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9/156)

* * *

수도로 떠날 일행은 빠르게 꾸려졌다. 나는 생일 파티를 위해 수도로 떠났던 그때처럼 최대한 간소하게 일행을 꾸리고 싶었지만, 인세티아 남작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며 반대했다. 인세티아 남작은 암살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누구를 왕으로 결정하든 반대쪽의 위협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걱정이 기우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내 주위에 강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 자라면 쉽게 암살을 계획할 수 없을 것이다.

아스페리츠나 로이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게 성검과 대마법사가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대단한 존재의 비호를 받고 있는 자를 암살하려는 건 자살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랜 입씨름 끝에 결국 내가 패배하고 말았다. 나뿐만 아니라 두 왕자도 함께 수도로 떠나는데, 그 일행이 빈약했다가는 에렐의 왕족 대접이 변변찮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남작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내가 노예 왕자들을 잘 챙겨준 건 아니지만…….’

겉치레를 잘해서 호의를 포장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 결과 인원이 불어나고 또 불어나기를 반복해 대규모의 일행이 완성되었다.

나와 해리,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로이와 아스페리츠, 스승을 따라나선 이카난과 라이오넬을 비롯한 용기사단원들,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두 왕자와 메이슨까지. 거기에다 그들을 모실 사용인들까지 추가되어 모두가 떠날 준비로 분주했다.

나 역시 수도로 가지고 갈 물품들을 선별하느라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개인 물품은 모두 엠마가 꾸려주겠지만, 수도로 가져가 판매할 물품들이 문제였다.

‘이왕 수도에 가게 되었으니 우리 물건들을 제대로 홍보하고 와야지.’

이번의 주력 물품은 당연히 새로 개발한 포션이었다. 신전 포션보다 효과는 약하지만, 그보다 훨씬 저렴해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하게 와닿는 요소가 있으면 좋겠는데.’

신전 포션과 에렐 포션은 생김이 유사하다. 얼핏 보면 구분이 되지 않으니 효과가 덜한 우리 쪽의 포션이 신전 포션의 모조품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모조품이 맞긴 하지.’

하지만 사실이 어떻든 포장이 중요한 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확실히 차별되는 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우리 포션이 돋보이는 차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참이나 붉은 포션을 바라보고 있으니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유피테르를 꺼내 손에 쥐었다.

[제가 필요해지셨습니까, 주인님?]

“네. 우리 그거 써요.”

나는 씩 웃으며 유피테르의 쓸모없는 기능 중 하나를 떠올렸다. 후광을 쏟아 내는 것처럼 겉멋만 잔뜩 들었다고 생각해 머리 한구석에 밀어 놓은 기능이었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가루를 만드는 능력!”

오랫동안 신전에서 포션 제작을 주도해 온 탓에 사람들에게 포션은 곧 신성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신성함. 에렐에서 만든 포션에는 그런 요소가 부족했다. 하지만 에렐의 포션에 별처럼 반짝이는 가루가 들어 있다면 어떨까.

‘어떻긴 어떻겠어. 엄청나게 신성해 보이겠지.’

“이 포션에 별가루가 떠다니게 할 거예요.”

[그 포션 안이요?]

내 말에 유피테르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능력은 주인님의 등장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인데요.]

“난 지금도 이미 화려해요. 어디에 등장하든 다 나만 볼 텐데, 여기서 더 화려해져서 어쩌자는 거예요.”

나는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내는 게 호의호식하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성검과 대마법사의 주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게 된 순간부터 그 지름길은 걸을 수 없게 됐다.

‘너무 화려한 꽃길이야. 아주 그냥 각종 꽃이 다 피었어. 종류를 셀 수도 없어.’

나는 내 길에 자라고 있는 꽃들을 하나씩 헤아리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내 길에 새로운 꽃은 금지야. 내 꽃밭은 이미 충분하다고.’

그러나 유피테르는 여전히 아쉬운 눈치였다.

[언젠가 이 유피테르, 주인님께서 등장하실 때 후광과 별가루를 동시에 뿌리는 역할을 할 것이란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그 꿈은 버려요.”

나는 싱긋 웃으며 유피테르를 꽉 쥐었다.

“별가루는 내가 아니라 포션에 뿌리는 걸로 합시다, 우리.”

[……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따를 뿐입니다.]

유피테르가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체에서 빛을 뿜어냈다.

뿜어져 나온 빛이 포션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포션에는 반짝이는 은빛의 가루가 떠다니고 있었다.

‘와. 예쁘다.’

하늘의 은하수를 포션으로 옮겨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엄청나게 신성하게 보여.’

드래곤이 안전을 보증하고 성검의 축복으로 완성된 포션.

‘이건 팔린다!’

좋은 예감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 * *

수도로 떠날 준비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와이번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다 보니 마차로 긴 시간을 이동할 때와 비교해 준비가 간소한 편이었다.

“다녀올게요. 업무량이 많아 혼자서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잘할 거라고 믿어요.”

내 말에 일행을 배웅하러 나온 인세티아 남작이 아쉽다는 듯 노예 왕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이젠 저 혼자네요. 그간 왕자님들께서 함께 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세티아 남작의 인사에 리던과 카시안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역시 좋은 공부가 되었다고 인사치레를 해야 할 순서였지만,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니 차마 빈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볼 일이 있을 거다. 회원권을 샀으니 온천을 즐기러 와야겠지.”

리던의 말에 남작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게 인사를 마무리하고 우리 일행은 곧장 왕성이 있는 수도로 향했다. 와이번들이 열심히 날갯짓해 우리를 순식간에 수도로 옮겨주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베론 저택이 아닌 왕성이었다. 국왕의 부름을 받고 왔으니, 가장 먼저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도착이군.”

노예 왕자들은 처음 에렐에 왔을 때와 달리 여유로운 태도로 와이번 등에서 내려왔다.

‘이제 너희 집에 왔다 이거지.’

왕성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왕자들의 홈그라운드였다. 당연히 모든 것이 유리하고 편리할 것이다. 리던과 카시안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도착 장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시종들이 그들 곁에 몰려들었다.

‘왕자님은 왕자님이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귀한 취급을 받고 있는 리던과 카시안을 보고 있으니 새삼 그들의 신분이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노예들이었는데 말이야.’

서류의 산에 파묻혀 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시안!”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누구든 이 목소리에 홀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두 왕자를 챙기느라 정신없던 시녀와 시종들까지 그 목소리에 홀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캐서린이네.’

나는 이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심드렁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대로 캐서린이 예쁜 분홍빛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캐서린이 그대로 사람들을 지나쳐 카시안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카시안은 그런 캐서린을 껴안으며 훌쩍이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캐서린.”

아름다운 연인의 재회에 몰려든 사람들이 감동한 듯 눈을 빛냈다.

‘누가 태양신이 쓴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 아니랄까 봐.’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차며 그 닭살스러운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카시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캐서린이 흠칫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이브리아 양도 함께…….”

덜덜 떨고 있는 캐서린은 언제나 그랬듯 가련해 보였다. 겁에 질린 캐서린의 감정에 동요된 것인지 나를 향한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공기를 부숴준 건 의외로 카시안이었다.

“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공녀는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네?”

카시안이 나를 두둔하고 나설 줄은 몰랐는지 캐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베론의 레이디에게는 이미 다른 연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당신의 자리를 탐내지 않아요.”

“다른 연인이라니…….”

캐서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자, 내 옆에 서 있던 해리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해리와 눈이 마주친 것인지 캐서린이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저 사람은…….”

캐서린과 해리는 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뇌리에 남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캐서린은 그날 만난 해리를 잊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해리 얼굴은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얼굴이지.’

엄청나게 잘 생겼으니까. 나는 어쩐지 뿌듯해져 해리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저 여자, 시장에서 만났던 그 여자 맞지? 역겨운 냄새가 났었는데.”

“해리는 나 말고 다른 인간은 전부 역겹다면서요.”

“저 여자는 특히 더 그랬어. 속이 울렁거리고 짜증이 나더라니까?”

나는 픽 웃으며 열심히 내 기분을 맞춰주는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는 캐서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상황이 이런지라, 왕세자 전하의 말씀처럼 더 이상 캐서린 양을 괴롭힐 이유가 없네요. 부디 마음 놓고 행복하게 연애하세요.”

“……축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브리아 양.”

캐서린이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붙잡아 무릎을 살짝 굽히는 순간 또 다른 손님이 들이닥쳤다. 엘을 선두로 한 왕립기사단이었다.

“왕립기사단이 성검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단정하고 각 잡힌 정복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왕자인 리던과 카시안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수도에 계시는 동안 저희 왕립기사단이 성검의 주인을 지키겠습니다.”

“왕립기사단은 국왕 폐하를 지키셔야죠.”

“왕립기사단은 본디 ‘성검의 주인이신’ 국왕 폐하를 지키는 집단입니다. 그간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국왕 폐하를 지켰으나, 우선순위는 엄연히 성검의 주인입니다.”

엘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단호함이 가득했다.

“에렐까지 따라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주인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왕성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인께서 오셨으니 곁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원칙은 그렇겠죠. 하지만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걸요. 전 폐하와 척지기 싫어요.”

높은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면 인생이 고달파진다. 내가 성검을 뽑아 그의 후계자를 선택하게 된 시점에서 이미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국왕의 수호대까지 뺏어가며 더 적극적으로 사이를 비틀 필요는 없었다.

“이미 폐하께 저희의 뜻을 전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원칙에 따라 움직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은, 폐하께서 날 지키라고 허락하셨다고요?”

나는 믿을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왕립기사단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고 수호하는 중요한 조직이었다. 그 조직을 이렇게 쉽게 넘기는 건 이상했다.

“단장의 말이 옳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어.”

그때 내 의문을 해결해 줄 장본인이 자리에 나타났다. 제레인트의 국왕이었다.

“폐하!”

사방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재빨리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됐다. 고개를 들어라.”

국왕은 익숙하게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뒤 내 앞에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내게 무릎 꿇고 있는 왕립기사단을 잠시 향했다가, 곧 내게로 돌아왔다.

“왕의 후계를 선택하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지. 위험과 어려움이 많을 것이야.”

나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빛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꼭 내가 위험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눈빛이네.’

하지만 노골적인 그 눈빛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새 인자한 왕의 눈빛으로 가장한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내가 그리하라고 했네. 그러니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왕립기사단의 호위를 허락하고. 내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주연은 국왕. 조연은 나.’

국왕은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야.”

눈앞에서 제 주인이 조연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해리가 발끈해서 앞으로 나섰다.

“손 치워. 어디에다 손을 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건방지게.”

해리가 내 어깨를 붙잡은 국왕의 손을 툭 쳐냈다. 아주 가벼운 손짓에도 국왕은 맥없이 밀려났다.

“물론 허락을 구했어도 허락하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야.”

‘아니. 내 어깨를 가지고 왜 네가 허락을 한다 만다야?’

나는 황당한 눈으로 해리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나 역시 국왕이 허락을 구했더라도 ‘아이고, 영광입니다! 그러십시오!’라고 말하며 어깨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으니, 굳이 해리를 타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실례를 했군.”

국왕이 찡그린 얼굴로 밀려난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강한 힘이 가해진 것 같았다. 막돼먹은 취급에 국왕의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국왕은 이번에도 재빨리 자신의 분노를 속으로 갈무리했다.

‘역시 한 나라의 왕이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지.’

내가 빠른 감정 수습에 감탄하고 있으니 국왕이 해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문은 들었네. 그대가 푸른 대마법사의 후손이라지. 홀연히 사라진 대마법사의 후손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네.”

해리는 악수를 청하는 국왕의 손을 싸늘하게 내려보다가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대마법사의 후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따위 태도인가? 너희 시조가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를 어떻게 대접했는지 모르나 봐?”

제레인트의 시조는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를 극진히 대접했다고 전해진다. 대마법사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를 존중하는 시조라며 칭송받고 있지.’

“시조께서는 대마법사를 존중했지. 나 역시 그대를 존중하네.”

하지만 해리의 말에 따르면, 제레인트의 시조가 대마법사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인 건 제 부하를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대마법사의 힘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존중?”

해리가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나는 제레인트의 핏줄에 존중을 바라지 않아. 애초에 당신이 보이는 것도 존중은 아니겠지만.”

해리가 한 발짝 걸음을 옮겨 국왕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그가 손을 뻗어 국왕의 어깨에 손을 얹자, 국왕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재빨리 검을 뽑았다. 분명 검이 뽑히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해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제레인트의 핏줄에게 바라는 건 내 주인에게 알아서 기라는 것뿐이야. 날 우습게 보는 건 참아도, 내 주인을 그렇게 보면 곤란해.”

정돈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협박에 국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평생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며 살아온 그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일 터.

“귀찮으니까 우리 주인님을 거슬리게 하는 놈들 전부 데리고 꺼져. 저 왕자들, 이 기사들, 그리고 저 역겨운 여자까지 전부다.”

해리의 시선이 리던과 카시안, 엘을 비롯한 왕립기사단원, 캐서린을 차례로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캐서린이 덜덜 떨며 카시안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모든 사람을 차례로 쳐다본 해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국왕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제일 짜증나는 너도 같이 꺼지면 되겠다. 간단하지?”

국왕은 더 이상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오랜 세월 왕좌에 앉아 갈고 닦은 감정조절도 이렇게 막무가내식 협박에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푸른 불꽃의 마법사들은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나?”

“왜? 너희 시조가 그렇게 말했어? 와. 그놈 진짜 골 때리네. 거짓말이 아주 자연스러워.”

해리가 혀를 끌끌 차며 국왕의 어깨를 툭 밀어냈다.

“계속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빨리 꺼져.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나도 모르게 성을 날려버릴지도 모르잖아?”

해리가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국왕의 얼굴에 대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한 나라의 국왕을 개무시하는 해리의 태도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개무시를 한 존재가 건국왕을 도운 강력한 대마법사의 후손이라 누구 하나 태도를 지적할 수가 없었다. 개무시를 당한 국왕도, 그런 그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사람들이 미친개를 키우는지 알겠어.’

내가 나서서 판을 엎기 곤란할 때 미친개가 대신 판을 엎어 주니 속이 아주 시원했다.

“……다들 돌아가자.”

결국 국왕이 이를 바드득 갈며 돌아섰다. 국왕의 뒷모습을 보며 해리가 활짝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했지? 내가 쫓아냈어! 칭찬해줘!

온몸으로 그런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픽 웃으며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리의 얼굴이 금세 기분 좋게 풀어졌다.

“……좋아. 이대로 가는 거야.”

그런 우리를 보며 로이가 진지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