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선택
“왕성에서 편지가 왔어요.”
나는 두 노예 왕자를 바라보며 국왕으로부터 온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폐하의 인장이로군.”
봉투에 찍힌 국왕의 문장을 알아본 리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기에 국왕으로부터 편지가 올 이유가 하나뿐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선택해야 하는 거지?”
국왕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를.
두 왕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하지만 처음 에렐에 왔을 때처럼 긴장되고 경쟁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국왕께선 왕도의 군중 앞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발표하길 원하세요.”
“군중 앞에서라면, 건국제의 연설에서?”
“네.”
제레인트의 왕성은 국가의 위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주 거대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작은 건물 하나였다. 그 뒤로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국력에 따라 다른 건물이 들어서며 지금의 왕성이 탄생했다.
매년 건국절, 국왕은 제레인트의 시조가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의 탑에 올라 백성을 향해 연설하는 것이 관례였다. 탑에서의 연설은 초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위한 왕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 중요한 연설을 듣기 위해 수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국왕의 편지에는 자신의 후계자를 그들의 앞에서 발표하길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의도는 뻔했다.
“아버지께선 그대의 명성을 이용하고 싶으신 겁니다.”
카시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리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 왕자들도 같은 생각인 걸 보니 내 짐작이 틀린 건 아니로구나.’
동요 없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발견한 카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군요.”
“뭐, 폐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다 보니 왕국 전역에 내 명성이 높아진 상태였다. 인세티아 남작의 말로는 나를 영웅으로 찬양하는 노래까지 부르고 다닌다니 내 생각보다 소문이 멀리 퍼졌을 것이다.
‘소문에 예민한 왕성에서 그런 이야기를 모를 리 없지.’
국왕은 카시안에게 ‘그런 영웅이 선택한 나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주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이런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성검의 주인을 두고 다른 후계자를 차기 왕으로 세운다는 것에 대한 반발 역시 불식시킬 수 있었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당연한 선택이야.’
“그리고 저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죠.”
“그대에게도?”
카시안과 리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이용하려는 수가 뻔히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나쁘지 않은 이야기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이용당하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아요.”
“당연한 말을.”
“그래도 그렇게 한 번 시원하게 도와주면 그 뒤론 절 귀찮게 안 하실 거 아니에요.”
한 번의 편안함을 위해 평생이 귀찮은 것보다는 평생의 편안함을 위해 한 번의 귀찮음을 감수하는 쪽이 낫다.
‘그 귀찮은 일의 스케일이 상당히 크긴 하지만…….’
“어차피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없지요.”
닫혀 있던 문이 조용히 열리며 메이슨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기분이라도 좋게 가야지요.”
“……너무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거 아닌가요.”
황당해져 메이슨을 바라보니, 그가 이번에는 문을 활짝 열어 안으로 들어오며 안경을 고쳐 썼다.
“괜찮습니다. 전 밖에서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까요. 맥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이야기를 몰래 들었다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시네요.”
“전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들린 것뿐입니다. 엄연히 제가 피해자입니다.”
“갈 길을 가셨다니…… 여긴 막다른 골목에 있는 서재인데요.”
그래서 일부러 두 노예 왕자의 일터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이번에도 메이슨은 당당했다.
“길이 막혀있어서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가 들려왔죠.”
“또 길을 잃었군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선 것뿐입니다.”
“안내자가 나타날 때까지요?”
“네. 세상엔 안내자가 아주 많습니다.”
당당한 길치를 논리로 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하필 그 당당한 길치가 논리로 이길 자가 없는 메이슨이었다.
‘엄청난 조합이군.’
길치 메이슨은 천하무적이었다. 나는 나의 패배를 인정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럼 왕성에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안내자가 없어서였나요?”
제방 건설을 위한 자금 집행이 타당한지 지켜보겠다던 메이슨은 제방 완성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까지도 에렐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이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았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움받을 문제가 없으니 그만 떠나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건 여기에 재밌는 게 많아서죠. 탐구는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니까요.”
“재상께서 이렇게 오래 왕성을 비우셔도 돼요?”
“나 하나 없다고 흔들릴 체계를 만든 기억은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보고를 받고 있고요.”
그러고 보니 왕성의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이 바로 메이슨이었다. 행정관을 양성하고 선발하는 제도 역시 메이슨의 머리에서 나왔다.
‘국왕이 명령을 내린 지 하루 만에 완벽한 개편안을 가져와서 재상으로 고속승진을 했었지.’
“하지만 이제 나도 떠날 때가 왔군요.”
“흥미로운 건 이제 없나 봐요?”
“네. 그리고 이제 안내자가 생겼으니까요.”
수도로 떠나게 될 나와 노예 왕자들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정말로 길잡이가 없어서 수도에 못 돌아간 거 아냐?’
나는 의심에 가득 차 가늘어진 눈으로 메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그간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준 사례입니다.”
메이슨이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하며 품속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받으십시오.”
“이게 뭔데요?”
나는 메이슨이 내미는 노트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보나마나 또 엉뚱한 내용이 담겨 있겠지.’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첫 장을 펼쳤던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에렐의 행정 체계에 대한 설계잖아요?”
“맞습니다. 한동안 여길 둘러봤더니 체계가 완전히 엉망이더군요. 지금은 규모가 작아서 이런 주먹구구식 운영도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힘들어질 겁니다.”
그건 나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력이 없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려 잠시 미뤄둔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없으니까.’
그러나 에렐이 성장하는 속도를 생각하면 곧 문제가 생길 것이다. 메이슨이 준 노트에는 그때를 대비한 새로운 행정 체계가 담겨 있었다. 행정관의 양성과 등용, 교육과 업무체계까지. 짧은 시간 둘러보고 작성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에렐 맞춤형의 행정 체계였다.
‘천재 만세! 역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물고기!’
나는 감격에 차서 메이슨을 바라보았다.
* * *
“기분 나빠.”
로이는 자신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리를 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왜 너랑 있어야 해.”
“이브리아는 바빠. 너 같은 꼬맹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고. 그래서 내가 보모 역할을 자처한 거잖아.”
해리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로이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이브리아가 우리 애가 생기면 어쩔 거냐고 물어봤잖아.’
우리 애라는 말을 되새긴 해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 성가신 꼬맹이를 돌보는 건 그때를 위한 연습이야. 그러니까 참아라, 테오하리스.’
“……기분 나빠. 혼자 얼굴 빨개졌어.”
로이가 코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갈래. 이브가 있는 곳으로.”
“가긴 어딜 가? 넌 나랑…….”
방을 나서려는 로이의 팔을 붙잡은 해리가 곧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브리아를 이브라고 불러?”
“이브가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된대.”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건 당연하지. 내 말은 왜 애칭을 부르냐는 거잖아!”
“이브가 그렇게 부르라고 헸는데?”
“뭐라고?”
“이브가 이브라고 부르라고 했어. 이브를 이브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야? 이브의 멍멍이?”
로이가 일부러 이브의 이름을 강조하며 몇 번이나 해리의 속을 긁었다. 해리가 발끈한 건 당연했다.
“내가 왜 이브리아의 멍멍이야?”
“이브의 눈치를 보면서 어쩔 줄 모르니까. 보통 그런 행동 양식을 보이는 동물은 개라고 부르잖아.”
“흥. 성가신 꼬마. 네가 뭘 모르는구나?”
해리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시선으로 로이를 내려다보았다.
“난 이브리아의 연인이야. 나와 이브리아는 연애 중이라고. 원래 연애하는 사이는 그래.”
“하지만 이브는 너한테 그러지 않던데?”
로이가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 덕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들었던 해리의 턱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그건 내가 이브리아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야.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안달 내는 법이라고.”
해리가 민망한 듯 제 머리를 긁적이며 로이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아무튼 난 지금 연습 중이니까 협조하라고, 성가신 꼬마.”
“무슨 연습?”
“무슨 연습이긴. 당연히 육아 연습이지.”
아래로 내려왔던 해리의 턱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나와 이브리아는 곧 아이를 만들 거거든!”
“아이?”
아이라는 말에 로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내 동생이 생기는 거야?”
“뭐라고? 왜 그게 네 동생이야?”
“이브는 내 엄마니까,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 그건 내 동생이야. 당연한 거잖아.”
로이가 ‘이런 멍청한 어른이 다 있다니!’라고 한탄하며 혀를 끌끌 찼다.
“애초에 이브리아는 네 엄마가 아니거든?”
“아냐. 엄마 맞아.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엄마는 그렇게 정해지는 거 아냐, 이 멍청한 용아.”
“드래곤을 멍청하다고 말하는 너야말로 멍청해.”
“어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그러는 너는 그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상대로 열을 올리고 있어.”
구구절절 맞는 말에 해리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할 말을 잃고 눈을 굴리는 해리를 보며 로이가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튼 난 동생은 찬성이야.”
“흥. 네가 찬성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해리가 로이의 손을 쳐내며 부루퉁하게 대답했지만, 로이는 꿋꿋하게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동생은 언제 태어나?”
“어? 그건 아직 몰라. 아직 아이를 만든 건 아니니까.”
“뭐라고?”
해리의 말에 로이가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만들어주면 안 돼?”
초조한 얼굴로 재촉하는 로이를 보며 해리가 황당해져 헛웃음을 흘렸다.
“야. 넌 왜 이렇게 동생을 원하는데?”
“드래곤은 세상에 몇 없어. 늘 외로워. 하지만 가족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애가 태어나도 걘 드래곤이 아니잖아.”
“그래도 엄마의 아이야. 그럼 내 동생이고. 가족 맞아.”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로이를 바라보며 해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논리면 난 네 아빠인데. 동생의 아빠는 너의 아빠이기도 하잖아?”
해리의 지적에 로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인정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멍청한 아빠는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브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그거 꼭 부모가 자식 결혼시킬 때 하는 말 같은데.”
해리가 떨떠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로이는 그런 해리의 두 손을 붙잡으며 당부했다.
“너의 힘을 믿을게.”
“힘?”
“응. 힘.”
단호하게 대답한 로이의 시선이 해리의 두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좋아. 믿어도 되겠어.”
“뭐, 무, 뭘 믿는데!”
당황해서 소리치는 해리를 향해 로이가 활짝 웃었다.
“힘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