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156)

* * *

“이게 시제품이라고요?”

“예.”

나는 남작이 준비한 포션 시제품을 받아 들고 신전에서 구해 온 포션과 비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른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색이며 향이 완전히 똑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효능이었다.

“효과는 어때요?”

“신전에서 제작한 포션보다는 조금 떨어집니다. 하지만 치유 효과는 확실하지요.”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치료 효과는 있다는 거군요?”

“아무래도 신전 포션은 신성력이 부여된 성물이니까요. 그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지요.”

인세티아 남작이 어깨를 으쓱하고 포션과 함께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자세한 실험 결과는 서류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나는 포션을 내려놓고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는 몇 차례의 동물 실험으로 얻은 결과가 정리되어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칼에 깊게 베인 중상까지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거구나.’

신전 포션처럼 강력한 효과는 아니지만,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일반 포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효과였다.

값비싸지만 강력한 신전 포션과 저렴하지만 겨우 쓸린 상처만 치료할 수 있는 일반 포션. 여태까지는 그 중간이 없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필요한 건 이 중간 단계의 포션이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정도로 강력한 포션은 오히려 효능이 넘친다.

‘우리가 바로 그 중간 단계를 차지하는 거지.’

적당한 가격대로 판매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돈을 벌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음. 그런데 이거, 동물한테만 실험해본 거잖아요. 사람한테도 똑같은 효과가 있을까요?”

동물과 인간은 엄연히 다른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동물에게는 제대로 통했지만, 인간에게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 역시 걱정스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걸 사람에게 실험해볼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인간이 사용했을 때의 효과가 확실하지도 않은 포션을 판매할 수도 없었다.

“이브.”

고민하는 내 옆에서 함께 포션을 지켜보던 로이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도와줄까?”

“어떻게?”

“간단해.”

로이가 활짝 웃으며 테이블 위의 페이퍼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나한테 실험하면 돼.”

“뭐라고?”

내가 놀라서 로이를 만류하기도 전에 페이퍼 나이프가 그의 팔에 박혔다.

“로이!”

내가 로이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가 제 팔에 박혀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뽑았다. 지혈 효과를 하고 있던 페이퍼 나이프가 뽑혀 나가자 막힘 없이 드러난 상처에서 순식간에 피가 솟아났다. 갑작스러운 유혈사태에 나와 인세티아 남작은 허둥대며 로이의 팔을 붙잡았다.

“지, 지혈! 지혈부터 해야겠죠?”

“그렇죠. 지혈부터입니다!”

제일 침착한 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로이였다.

“그럴 필요 없어.”

로이는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포션을 들어 제 상처에 뿌렸다. 피와는 조금 다른 붉은 빛 액체는 빠르게 환부에 스며들었다.

“효과가 좋아.”

로이가 팔을 들어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여주며 천진하게 웃었다. 평화로운 로이의 태도를 보고 있으니 호들갑을 떨어댄 것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크흠.”

인세티아 남작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로이의 팔을 살폈다.

“정말 깨끗하게 나았군요.”

남작의 말대로였다. 로이의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에게 로이의 팔을 보여줬다면, 누구도 그의 팔에 페이퍼 나이프가 꽂혔었단 사실을 모를 것 같았다.

“와. 대단하네요.”

대단하다는 말만 들었지 포션의 효과를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하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이!”

나는 엄한 얼굴로 로이의 이름을 외쳤다.

“그렇게 갑자기 자해를 하면 어떡해!”

나의 외침에 로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해 아냐. 실험이야.”

“자해든 실험이든 전부 문제잖아! 위험할 뻔했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가 반 이상 제 상처에 부어 버린 포션을 바라보았다.

“저건 아직 시제품이라고. 정화하긴 했지만 원료가 웨어울프의 피라 혹시 인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나는 꼼꼼하게 로이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몸에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정화 잘 됐어. 문제없어. 나는 드래곤이지만, 지금 몸은 인간과 똑같아. 확실해.”

로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나는 황당해져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이마를 튕겼다.

“그럼 더 문제네.”

“아파. 이브가 날 때렸어. 난 도와줬는데.”

로이가 가격당한 이마를 쓰다듬으며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였다.

“네 몸은 지금 어린아이잖아. 드래곤으로서의 능력은 있겠지만, 그걸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약에 문제가 있어서 죽어버렸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린아이의 신체는 아주 약하다. 만약 시제품에 동물에겐 반응하지 않고 인간의 몸에만 작용하는 독성이 남아 있었다면, 로이가 제대로 힘을 쓰기 전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브. 난 드래곤이야.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다들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다 죽는 거야. 날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식의 도움은 사양할게.”

매번 이렇게 몸을 던져 나를 도우면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로이는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에 찬 얼굴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말에 반박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로이는 이브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야.”

“그래. 착하다, 로이.”

기특한 대답에 놀란 마음이 겨우 진정됐다. 긴장이 풀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인세티아 남작 역시 긴 한숨을 토해냈다.

“영주님 주위에는 왜 이런 존재들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남작도 그중의 하나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개중에 전 평범한 축이죠.”

인세티아 남작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덕분에 시제품에 문제가 없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됐군요.”

“그렇죠. 드래곤이 보증한 안전성이라니.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걸요.”

“드래곤이 보증한 안전성…….”

내 말을 되새기던 인세티아 남작이 금세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포션의 이름을 드래곤 포션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드래곤이 안전성을 인정한 포션이라는 의미로요. 상당히 좋은 홍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리며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 어느새 장사꾼이 다 됐네요.”

“누구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됐습니다.”

그 ‘누구’가 나라는 건 뻔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뻔히 보이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이야. 그 누구라는 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훌륭한 사람이겠군요. 그리 수완이 좋다니.”

“뭐. 이런 말만 안 하시면 참 훌륭하신 분이죠.”

능청스러운 자화자찬에 걸맞은 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자기 칭찬은 거기까지 하시고, 목욕을 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작이 나와 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이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 때문에 그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나까지 피투성이였다.

“누가 보면 내가 다친 줄 알겠네요.”

“그러니 씻고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나는 반박할 곳 없는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내 뒤를 로이가 졸졸 따라왔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세티아 남작의 손에 저지당했다.

“로이 님은 그쪽이 아닙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로이의 뒷덜미를 잡아 그를 달랑 들어 올렸다.

‘와. 나는 이것보다 더 어린 로이를 안아 드는 것도 버거웠는데.’

괜히 변방을 지키던 영주가 아니었는지, 인세티아 남작은 힘들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원래는 드래곤이지만, 지금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흑룡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원망스러운 눈으로 인세티아 남작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브와 함께 갈 거야.”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목욕은 같이할 수 없습니다.”

로이와 내가 함께 목욕할 수 없다는 건 처음 그를 씻길 때 이미 설득을 해둔 부분이었다. 다행히 로이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더는 나를 따라오겠다며 고집부리지 않았다.

“……목욕은 나빠. 이브와 나를 갈라놓는 나쁜 목욕.”

로이가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 * *

나는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투성이가 된 내 꼴을 보며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기겁하는 바람에 ‘이거 내 피 아니에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

겨우 내 방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은발의 남자. 해리였다.

해리는 고민에 찬 얼굴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몇 번이나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내려놓는 것을 보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화가 풀렸나?’

한동안 해리는 나에게 토라져 날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토라짐의 이유는 당연히 로이였다.

-주인님! 나야, 이 겉과 속이 전부 시커먼 흑룡이야? 지금 당장 선택해!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로이를 보며 씩씩대던 해리가 그런 유치한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런 해리를 달래려고 했었다.

-해리. 로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성체가 되면 제대로 혼자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이 녀석, 지금도 알 거 다 안다니까? 겉모습만 어려 보일 뿐이라고.

-해리. 잊지 않았죠? 로이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됐어요. 10살도 아니고, 1살도 아니고, 생후 10일이라고요.

나는 황당해져 웃음을 흘렸다. 생후 10일 꼬마에게까지 그렇게 날을 세우는 해리를 보니 썩 귀여웠다. 하지만 그 웃음에 해리가 폭발했다.

-주인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보!

해리가 그렇게 외치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뛰쳐나간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보아하니 이제 화는 풀린 모양이고.’

선뜻 문을 열지 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화를 내고 뛰쳐나갔다가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 줘야지.’

“해리. 이제 화 풀렸어요?”

내 목소리에 침울한 얼굴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던 해리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화가 풀리긴! 난 엠마 대신 너한테 온 편지를 전해주러…….”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게 내밀었던 해리가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해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피로 엉망이 된 내 몰골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또 그 변명을 할 시간이군.’

익숙한 반응에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복도를 걸어오며 사용인들에게 수없이 꺼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피…….”

하지만 해리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내 몸을 살피는 게 더 빨랐다.

“다쳤어? 누구야? 무슨 일인데? 왜 나 안 불렀어? 아니, 그전에 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너한테 심어 둔 조각에 문제가 생겼나?”

해리가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를 다쳤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살피는 해리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숨이 평소보다 훨씬 거칠었다.

“해리.”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해리의 두 손을 잡아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나 안 다쳤고, 그러니까 누가 그랬는지 찾을 필요도 없고, 조각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에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내 말에 놀라서 거칠어졌던 해리의 숨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잘 봐요. 그냥 다른 사람 피가 묻은 거예요.”

“……그렇네.”

천천히 나를 살핀 해리가 맥이 빠진 듯 비틀거렸다.

“많이 놀랐어요?”

나는 놀란 해리를 안아주려고 다가섰다가, 피로 엉망이 된 내 꼴을 바라보며 뻗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피로 엉망이라서 안아주는 건 안 되겠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해리가 먼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는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해리. 나 피로 엉망이잖아요.”

“그게 뭐?”

“해리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뭐가 중요한데.”

해리가 칭얼거리며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해리의 깨끗한 옷을 사수하기 위해 버둥거리던 나는 결국 해리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해리가 나빴어요.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그동안 날 찾아오지도 않고.”

내가 해리의 품에 안겨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그의 입에서 나보다 더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넌 왜 나 안 찾아왔는데?”

“로이가 계속 내 옆에 있어서요. 로이가 완전히 자라기까지 한 달 정도는 이런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럼 내가 먼저 찾아가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해리는 그걸 보면서 또 화내고, 나는 달래고 그러겠지.”

내 말에 해리가 나를 살짝 밀어내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한동안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던 로이를 찾는 것 같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로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해리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갖다 버린 거야? 잘 생각했어.”

“어떻게 드래곤을 갖다 버려요?”

나는 들떴던 해리의 얼굴이 금세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우리 해리. 이렇게 질투도 많고 독점욕도 강해서 어떡하죠?”

내 질문에 해리가 내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씩 웃었다.

“어떡하긴. 주인님이 나만 예뻐해 주면 되는 거지. 그럼 난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충성스러운 네 개가 될 텐데.”

“그래요. 착하고 충성스러운 거 좋죠. 다 좋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우리 애가 생겨도 이럴 거예요?”

“……으엉?”

내 질문에 해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껌뻑였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잠시 내 질문을 되새기던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 어, 애? 우리 애?”

“왜요? 그건 생각 안 해봤어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다 보면 애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요.”

내 말에도 해리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아. 혹시 악마랑 인간 사이에서는 애가 안 생겨요? 이종교배, 뭐 이런 거라서?”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인간과 악마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아무리 함께 밤을 보내도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 아냐! 생겨!”

해리가 펄쩍 뛰며 나의 의문을 부정했다.

“너랑 나도 만들 수 있어. 아이.”

그렇게 말하는 해리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요. 아이가 태어나면 적어도 몇 년은 내 옆에만 붙어 있을 텐데, 애 아빠가 그걸 못 견뎌서 화를 내면 큰일이잖아요.”

“……애 아빠?”

“네. 애 아빠요. 설마 애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아니, 그게, 우린 아직 그런 일도 안 했고, 그래서 나는 잘 몰라서…….”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해리가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잘 생각해봐요. 내가 해리를 잡아먹기 전까지 제대로.”

“……왜 네가 날 잡아먹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다간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아서요.”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문제는 단순하다. 상대가 좋으냐 싫으냐. 그에 대한 답이 나오면 그 뒤는 간단했다.

하지만 관계를 길게 바라본다면 그 이상의 고민이 필요한 법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몸을 섞은 뒤에 생기게 될 책임에 대해서도 분명히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해리. 이거 숙제예요. 숙제 안 하면 벌 받는 거 알죠?”

“그럼 숙제를 제대로 하면 뭘 받는데?”

“당연히 주인님이 상을 주시겠죠?”

상이라는 말에 겨우 진정됐던 해리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구만.’

나는 씩 웃으며 해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해리가 언제 이렇게 음흉해졌죠?”

“음흉하긴 누가?”

해리가 화들짝 놀라 반박하며 처음부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편지나 읽어.”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엠마를 대신해서 편지를 전하러 왔다고 했었다.

‘당연히 날 만나러 올 핑계가 필요했던 거겠지만.’

먼저 찾아오긴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날 안 보는 건 싫고. 그래서 열심히 핑곗거리를 찾았을 해리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져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가 전해준 편지를 읽는 순간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완전히 날아갔다. 편지의 발신인은 국왕이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