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흑룡과의 전투가 예고된 아침이 밝았다.
병사들은 라르고 영지의 성문 앞에 모여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는 악명 높은 흑룡. 이 땅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최강의 존재였다.
병사들은 흑룡의 둥지가 있는 동부에서 나고 자란 터라 드래곤의 위대함을 눈으로 보고 자랐다. 그 위대한 존재와 싸우러 가는 길에 불안함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희망을 품었다.
‘성검의 주인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병사들은 성검의 주인, 이브리아 오베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와이번을 길들이고, 트롤의 습격으로 고통받는 서부를 구해내고, 자연을 따르는 엘프의 마음을 얻었으며, 웨어울프가 날뛰는 북부의 소란을 잠재웠다.
‘왕국의 영웅!’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니 성검과 대마법사의 후손이 충성을 맹세한 것이리라.
‘그 사람만 있다면 흑룡과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아.’
병사들은 거대한 성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창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저 사람이 성검의 주인! 대마법사의 후손이 선택한 왕국의 영웅!’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이브리아는 위대한 일들을 모두 해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서늘한 인상과 무표정한 얼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역시 영웅다운 위대함이 느껴져!’
병사들은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린 이브리아를 보며 감탄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까지 느껴졌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이브리아가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지나 선두를 향해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부디 저에게 당신과 악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흑룡과의 전투를 앞두고 큰 힘이 될 겁니다!”
앞을 향해 걷던 이브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친 병사를 바라보았다.
‘히익!’
서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병사가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푹 숙였다. 눈빛이 어찌나 매섭고 싸늘한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이게 위대한 존재들이 지닌 카리스마인가?’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키는 병사 앞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병사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브리아가 어느새 제 앞에 서 있었다.
‘괜히 나섰나?’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브리아의 시선에 병사가 뒤늦은 후회를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의 주위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괜히 나서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 그를 눈빛으로 타박했다.
하지만 그때.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브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 손을 잡는 걸로 힘이 나는 건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병사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병사는 믿을 수 없어 입을 떡 벌렸다. 헛것을 보는 것인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껌뻑였지만 이브리아의 손이 여전히 제 앞에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나? 잡지 않을 거야?”
“아, 아닙니다!”
이브리아가 금방이라도 손을 거둬들일 듯 움직이자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이브리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헉! 내가 진짜 성검의 주인과 손을 잡았어!’
병사는 감격에 차 이브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이 손으로 성검을 쥐고 제가 아는 모든 위대한 일들을 해냈을 것이다.
“야.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거야?”
병사가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이브리아의 손을 쥐고 서 있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해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저 사람은 대마법사의 후손!’
병사는 해리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고 화들짝 놀라서 이브리아의 손을 놓았다.
‘아니, 이 마법사는…….’
한참이나 이브리아를 바라보았던 병사가 이번에는 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잘생겼잖아…….’
같은 남자인데도 반할 것 같은 외모였다. 병사는 힐끗거리며 제 옆에 선 동료와 해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썩은 오렌지.”
평소에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던 제 동료의 얼굴이 썩은 오렌지처럼 보였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제게도 축복을!”
“저에게도 영광을 주십시오!”
“성검의 주인이시여!”
생각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서 있던 썩은 오렌지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이브리아는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병사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모두 잡아주었다.
“나 일주일은 손 안 씻을 거야.”
“난 한 달.”
당당하게 한 달을 주장하는 병사를 보며 동료들이 낄낄댔다.
“너는 원래도 한 달 넘게 안 씻잖아!”
“무슨 소리야? 한 달까지는 아니거든!”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흘리며 떠들어대던 병사들이 곧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그런데 갑자기 좀 덥지 않냐?”
“그러게. 뭔가 뜨거운 느낌인데…….”
열기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한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해리를 발견했다.
적당히 해라, 이 썩은 오렌지들아.
“히익!”
이를 바드득 가는 대마법사를 보며 썩은 오렌지들이 숨을 들이켰다.
* * *
‘내 손을 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몰려드는 병사들과 악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을 잡은 병사들이 좋아하는 걸 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출발하기 전에 사기가 높아지면 좋은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병사들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금세 발길이 뚝 끊어졌다.
‘아쉬운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걸 보면 자의는 아닌 듯하고.’
나는 뒤돌아 원인으로 생각되는 존재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해리죠?”
“뭐가?”
“병사들한테 눈치 준 거잖아요. 안 봐도 뻔해.”
“아냐. 나 아무것도 안 했어.”
‘했네, 했어.’
해리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심증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작은 일에도 질투하며 털을 바짝 세우는 게 주인의 곁을 맴도는 강아지 같아서 꽤 귀여웠다.
“전열을 정비해라!”
병사들 사이의 소란이 잦아들자 라르고 영주가 소리쳐 대열을 정비했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처음 내가 보았을 때처럼 반듯한 대형으로 돌아왔다.
“이제 출발하시죠.”
라르고 영주가 준비된 말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병사들과 함께 이동해야 하니, 오늘은 와이번이 아닌 말을 타고 흑룡의 둥지까지 이동할 생각이었다. 용맹하게 선 말은 아주 거대하고 튼튼해 보였다. 두 명이 올라타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면 기겁하면서 날뛰겠지.’
나는 최대한 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해리에게 눈짓했다.
“해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해리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가볍게 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종이처럼 가볍게 해리의 손에 들려 편안하게 말 위에 안착했다. 그 뒤를 해리가 차지했다. 해리의 가슴팍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은 나를 보는 라르고 영주의 눈이 묘했다.
‘혼자서는 말도 제대로 못 타는 거냐-는 거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정말 혼자서 말도 제대로 못 타는 몸치 중의 몸치인데. 나는 라르고 영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흑룡의 둥지가 있는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흑룡의 날갯짓이 심상치 않았다.
“출발하죠. 흑룡의 둥지로.”
흑룡의 이름이 나오자 라르고 영주를 비롯한 병사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흑룡의 둥지로 출발한다!”
라르고 영주의 선언에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땅의 울림이 흑룡의 둥지에까지 닿을 듯 거대했다. 거대한 땅의 울림을 따라 내 심장까지 둥둥, 요란하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흑룡의 둥지를 향해 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