작의 매서운 눈초리에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버벅댔던 자신을 떠올렸는지 해리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로이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이래서야 언제 이브와 아이를 만들겠어?”

“그건…….”

분명 시작은 해리가 로이를 혼내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는 로이가 해리를 향해 역정을 내고, 해리가 죄인처럼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내 동생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더 빠르겠어.”

“뭐?”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슬픈 양처럼 우울하던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한 야수처럼 변했다. 해리가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로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직 어린 로이의 몸이 가볍게 달랑 들려 두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헛소리 하지 마. 이브리아랑 아이를 만드는 건 나야!”

“그러니까 제대로 하라고. 빨리 동생 만들어 줘!”

나는 악마와 드래곤의 유치한 대화를 지켜보며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당사자는 난데. 왜 날 두고 자기들끼리 난리야.’

“그런 이야길 할 거면 내 의사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목소리에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악마와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이브리아!”

“이브!”

일부러 순순히 잡혀 있어 주었던 건지, 로이가 해리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바닥으로 내려와 내 품으로 달려왔다. 나는 이제 제법 무거워진 로이의 무게에 휘청거리며 그를 안아 들었다.

“로이. 지금 이 대화가 도대체 뭔지 말해줄래?”

나는 로이의 이마에 가볍게 내 이마를 부딪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해리의 사나운 기세에도 당당하던 로이가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우물거렸다.

“해리가 이브랑 아이를 만들 거랬어.”

“그랬어?”

나는 고개를 돌려 해리를 흘겨보았다.

[애한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예요?]

해리가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지 내 눈을 슬쩍 피하면서도 항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애라고 할 것도 없어. 쟤는 알 거 다 안다니까?]

[알 거 다 아는 사람한테도 그런 소리는 하는 거 아니거든요? 우리가 언제 잘 건지, 어떻게 잤는지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닐 거예요?]

내 질문에 해리가 생각지도 못한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뭐야. 이걸 왜 고민해.’

내 미간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해리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돼?]

[그 말은, 진짜 다 떠들고 다니겠다고요?]

[응.]

해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된다고 했다가는 정말 동네방네 우리의 하룻밤을 떠들고 다닐 기세였다.

[미쳤어요? 절대 안 되죠!]

[하지만 난 자랑하고 싶은데. 내가 진짜 네 거라고, 진짜 네 거가 됐다고.]

가만히 듣고 보니 해리의 자랑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음……. 그럴 땐 보통 내가 해리 거가 됐다는 걸 자랑하지 않나요?]

그래서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도 낭만적인 고백이랍시고 이런 대사를 하지 않나.

여주인공, 내 여자가 되어줘.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뒤에는 이렇게 말하지.

여주인공, 이제 넌 내 여자야.

그런데 해리가 하고 싶다는 말은 완전히 반대였다.

[하지만 넌 내 것이 될 수 없잖아. 네 세상은 아주 넓으니까. 널 원하는 사람도 아주 많고, 넌 그 사람들을 외면하지도 못하지.]

해리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난 네 것이 될 수 있어. 내 세상은 너 하나뿐이거든. 날 원하는 사람은 아주 많지만, 난 그 사람들을 간단하게 외면할 수 있어.]

해리는 무덤덤했지만, 나는 그 말을 하는 해리가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처럼 보였다. 별것도 아닌 내 한 줄기 애정에 마음을 활짝 열고 내 것이 되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이유도 그가 외로워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브.”

로이가 해리와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내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지금 해리랑 아이 만들 거야? 자리 비켜줄까?”

“뭐?”

나는 로이의 이마에 강하게 내 이마를 부딪으며 그를 질책했다.

“앞으로 그런 말 하는 건 금지야, 로이. 오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하지만 난 동생이 갖고 싶어.”

“내가 곤란해지는 것보다 네가 동생이 갖고 싶은 게 더 중요한 문제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로이가 금세 침울해져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나도 엄마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

“그래. 그래야 착한 로이지.”

“응. 나는 착한 로이예요.”

로이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높임말을 하며 아양을 부렸다. 그게 그리 얄밉지 않았다. 나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로이의 등을 토닥이며 해리에게도 경고를 잊지 않았다.

“떠들고 다니는 건 안 돼요.”

“하지만…….”

해리의 얼굴이 실망으로 시무룩해졌다. 그런 해리를 달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해리. 그런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인 게 좋잖아요.”

“어…… 우리 둘만의 비밀…….”

해리가 내 말을 따라하며 나사 풀린 사람처럼 웃었다. 둘만의 비밀이라는 말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해리가 내 거라는 건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내 말에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내가 내 주인님 거라고 자랑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다들 어떻게 그걸 알아?”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는데 모르는 사람이 바보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간들은 참 눈치가 빠르네. 다시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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