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4/156)

* * *

일행은 서서히 흑룡의 둥지에 가까워졌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린 결과, 해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향했을 때 즈음에는 둥지가 있는 언덕 바로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나와 해리는 말에서 내려와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나무 하나 없이 바위와 풀로만 뒤덮인 언덕은 험하고 가팔라 오르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 험하고 가파른 언덕 위에 흑룡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흑룡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협적이었다. 비슷한 형태라는 와이번과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영주는 여기서 병사들과 아래를 지켜줘요. 나와 해리는 위로 올라가 흑룡과 담판을 지을 테니까요.”

라르고 영주와는 이미 흑룡 토벌 계획을 논의한 뒤였다. 그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 병력 위치로!”

라르고 영주의 외침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언덕을 둘러쌌다.

‘이 정도면 아무리 흑룡이라도 압박감 정도는 느끼겠지.’

내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흑룡이 불안한 듯 요란하게 울어대며 연신 날갯짓했다. 흑룡의 위협에 언덕을 둘러싼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이제 흑룡을 만나볼까요?”

내 쓰레기 같은 몸으로는 이 언덕을 오를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해리 역시 익숙하다는 듯 나를 안아 들었다. 착착 맞아 떨어지는 우리의 행동에 라르고 영주가 또다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라르고 영주를 비롯한 동부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언덕을 오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흑룡을 처치하느냐였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르고 영주가 고개를 숙여 나와 해리를 배웅했다. 해리는 나를 안은 상태로도 가볍게 언덕을 뛰어올랐다.

“크와아아아앙!”

해리와 내가 정상에 가까워질 때마다 흑룡이 요란하게 울며 마법을 쏘아댔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거나, 땅이 갑자기 꺼지거나, 불덩어리가 머리 위를 스쳐 가기도 했다. 드래곤의 공격이 우리를 덮칠 때마다 아래를 지키고 선 병사들로부터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공격당하는 건 나랑 해리인데, 왜 저 밑에서 난리야?’

생각해보면 영화를 보는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액션 영화를 볼 때면 주인공의 상황에 이입해서 손에 땀이 맺힐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들갑을 떠는 병사들과 달리, 공격을 맞이하는 장본인인 해리는 여유로웠다.

“흥. 겨우 이런 공격으로 날 막을 수 있겠어?”

해리는 코웃음 치며 모든 공격을 간단하게 피했다. 공격을 피할 때마다 드래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지만, 해리는 그마저도 우습다는 듯 간단하게 피했다. 그렇게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며 성큼성큼 위로 올랐더니 우리는 순식간에 정상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영역을 침범했다, 인간.”

강하고 지능이 높은 존재라더니. 드래곤은 완벽하게 인간의 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당장 나의 영역을 떠나라! 나의 영역을 침입한 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흑룡이 길게 포효한 뒤 나와 해리에게 경고했다. 물론 그리 와 닿는 경고는 아니었다.

“우릴 죽일 수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두고 보지 않았을 거잖아?”

코웃음을 흘리며 흑룡의 경고를 비웃은 해리가 거대한 드래곤 가까이 다가섰다.

“게다가 지금 보니까 너…”

흑룡을 바라보는 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거 아냐? 네 기운이 점점 자연에 흡수되고 있는데.”

해리의 지적에 흑룡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줄어들었다. 위협적인 눈빛으로 해리를 살피던 흑룡이 곧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날개를 펄럭였다.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로구나. 악마를 보는 건 세 번째로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면 날 죽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겠네.”

“흥.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그래. 하지만 나도 혼자가 아니거든?”

해리가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자, 그의 옆에서 아스페리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흑룡?”

풀잎에 맺혀 있던 이슬에서 미친 정령이 반갑게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본 흑룡이 당황한 낯으로 포효했다.

“정령들의 왕! 너는 우리 드래곤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을 수호하는 동료가 아닌가?”

“맞아. 하지만 내 계약자가 널 좀 무찔러 달래서.”

아스페리츠가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계약자에게 미안한 일을 하나 해서, 이번 부탁은 거절하기가 힘들어. 어차피 살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순순히 죽어주면 안 될까?”

“계약자? 정령들의 왕이 인정한 인간이 있단 말인가?”

흑룡이 고개를 빼고 나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콧김에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악마와 정령들의 왕이 충성을 맹세한 인간. 하지만 너는 아주 나약하구나.”

흑룡이 입을 쩍 벌려 나를 위협했다.

“감히 누굴 위협해?”

그러자 해리가 내 앞을 막아서며 쩍 벌린 흑룡의 입안에 불덩어리를 집어넣었다.

“크와앙!”

불덩어리를 삼킨 흑룡이 괴롭게 몸을 비틀며 날개를 푸드득거렸다. 아스페리츠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흑룡의 날개에 강한 물줄기를 쏘았다.

하지만 흑룡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날개를 접어 물줄기를 피한 흑룡이 꼬리를 휘둘러 아스페리츠의 몸을 때렸다. 그러자 인어의 형태를 하고 있던 아스페리츠의 몸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아이고, 놀랐네.”

사방으로 흩어졌던 아스페리츠가 흑룡의 등 위에서 다시 인어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싸워보자는 거지, 흑룡?”

아스페리츠가 이를 갈며 거대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때부터는 계획대로였다. 그러니까,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흑룡에게 열심히 몰매질을 했다. 흑룡도 간간히 반격하며 그들의 유일한 약점인 나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대단한 존재가 둘이나 협공하니 쉽지 않은 듯했다.

‘할 일이 없네.’

나는 유피테르를 손에 쥔 채 멍하니 그 싸움을 지켜보았다. 치열한 전투에서 벗어나 제3자가 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저 흑룡, 왜 둥지에서 날아오르지 않지?’

드래곤은 날개가 있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싸움을 공중전으로 이끈다면 흑룡에게 훨씬 더 유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흑룡은 둥지에 앉아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둥지를 떠나면 큰일이 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혹시 둥지에 지켜야 할 것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흑룡의 둥지 안을 살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거대한 흑룡이 빈틈없이 품고 있는 둥지 안을 살펴보는 건 쉽지 않았다.

[해리.]

[왜? 무서우면 더 멀리 떨어져 있어.]

내 부름에 해리가 흑룡의 공격을 피해내며 대답했다. 아스페리츠와 함께 싸우고 있어서인지 그는 드래곤과 대치하면서도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아뇨. 무서운 건 아닌데 뭔가 좀 이상해서요. 이 둥지 안에 뭐가 있길래 흑룡이 날아오르지 않죠? 흑룡 입장에서는 공중전이 훨씬 유리하잖아요.]

[둥지 안에?]

내 질문에 해리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둥지를 힐끗거렸다.

[글쎄. 그동안 공물로 받은 보물이 쌓여 있는 거 아냐?]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평범하기도 했다.

‘드래곤은 반짝이는 보물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미심쩍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보물을 지키겠다고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여전히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둥지를 쳐다보고 있으니 유피테르가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했다.

[혹시 알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알이요?]

[예. 드래곤이 반짝이는 보물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후손이거든요. 드래곤은 개체 수가 아주 적어서 후손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마침 흑룡은 여성체였다. 목소리를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라르고 영주는 최근 들어 흑룡이 더욱 예민하게 날뛴다고 했어.’

그런 행동 역시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한 예민함이었다고 생각하면 맞아떨어진다.

“해리. 아스페리츠. 공격 좀 멈춰 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열심히 흑룡을 때리고 있는 악마와 정령을 제지했다. 아스페리츠가 내 말에 따라 재빨리 방어태세로 전환하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왜? 거의 다 이겼는데.”

그의 말처럼 흑룡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공격을 멈췄는데도 감히 우리를 향해 반격할 기운조차 없는 것 같았다. 강철도 뚫을 수 없다는 단단한 피부는 상처로 너덜너덜했고, 입에서는 연신 거친 숨이 쏟아졌다.

나는 지친 모습으로 둥지 위에 늘어진 흑룡에게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알을 품고 있어요?”

알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지쳐있던 흑룡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누구도 내 아이를 건드릴 수 없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늘어져 있던 존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개였다. 뒤이어 언덕이 주저앉을 것 같은 우렁찬 포효가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였다.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흑룡에게 외쳤다.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다행히 내 목소리가 포효를 뚫고 전해진 것 같았다. 어느새 포효를 멈춘 흑룡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난 그저 당신이 앞으로 인간들을 약탈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

흑룡을 죽이고 살리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동부 사람들은 눈앞에서 흑룡을 완전히 지워버리길 바랄 테지만,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지금처럼 협상을 할 수도 있었다.

‘그게 내가 더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앞으로 약탈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만 하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돌아갈게요.”

“약속?”

내 두 눈에 꽂힌 흑룡의 동공이 몇 번이나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아마 내 말의 진실성을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인간이여. 너의 눈에는 거짓이 없구나.”

마침내 흑룡의 눈이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눈빛에 은은하게 서려 있던 적대감도 조금은 옅어진 뒤였다.

“나는 알 수 있다. 너는 믿을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어떻지?”

흑룡이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에 도열한 동부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늘 약속을 어긴다. 믿음에 대한 보답은 언제나 배신이었지.”

흑룡이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너덜너덜해진 날개를 펄럭였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인간을 믿지 않기로 했다. 인간을 약탈하고 발톱을 세우는 쪽이 안전하다.”

“그럼 계속 싸우겠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이기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잖아요.”

흑룡이 내 옆을 지키고 있는 해리와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싸움이 이어진다면 흑룡이 패배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차피 나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 우리 드래곤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흑룡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날개를 접었다.

“너와 약속하는 것은 쉽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연명할 것이고, 인간들은 두려움을 잊고 평화를 얻겠지.”

“모두에게 좋은 결말 아닌가요?”

내 말에 흑룡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다, 인간이여.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을 잃은 인간들은 내가 죽은 뒤 둥지로 찾아와 금은보화를 탐하고 아직 자라지 못한 나의 아이를 해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의 아이를 잃었다.”

흑룡이 길게 포효했다. 위협적이던 조금 전의 포효와 달리 짙은 슬픔이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도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인간들의 뼛속까지 두려움을 새겨놓을 것이다. 그러니 평화로운 타협은 할 수 없다!”

지친 기색으로 늘어져 있던 흑룡이 다시 몸을 일으켜 양 날개를 활짝 폈다. 어쩐지 처절하게 느껴지는 몸짓에 해리와 아스페리츠마저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흑룡의 입에서 강한 불덩어리가 쏘아졌다. 목표는 우리가 아닌 언덕 아래의 병사들이었다.

“불덩어리다!”

“모두 피해!”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에 놀란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해리! 아스페리츠!”

나는 재빨리 둘의 이름을 불렀다. 별다른 지시는 없었지만, 해리와 아스페리츠는 눈치 빠르게 병사들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냈다.

해리와 아스페리츠를 공격할 때는 범위가 작고 목표가 명확했다. 조금만 집중하면 쉽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범위한 영역에 무작위로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애를 쓰고 있지만, 흥분한 흑룡의 공격이 더욱 거세져 이러다 죽거나 다치는 병사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곤란해.’

그랬다가는 아무리 일이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원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괜히 덤터기를 쓰는 꼴이었다.

“진정해요!”

나는 재빨리 흑룡에게 소리쳤다.

“이러다 누가 죽기라도 하면 복수심을 품은 인간들이 둥지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요. 어린 드래곤 혼자서 분노에 휩싸인 인간들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내 말이 흑룡을 더욱 자극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복수를 하러 올 인간조차 없도록 인간의 씨를 말려야겠구나!”

흥분한 흑룡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여 가볍게 둥지 위로 날아올랐다. 흑룡의 입 주변으로 강한 기운이 응축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언덕 아래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빠르게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브레스다!”

“흑룡이 브레스를 쏜다!”

혼비백산하는 병사들의 반응을 보니 흑룡이 아주 강력한 공격을 준비 중인 것 같았다.

‘일종의 필살기 같은 건가?’

흑룡의 머리는 더 이상 언덕 아래의 병사들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마을이다! 흑룡이 마을에 브레스를 쏘려고 한다!”

마을에는 무장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이 언덕으로 출병한 뒤라, 마을에는 흑룡의 엄청난 공격을 막을 만한 어떠한 방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곳으로 공격이 향한다면 엄청난 비극이 찾아올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흑룡의 흥분을 가라앉힐 방법을 떠올렸다.

‘흑룡의 소중한 알을 가지고 협박한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난 악역이라고.’

나는 재빨리 흑룡의 둥지 위로 달려갔다. 아름답게 빛나는 금은보화들 사이에 성인의 얼굴보다 큰 알이 있었다. 나는 유피테르의 들어 알을 겨누었다. 예리한 칼날이 금방이라도 알을 깨버릴 듯 가까웠다.

“이봐요, 흑룡! 멈추지 않으면 이 알을 깨버릴 거예요! 보이죠? 내가 조금만 삐끗하면 알에 구멍이 나버릴 걸요!”

[저를 협박하는 데 쓰시는 겁니까….]

내 외침에 유피테르가 힘없이 한탄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제 역할이 겨우 협박이라니 자괴감이 느껴지는군요.]

[미안해요. 다음엔 꼭 멋진 역할로 써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

내가 머쓱해져 유피테르에게 사과하는 사이, 브레스를 준비하던 흑룡이 포효하며 내 머리 위를 맴돌았다.

“협박이라니, 역시나 천박하구나 인간!”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그쪽이거든요? 지금이라도 대화로 해결해보는 게 어때요?”

“인간과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

“그럼 끝까지 가보자 이거에요? 내 손에 지금 알이 있는데?”

나와 흑룡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유피테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기, 주인님?]

하지만 유피테르의 말에 대꾸해줄 시간이 없었다. 나는 흑룡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인간을 믿을 수 없다면 나를, 이브리아 오베론을 믿어요! 나는 믿을 수 있는 인간 같다면서요!”

[저기요, 주인님…….]

“너는 겨우 하나다. 수많은 인간들을 네가 당해낼 수 있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내가 좀 유명하고 대단해요!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도록 힘쓸 수 있어요!”

[주인님? 제 말 안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너는 인간들의 왕인가?”

“왕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무슨 힘이 있어 다른 인간들을 강제할 수 있다는 거지?”

[주인님!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흑룡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계속 나를 부르던 유피테르가 이번에는 크게 소리쳐 나를 불렀다. 급박한 상황에 몇 번이나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다소 짜증이 나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왜 불러요!”

[알을 좀 보십시오. 뭔가 이상합니다!]

유피테르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알을 향해 돌아갔다.

“……어?”

시선이 알에 닿자마자 나는 유피테르가 왜 그렇게 나를 애타게 불렀는지 이해했다.

“이, 이, 이거 지금 금 갔는데요?”

알의 표면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검도 알에 안 닿았다고요!”

억울함이 가득한 나의 목소리에 유피테르도 동의한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냥 알이 갑자기 혼자서 깨지기 시작하더니…….]

콰지직. 나와 유피테르가 서로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이 알이 완전히 깨졌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멍하니 알을 쳐다보았다.

“알이…….”

[깨졌네요…….]

이건 사고다. 그것도 대형 사고다!

그 소중한 알을 부숴버렸으니 흑룡의 분노가 대단할 것이다.

‘늘 사고 친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내가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

놀라운 상황에 머리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바로 그 뒤에 벌어졌다.

“끼유?”

표면이 완전히 갈라진 알 속에서 작은 생명체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어린 생명체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 이거, 설마…….”

[새끼 드래곤인 것 같습니다!]

유피테르가 안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우리가 알을 부순 게 아니라, 부화될 때가 되어서 깨어난 거란 말이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와. 정말 십년감수했다…….”

나는 힘이 빠져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 위로 흑룡이 날아다니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걸 신경 쓸 기력도 없었다.

[그런데 주인님.]

유피테르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가 나를 이렇게 부를 때에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흐를 때뿐이었다. 나는 다시 긴장하며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요? 아직도 무슨 문제가 있어요?”

[저,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드래곤은 처음 알에서 깨어난 순간 쳐다본 존재를 부모로 인식합니다.]

“아.”

익숙한 이야기였다. 아기 오리가 알에서 깨어난 순간 쳐다본 존재를 엄마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걸 각인효과라고 하던가요? 나도 알고 있…….”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빠르게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어린 드래곤의 맑은 두 눈이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유피테르.”

[네, 주인님.]

“이 드래곤이 처음 눈을 뜨자마자 본 게 혹시……?”

[주인님이시죠.]

“그럼 이 드래곤은…….”

[주인님을 엄마라고 인식하지 않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이론에 따른다면 말입니다.]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린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아?”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떠오르는 말이 분명히 존재했다.

“유피테르. 설마 이 드래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른 건 아니겠죠?”

[글쎄요…….]

“그렇잖아요? 어떻게 날 엄마라고 부르겠어요? 생긴 것도 이렇게 다른데! 그렇죠?”

하지만 유피테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 뒤에 이어진 드래곤의 목소리는 나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엄마아! 마아!”

어린 드래곤이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너무 명확한 소리여서, 아니라고 현실도피를 할 수도 없었다.

“마아!”

어린 드래곤이 알에서 기어 나와 내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꼬물거리며 내 다리에 얼굴을 부비는 따뜻하고 작은 생명체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끼유우? 마아?”

어린 흑룡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맑은 두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귀, 귀여워!’

성체가 아무리 무서운 존재라도 어린 시절에는 귀엽다고 했던가. 위협적이고 매서운 흑룡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흑룡은 아주 귀여웠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어린 흑룡을 쓰다듬었다.

“끼유!”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던 어린 흑룡이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손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건가?’

나는 어린 흑룡을 안아 들었다. 내가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린 게 맞았는지, 어린 흑룡이 내 품에 안기자마자 다시 한번 더 기분 좋게 울었다. 그때, 내 머리 위를 배회하던 흑룡이 둥지 아래로 내려왔다.

“벌써 알이 부화하다니. 예정일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는데.”

흑룡은 내 품에 안긴 어린 흑룡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날개를 펄럭였다.

‘흑룡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바로 잡을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어린 흑룡이 귀엽긴 하지만, 이 녀석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건 사양이었다.

“잘 왔어요!”

나는 조금 전까지 다툼을 벌이던 흑룡을 반갑게 맞이했다.

“얘가 날 엄마라고 불렀어요. 빨리 좀 고쳐줘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죠? 진짜 엄마에다 드래곤이니까요.”

내 말에 흑룡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인간이여. 각인은 본능이다. 누구도 그걸 고칠 수는 없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흑룡의 말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어린 흑룡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눈앞에서 아이의 엄마 역할을 빼앗겼는데도 흑룡은 너무나 태평했다. 알이 깨어나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했던 흑룡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상한 반응이었다.

“이 애가 날 엄마라고 부르는 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알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드래곤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다. 알이 무사히 깨어났다면, 나는 모든 의무를 다한 것이다. 깨어난 후의 생은 그 아이만의 것.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흑룡의 반응은 여전히 담백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인간의 배신으로 아이를 여러 번 잃었다고,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도록 인간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 말은 모성애가 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나?’

알 가까이 접근하기만 해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아이를 향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인간들은 몇 번이나 깨어나지 않은 나의 알을 깨부쉈다. 나의 마지막 아이만은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나의 의무이기도 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흑룡이 여유롭게 꼬리를 흔들었다.

“예정대로였다면 알은 내가 죽은 뒤에 깨어났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들이 둥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흑룡을 바라보는 흑룡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사히 깨어났군.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부화했지만 아주 건강해 보인다. 마지막만은 나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드래곤들은 알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연약한 아이를?”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어린 흑룡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자립이 가능할 정도가 되면 독립시킨다. 그것마저 불안하다며 평생을 끼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건 다른 동물들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아함이 가득한 내 눈에 오히려 흑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가 왜 약하다는 거지?”

흑룡의 질문에 나는 어린 흑룡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몸집을 한 작은 생명체가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약하게 보일 걸요?”

“마아! 삐이!”

어린 흑룡이 순진한 눈을 반짝이며 삐익댔다. 귀여운 반응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겉모습에 속지 마. 걘 드래곤이야.”

풀어진 얼굴로 어린 흑룡을 쳐다보는 내 옆으로 해리가 다가왔다. 흑룡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는데도 해리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운동을 한 사람처럼 개운하게 보였다.

“드래곤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성된 존재로 태어나지. 이미 힘은 모두 지니고 있어. 겉모습도 한 달이면 성체가 될걸?”

“한 달이요?!”

나는 놀라서 어린 흑룡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녀석이 한 달 안에 저 흑룡처럼 완전히 커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이 녀석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났다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순 있겠지.”

해리가 내 품에 폭 안겨있는 어린 흑룡을 향해 위협적으로 바드득 이를 갈았다.

“야. 너. 알 거 다 아는 놈이 어린애인 척 내 주인님한테 수작부리지 마. 알았냐?”

“끼유…….”

해리의 위협에 어린 흑룡이 겁에 질린 얼굴로 떨며 내 팔을 꼭 붙잡았다.

“왜 그래요. 아직 어리잖아요.”

“이게 다 수작이라니까! 아무튼 영악한 드래곤 놈들 같으니라고. 네 품에 안겨서 떨어질 줄을 모르네.”

해리가 투덜거리며 어린 흑룡을 노려보았다. 이 작은 생명체에까지 잔뜩 날을 세우고 경계하는 해리를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졌다.

“해리.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애한테까지 질투하는 거예요?”

“말도 제대로 못하긴. 드래곤이 얼마나 똑똑한데.”

해리가 코웃음을 흘리며 어린 흑룡에게 경고했다.

“야. 너 이 자식, 계속 혀 짧은 소리 내면서 수작 부리면 가만히 안 둬. 말 똑바로 해라. 알겠냐?”

시정잡배들이나 할 것 같은 협박에 어린 흑룡이 더욱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해리.”

나는 이름을 불러 해리를 제지했다. 그러자 해리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며 코웃음을 흘렸다.

“흥.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나 끝까지 내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브리아, 진짜 조심해. 이놈, 순진한 척하지만 알 거 다 알아!”

“그렇게 말해도….”

나는 난처한 기분으로 어린 흑룡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는 이 귀여운 생명체가 해리의 말처럼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아! 좋아! 뀨우!”

나의 시선에 어린 흑룡이 까르르 웃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해리의 얼굴이 뭐라도 퍼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의 경고를 기억한 것인지 험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재밌네. 악마와 정령왕의 계약자가 드래곤의 엄마라니.”

아스페리츠는 이 황당한 상황이 아주 재밌는지 주변을 빙빙 돌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인간이여. 나의 일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도 되겠나.”

아스페리츠의 웃음을 뚫고 흑룡이 내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흑룡은 어린 흑룡을 ‘나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일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고 깔끔하게 자신과 아이를 분리할 수 있다니.

‘이것이 드래곤이구나.’

나는 새삼 드래곤이 얼마나 인간과 다른 생명체인지 깨달았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라니?’

흑룡은 자신의 생명이 조금 더 남아 있다고 했었는데. 이건 꼭 죽음을 코앞에 둔 존재의 대사 같았다.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읽었는지 흑룡이 입을 열었다.

“나의 생명은 오래 전에 끝났다. 최대한 오랫동안 알을 지키기 위해 자연의 힘을 끌어 쓰고 있었지. 그마저도 한계에 달해 목숨을 연명할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흑룡이 죽음을 말하는 존재 같지 않은 무덤덤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언덕 주변만 특히 황폐하게 변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에 있는 생명력을 끌어 쓴 거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드래곤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새로운 알이 부화하고, 어린 흑룡은 새로운 보호자를 찾았으니 순리를 거슬러가며 생명을 이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오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흑룡은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어린 흑룡의 몸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끼유…….”

어린 흑룡은 지금이 이별의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애처롭게 울며 흑룡의 이마를 매만졌다. 짧은 인사를 마친 뒤 흑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요?”

“그래. 알의 부화가 예정보다 빨라지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거든. 네가 지닌 어떤 힘이 알의 부화를 이끌어 낸 것 같다.”

“난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인걸요.”

“글쎄.”

흑룡이 내 손에 들린 유피테르와 양옆에 나란히 선 해리, 아스페리츠를 차례로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마와 정령왕을 계약자로 둔 성검의 주인을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하지 않을 텐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인간들이 말하는 평범의 기준이 크게 바뀌었나?”

정곡을 찔린 내가 할 말을 잃고 어색하게 웃자, 흑룡이 입을 크게 벌리며 씩 웃었다.

“그사이에 기준이 바뀐 건 아닌 모양이군.”

흑룡이 기분 좋게 커다란 꼬리를 흔들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내가 어린 일족의 보호자가 된 너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작은 선물이요?”

“그래. 어린 일족을 지켜 줄 보호자는 위대할수록 좋은 법이니까.”

“난 보호자가 된다는 소리 안 했어요!”

나는 기겁해서 펄쩍 뛰었다. 더 이상 생명체를 줍는 건 사절이었다.

“그럼 버릴 건가? 너를 엄마라고 부르는 우리의 어린 일족을?”

“끼유우?”

흑룡의 질문에 어린 흑룡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함이 담겨 있는 반짝이는 눈동자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것 봐라. 너는 어린 일족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악마나 정령왕을 줍고 다녔지.”

흑룡의 말에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동시에 반박했다.

“줍다니! 난 어엿한 계약자야!”

“그렇다! 멋대로 엄마라고 부르며 들러붙은 영악한 드래곤과는 다르다!”

‘날 귀찮게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지만 말이지.’

나는 한 마리의 악마와 한 마리의 정령이 들었으면 펄쩍 뛰었을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룡의 말이 맞아. 난 이 어린 흑룡을 못 버려.’

내 성격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많은 존재들을 내치지 못하고 에렐로 불러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귀엽고 예쁜 거에 약하지.’

“나한테 무슨 선물을 줄 건데요?”

위대한 드래곤이 주는 선물이라면 평범한 선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흑룡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엄청나게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죽기 전에 나한테 준다든가?’

드래곤의 심장은 마나의 집약체라고 들었다. 그걸 얻으면 최강의 마법사가 된다는 이야기가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떠돌고 있었다.

‘드래곤이 워낙 강하니까, 지금까진 드래곤을 때려잡고 심장을 얻은 사람도 없었지.’

하지만 죽음을 앞둔 흑룡이 순순히 제 심장을 내어준다면 쉽게 드래곤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드디어 쩜오에서 벗어나는 거야?’

쩜오 마법사라며 무시당했던 지난날-사실은 내가 아니라 과거의 이브리아가 당했지만-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인간이여. 내 이마에 손을 얹어라.”

흑룡이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설마. 이건 정말 나한테 힘을 넘겨주는 그런 분위기인가? 그런 건가?’

나는 신이 나서 재빨리 흑룡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에 닿는 드래곤의 피부는 차갑고 딱딱했다. 흑룡의 강인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드래곤은 강하다. 인간은 감히 대적하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드래곤을 죽이지 못했다. 방심하던 드래곤이 날개 하나를 잃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말이야.”

“그랬군요.”

“하지만 인간들은 겨우 드래곤의 날개 하나를 날려버린 녀석에게도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찬양하더군.”

흑룡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너는 그런 반쪽이 아니라 진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것이다.”

“……네?”

‘드래곤 슬레이어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껌뻑였다. 해리나 아스페리츠라면 몰라도, 도대체 내가 어떻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냥 쩜오인데.’

“그 이름을 가지면 누구도 너를 우습게 보지 않겠지. 우리 일족의 보호자에게는 그 정도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흑룡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진정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름. 그것이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네? 그게 무슨 말…….”

나는 재빨리 질문을 던졌지만,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흑룡의 몸이 서서히 돌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시발점은 내가 손을 대고 있던 흑룡의 이마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지만, 시작된 석화는 멈추지 않았다.

흑룡은 당황해서 굳어버린 내 앞에서 순식간에 완전한 돌이 되어버렸다.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흑룡을 보지 못했더라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거대한 드래곤 조각상이 있었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이 흑룡, 진짜 죽은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어 해리와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둘 역시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황당한지 조각상이 되어 버린 흑룡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진짜 죽은 것 같은데. 더 이상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심장의 고동도 멈췄어.”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차례로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손가락으로 돌이 된 흑룡을 쿡 찔렀다.

“저, 저기요?”

그 순간 단단해 보이던 돌이 순식간에 재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검은 가루가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고요했던 언덕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와아! 성검의 주인께서 흑룡을 물리쳤다!”

“손만 가져다 댔을 뿐인데 흑룡이 가루가 됐어!”

요란하게 떠들던 병사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언덕을 울렸다.

“드래곤 슬레이어다!”

흑룡의 예언대로였다. 나는 단번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름을 얻었다.

‘그게 내가 원하지 않는 이름이라는 게 문제지만.’

왜 위대한 존재들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계속 안겨주는 것일까. 위대한 존재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제멋대로였던 것일까. 고뇌하는 나의 귓가로 병사들의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왕국에 진짜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타났다!”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자기가 그냥 멋대로 죽어버린 거야!’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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