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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잔뜩 쌓여있는 보물 앞에 앉아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모두 흑룡의 둥지에서 가져온 보물이었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로이는 어느새 보물에 파묻혀 신나게 수영을 하고 있었다.
‘엄마보다 보물이 더 좋다 이거냐.’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드래곤 아니랄까 봐 이제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나는 묘하게 서운한 감정을 속으로 누르며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 많은 걸 전부 정리하시겠다고요?”
다른 업무에 대해 보고를 하러 왔다가 얼떨결에 붙잡혀 보물 정리를 도와주고 있던 인세티아 남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안에는 절대 못 끝내겠는데요.”
“음. 이 속도라면 일주일은 걸리겠네요.”
나는 목록에 정리된 보물과 그렇지 않은 보물의 양을 가늠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인세티아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쌓여있는 보물을 노려보았다.
“일주일 내내 이 일에 매달려 계시겠다고요?”
내가 이 일에 매달리느라 생기게 될 영지 운영 업무의 공백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초적인 서류 작업은 노예 왕자들과 악마들이, 조금 중요한 서류들은 인세티아 남작이 맡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업무들의 최종 승인자는 전부 나였다. 완성된 서류를 읽어보고 고민한 뒤 서명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가끔 복잡한 사안에 부딪히면 한 장의 서류를 붙잡고 며칠이나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주일 내내 보물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거죠. 계속 여기에만 있을 순 없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계속 여기에 있고 싶지만 말이야.’
휘황찬란한 보물로 가득 찬 방에서 내가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나 세어보는 삶이라니. 내가 꿈꾸던 호의호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걸 수습하기 전까지는 내가 꿈꾸던 호의호식을 즐기기 힘들었다.
‘재빨리 끝내고, 호의호식을 즐긴다!’
나는 다시금 나의 목표를 되새기며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보물을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 보물이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가 보물을 질린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남작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의욕적이던 그의 눈빛이 많이 죽어있었다. 보물이 이렇게 많아서야 이걸 모두 처분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 다 팔 수 있을까요?”
“파신다고요? 이 보물들을요?”
내 말에 남작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하지만 나는 남작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팔아야죠. 이걸 전부 안고 살아서 뭐 하는데요?”
보물이 좋은 건 이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팔아서 돈이 되지 못한 보물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전부 엄청난 보물들인데요?”
“알아요. 흑룡이 별로 가치도 없는 보물들을 모았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걸 아시면서 이걸 전부 판다고요? 이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보물들입니다.”
“됐어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건 성검 하나로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피곤하다고요.”
거기다 오베론 공작이 생일 선물로 줬던 목걸이도 평범한 보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국보급 보물을 2개나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전부 팔아서 현금화할 거예요. 그리고 그 돈으로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거죠.”
불리고 또 불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하는 데 익숙했다. 가득 찬 보물창고에 흐뭇해하며 보물로 인한 명성을 즐기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것참…….”
모호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작이 제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실용적인 생각이군요.”
“귀족답지 않다는 말이죠?”
당연하다. 나는 처음부터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이 방식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모두 판매할 거라면 경매사를 불러 정리하게 하시면 될 텐데요.”
“당연히 경매사를 불러 처리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게 투자의 기본이었다.
“내가 가진 걸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으면, 경매사가 보물 한두 개를 슬쩍 한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 아녜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 하지만 남작은 한두 개 정도 슬쩍해도 괜찮아요. 과중한 업무에 대한 추가 수당이라고 생각해요.”
“제 업무가 과중하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같이 과중하니까 비긴 것으로 하죠.”
나는 씩 웃으며 마침 손에 들고 있던 보물을 내밀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붉은 보석이었다.
“이거 가질래요?”
“됐습니다. 안 받습니다.”
“남작은 보물에 흥미가 없어요?”
“그걸 준 뒤에 얼마나 더 많은 일을 시키시려고요. 무서워서 못 받습니다.”
남작이 심드렁한 얼굴로 보물을 거절했다.
“제가 믿을만한 경매사를 불러와 목록을 정리하도록 하지요. 오베론 가문은 물론 왕실과도 오랫동안 거래를 한 곳이니 보물을 슬쩍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목록 정리는 그만하고 일을 하라는 말이죠?”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인세티아 남작이 반색하며 말을 쏟아냈다.
“포션의 시제품이 완성됐습니다. 엘프들은 농사를 위해 땅을 일구기 시작했고요. 온천 리조트는 회원권을 사고 싶다는 문의가 폭주하는 중입니다. 영주님께서 처리하셔야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말로만 들어도 벅찬 업무량이었다.
‘하나씩 처리해볼까.’
나는 개중에서 가장 급해 보이는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해보기로 했다.
“포션이 벌써 완성됐어요?”
“재료와 배합까지 전부 알려주셨으니까요. 개발 자체는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시피가 완벽하다고 훌륭한 요리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시제품을 살펴보고 보완할 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완성됐다는 시제품을 보고 싶은데요.”
“그러실 줄 알고 집무실에 시제품을 준비해뒀습니다.”
“그럼 집무실로 가죠.”
나는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붉은 보석에 대한 내용을 목록에 기입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보물 속에서 수영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던 로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다급하게 뛰쳐나온 로이의 검은 머리 위에 커다란 황금빛 왕관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로이.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나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로이의 호칭을 단속했다.
“하지만 엄마잖아.”
로이가 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순진한 눈을 껌뻑였다.
‘아니, 우선 그거부터 틀렸지만…….’
본능에 각인되어 버린 사실을 고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로이가 날 엄마라고 부르면 내가 많이 곤란해져.”
“엄마. 로이 엄마여서 많이 곤란해?”
로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상처받은 모습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냐. 로이가 날 엄마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안 곤란해.”
“그럼 뭐라고 불러? 엄마는 엄마인데.”
“이름을 부르면 되지. 이브리아라고 불러.”
“그럼 엄마 안 곤란해?”
“응.”
“알았어. 로이 할 수 있어.”
겨우 며칠 만에 말이 훨씬 유려해진 로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
“어?”
“이름 부르라고 했잖아. 이브.”
로이가 나를 이브라고 부르며 활짝 웃었다.
‘4글자를 전부 말하는 게 어려워서 그런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생후 1개월도 못 채운 어린아이이니 4글자의 이름이 너무 길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브라니.’
나는 익숙하지 않은 애칭에 어색해서 볼을 긁적였다. 악명과 사나운 이미지 때문인지, 나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해리가 날 이브라고 부르는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많지 않았다.
“왜?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로이가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냐. 그렇게 불러도 돼.”
“헤헤. 응. 이브.”
애칭을 부르는 건 아주 친밀한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백배는 나았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
나는 로이의 머리에 걸려 있는 왕관을 보물 더미 속에 던져 넣으며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로이는 아쉬운 눈으로 반짝이는 왕관을 쳐다보다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이브. 그 보물은…….”
로이가 나의 왼손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의 왼손에는 남작이 가져가기를 거부했던 붉은 보석이 들려 있었다.
“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아직까지 이걸 손에 쥐고 있는 줄 몰랐다.
“왜? 마음에 들어? 이거 줄까?”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로이에게 붉은 보석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이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보석은 이브 거잖아.”
“어차피 흑룡의 둥지에서 가져온 거야. 원래 내 거 아니었어.”
인간의 상식대로 따르자면 흑룡의 둥지에 있었던 보물은 모두 그녀의 아들인 로이가 상속받는 것이 옳았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로이가 가진다면 아깝지 않지.’
하지만 로이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이브 거였어. 처음부터.”
“뭐?”
로이의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으로 그의 눈을 피해 붉은색의 보석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익숙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따뜻한 온기. 이미 두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 나는 단번에 이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태양신의 심장 조각!’
내가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붉은 보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당연한 길을 따라간다는 양 자연스럽게 내가 낀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모든 빛을 흡수한 반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게 내 손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
나는 황당해져 반지를 쳐다보았다.
‘벌써 태양신의 심장 조각 3개를 모은 거야?’
첫 번째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태양신의 심장 조각을 모으겠다고 나선 적도 없는데, 조각이 알아서 내게 굴러왔다.
“3개.”
나와 함께 반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로이가 작게 속삭였다.
“로이. 이게 뭔지 알아?”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이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반지. 알아.”
“어떻게?”
“이브. 나는 드래곤이야.”
부족한 설명이었지만 대충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드래곤은 인간계 최강의 존재로, 신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었다. 신의 기운을 느끼는 능력이라든지, 본능에 새겨진 지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 두 개 남았어.”
“남은 두 개를 채우면?”
“전지전능한 태양신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지.”
소원. 나와 마주한 태양신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게 간절한 소원이 생겨 필사적으로 조각을 모으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태양신이 알아서 조각을 던져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반지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소원.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