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언제나 그랬듯 나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쩌겠어.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현실을 부정하며 엉엉 울어봤자 나만 손해였다.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게 훨씬 건설적이었다. 흑룡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흑룡이랑 싸우는 건 단순하기라도 했지.’
그 이후에 남겨진 문제들은 해결이 복잡한 데다 의도가 추저분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피곤할 정도였다.
“보물은 균등하게 나눠 가져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흑룡에게 상납했던 보물의 양이 다른데. 과거의 상납 기록을 근거로 해서 분배해야지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물을 상납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기록이 아직까지 각 영지에 남아 있겠습니까?”
나는 흑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라르고 영지로 모여든 동부 귀족들의 지루한 공방을 지켜보며 길게 하품했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흑룡의 둥지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동부의 귀족들은 이 보물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욕심 많은 흑룡이 평생을 모아 온 보물은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왕실의 보물창고를 본 적은 없지만, 그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보물이 가득했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왕국의 몇십 년 치 예산은 거뜬히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 공방에서 나는 좀 빼주면 안 될까…….’
나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들의 공방을 지켜보며 의자에 늘어졌다.
‘흑룡이 죽자마자 바로 라르고 영지를 떠났어야 했는데.’
부디 축하연에 참석해달라는 라르고 영주의 간절한 부탁과 기대에 찬 병사들의 눈빛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흑룡을 겨우 달래 해리에게 맡기고 축하연에 참석했더니, 즐거운 파티는커녕 귀족들의 개싸움만 구경하게 생겼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싸움판이야.’
이 지리멸렬한 싸움이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너희는 싸워라. 나는 먹을 테니.’
식어가고 있는 음식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귀족들의 공방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눈앞의 닭고기를 썰어 입속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적당하게 구워진 촉촉한 닭고기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귀족들의 대화에 내가 등장했다.
“사실 이건 성검의 주인께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샤 후작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성검의 주인께서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나는 민망해져 슬그머니 식기를 내려놓았다.
“……제가 뭘요?”
나는 입안의 닭고기를 재빨리 삼키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샤 후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다들 잊으셨습니까? 우리 동부 귀족 연합이 오래전 흑룡을 무찔러 줄 용사를 모집했었다는 것을요.”
이샤 후작의 말에 이름 모를 귀족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몇 대 전의 일이었지요. 감히 흑룡에 대적하겠다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아 조용히 묻혔지만 말입니다.”
“그럼 우리 동부 연합이 용사에게 내걸었던 조건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쉽겠군요. 모두의 앞에서 그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 같은 이샤 후작의 말에 귀족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리 쉬운 것을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우리 동부 연합은 흑룡을 무찌른 용사에게는 흑룡의 둥지에 있는 모든 보물을 다 주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귀족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자신이 꺼낸 말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건 파티를 가장한 싸움판에 참여하고 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우리는 현상금으로 흑룡의 둥지에 있는 보물 모두를 걸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죠.”
이샤 후작이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둥지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는 모두 흑룡을 무찌른 자의 몫입니다. 응당 성검의 주인께서 모두 가지셔야 합니다.”
‘그런 대가가 있었어?’
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가에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그런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금은보화를 안겨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오래전에 내건 조건입니다!”
귀족 하나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씩씩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이샤 후작은 작은 동요도 없이 능숙하게 그를 제압했다.
“그때 작성했던 결의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구도 파기하지 않았거든요.”
“그거야 용사가 나타날 줄 몰랐으니 계속 둔 거 아닙니까?”
“그랬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용사가 나타나 버렸는데요.”
이샤 후작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우리 동부 귀족 연합이 이름을 걸고 낸 결의문을 번복할 정도로 품행이 천박하지는 않잖습니까.”
조곤조곤 부드럽게 말했지만, 속에 담긴 의미는 날카로웠다.
‘과거의 결의문을 뒤집으려는 자들은 품행이 천박한 양아치라는 뜻이잖아.’
나는 이샤 후작의 말솜씨에 감탄했다. 그는 공격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로 상대를 돌려 까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샤 후작의 말에 제대로 타격을 받은 양아치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반발하면 자신이 천박한 양아치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니 쉽게 나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둥지에서 나온 금은보화는 모두 흑룡을 무찌른 성검의 주인이 가져야 합니다. 모두 동의하시겠죠?”
이샤 후작의 정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떠들썩하게 자신의 몫을 주장했던 귀족들은 나라를 잃은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이샤 후작만이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뿌듯함이 가득 느껴지는 미소였다.
* * *
나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안고 에렐에 복귀했다. 에렐에 도착하니 늘 그랬듯 인세티아 남작이 누구보다 먼저 나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인세티아 남작은 인사를 하면서도 나를 불안한 눈으로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또 무엇을 주워왔나 살피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있어요.”
나는 인세티아 남작이 먼저 흑룡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에 자수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군요.”
인세티아 남작이 그럴 줄 알았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뭡니까?”
남작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무엇이든 올 테면 와라-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어린 소년에게 눈짓했다. 어린 흑룡이 인간화한 모습이었다.
‘저택에서 데리고 지내려면 본체는 힘들어.’
지금이야 작아서 문제가 없겠지만, 더 자라 성체가 되면 그 크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흑룡을 어르고 달래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했다. 드래곤은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이 거의 완성 단계라는 해리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어린 흑룡은 쉽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소년은 퍽 선량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미리 언질을 주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흑룡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 같았다. 본체일 때와 똑같은 점은 여전히 내게 집착한다는 사실 정도뿐이었다.
“엄마아…….”
내 옷자락을 붙잡은 어린 흑룡이 얼굴만 슬쩍 내밀어 남작을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뜬 남작의 눈빛에 긴장했는지 내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데요.”
인세티아 남작이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영주님. 도대체 언제 사고를 치신 겁니까?”
“남작. 내가 아무리 일찍 사고를 쳤어도 이런 아들은 무리죠.”
“하지만 영주님을 엄마라고 부르잖습니까.”
남작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어서 나는 복잡한 눈으로 어린 흑룡을 바라보았다.
‘말을 제대로 구사하면 이 호칭부터 바꿔야겠어.’
해리는 흑룡이 제대로 성체가 되면 자연스럽게 말과 능력이 완벽해질 거라고 했다.
‘성체가 되려면 한 달 정도가 걸린댔으니까…….’
그 기간만 조심하면 결혼도 안 한 오베론의 아가씨가 갑자기 아들을 데려왔다는 헛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다.
“얜 인간이 아니라 흑룡이에요.”
“흑룡이요?”
인세티아 남작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과 사고를 치신 겁니까?”
경악하는 남작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요, 남작. 도대체 왜 내가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거야 영주님께선 사고를 치시는 데 누구보다 탁월하시니까요.”
남작이 이번에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적이 화려한 나는 민망함에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린 끝에 겨우 할 말을 찾았다.
“내가 치는 사고는 로맨스랑은 거리가 멀다고요.”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으셔서.”
남작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리를 향했다. 그는 내 옆을 지키고 서서 맹렬히 흑룡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사고 친 거 아니에요.”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흑룡을 죽이러 갔더니 알이 있더라고요. 그게 갑자기 부화하더니, 그 안에 있던 흑룡이 날 제일 먼저 봤어요.”
그 뒤에 흑룡이 죽고,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어쩌다 보물까지 잔뜩 안고 돌아오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모두 들은 남작이 아주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에 흑룡의 보호자라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시려는 겁니까.”
“남작. 나도 억울해요. 나도 그런 거 안 되고 싶었다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소년을 안아 들었다.
‘벌써부터 꽤 묵직하네.’
무게를 느끼며 흑룡을 안아 들자마자 그가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흑룡을 노려보던 해리의 눈빛이 더욱 불타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질투하는 해리는 귀여워.’
내가 어린 흑룡과 친근하게 보일 때마다 발끈하는 해리를 지켜보는 건 상당히 즐거웠다. 나는 이를 바드득 갈고 있는 해리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남작에게 당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결혼도 하기 전에 밖에서 애부터 데려왔다는 화려한 소문에 시달리고 싶진 않거든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철저히 입단속을 하지요.”
남작이 생각보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퍼졌다간 저부터 공작 각하께 추궁을 당할 테니까요.”
“아. 그렇네요. 혹시나 이 소문이 아버지께 들어가게 되면…….”
“제대로 난리 나는 거죠.”
남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오베론 공작이 이런 추접스러운 소문을 알게 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다.
“그런 소란은 저 역시 바라지 않으니 빈틈없이 움직이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남작.”
나와 남작은 강한 동지애로 뭉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흑룡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그러게요. 계속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내가 흑룡을 데리고 있다며 광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이름을 지어줘야겠는데요?”
“내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용히 흑룡을 노려보고 있던 해리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내가 이름 지어줄래.”
“해리가요?”
의외의 말이었다.
‘흑룡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흑룡을 노려보고 있었으면서.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손수 흑룡의 이름을 지어주겠다 나선단 말인가.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의도가 숨어있을 것 같았다.
“흐음.”
미심쩍게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해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 음, 로이는 어때?”
“로이요?”
입안에 굴려보니 그리 나쁜 이름은 아니었다. 부르기도 편하고, 흑룡에게도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괜찮은 이름 같은데요.”
인세티아 남작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럼 로이로 하죠. 넌 이제부터 로이야. 알았지?”
나는 품에 안겨있는 흑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린 흑룡, 로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로이?”
“그래. 네 이름이야.”
“로이. 내 이름.”
로이가 몇 번이나 이름을 반복하더니, 곧 활짝 웃으며 내 품에 얼굴을 부볐다.
“내 이름은 로이. 나는 로이야. 엄마의 로이!”
* * *
레피와 리피는 오늘도 서류의 산에 파묻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사실 이브리아는 그리 나쁜 계약자가 아니었다. 합리적인 업무량에, 적당히 휴식도 주고, 정당한 대가도 지불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의무로써 일해야 하는 마계에서의 노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문제는 이브리아의 옆에 딱 붙어 있는 해리였다.
-야. 너희들. 이것도 같이 처리해.
이브리아와 놀아야 하는데 일이 끝나지 않는다며, 그녀의 몫으로 주어진 서류들을 죄 가져와 두 악마에게 떠넘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번에도 해리가 가져온 서류까지 죄 떠맡게 된 두 악마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류를 처리하며 창밖에서 들려오는 에렐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서류 노예가 된 두 악마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 이야기 들었니? 아가씨께서 아이를 데려왔대.”
마침 빨래를 널고 있는 두 하녀의 수다가 들려왔다.
“그 남자애, 인간이 아니라던데?”
“그래?”
“응. 자라는 속도가 엄청 빠르대.”
하녀 하나가 대단한 비밀을 말한다는 양 속삭였다. 하지만 청력이 예민한 두 악마는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올 때는 서너 살 같았는데, 벌써 열 두어 살 정도로 자랐대. 아마 드워프나 엘프처럼 이종족일 거라고 하더라.”
“세상에.”
“그리고 아가씨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대. 하도 떼를 써서 잠도 아가씨 방에서 잔다더라.”
“어머나. 망측해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녀의 입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이 흘러나왔다.
“근데 그 애 이름이 뭐였지?”
“다들 로이 님이라고 부르던데?”
하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이번에는 두 악마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피. 이름이 로이래.”
“그러게, 리피. 뭐 그런 이름이 다 있지?”
두 악마가 서로를 마주 보며 낄낄댔다. 악마들의 언어로 로이는 개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