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흑룡
며칠 뒤 이샤 후작이 나를 찾아와 동부의 상황을 알렸다.
“동부는 준비를 마쳤다.”
비장하게 말하는 이샤 후작의 얼굴이 처음 에렐을 찾을 때보다 반질반질했다. 며칠 동안 산 위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휴식을 취한 덕분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준비를 마쳤네요.”
수많은 동부 귀족들의 뜻을 모아 각지의 병력을 차출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작 며칠 만에 병력이 모였다고 한다.
‘둘 중 하나겠지. 그들이 그만큼 절박하거나, 병력이 아주 형편없거나.’
물론 이샤 후작은 전자를 주장할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오전 중으로 준비를 마치고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출발하죠.”
동부의 병력이 모였다니 더 시간을 끌 이유도 없었다. 오늘 저녁에 출발해 동부에 도착한 뒤,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잠시 정비하고 흑룡의 둥지로 떠나면 될 것 같았다.
“오전 중으로 준비를 마칠 수 있겠느냐?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려면 손이 많이 갈 터인데.”
“그렇겠죠. 하지만 저희는 소규모로 움직일 거라서요.”
“소규모?”
“네. 저와 해리요.”
거기에 아스페리츠도 추가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 내 곁에 정령왕이 있다는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알려졌다가는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할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샤 후작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단 둘이서 흑룡을 상대하겠다는 말이야?”
“아. 하나 더 있네요. 성검. 이 검이 생각보다 능력이 많답니다.”
‘대부분이 쓸데없는 기능이지만요.’
나는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싱긋 웃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샤 후작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계획대로 우리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와이번을 타고 흑룡의 둥지 가장 가까이 있다는 라르고 영지로 이동했다.
라르고 영지에는 이미 동부 각지에서 소집한 병사들이 가득했다. 병사들은 나와 해리가 지나갈 때마다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인사를 했다. 비장한 얼굴로 전투를 준비 중인 병사들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흑룡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동부를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군요. 라르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르고 영주는 나와 해리 둘뿐인 일행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지나치게 깍듯한 대우에 의아해질 정도였지만, 영주의 입을 통해 사정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라르고는 상당히 규모가 작은 영지였다. 실제로 소유한 땅은 이보다 훨씬 넓었지만, 땅의 절반가량을 흑룡이 제 영역으로 차지하고 있어 농사를 짓기는커녕 발도 들여놓지 못한다고 했다. 흑룡에게 매번 값비싼 공물을 바치는 것도 서러운데 땅까지 무단 점거당한 상황이라니.
‘에렐로 도망쳐 온 농민들도 라르고 출신이 가장 많았어.’
나는 이 싸움에 가장 절박한 쪽이 라르고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흑룡의 둥지는 저 언덕 위에 있습니다.”
영주가 성벽에 올라 먼 곳에 점처럼 보이는 작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위에 분주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검은색의 작은 생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흑룡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곳에서야 작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아주 거대한 언덕일 것이다. 흑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날갯짓만 겨우 보일 만큼 작지만, 실은 언덕만큼이나 거대할 것이다.
“평소에는 늘어져라 잠만 자는 놈인데, 최근 들어 움직임이 더 많아졌습니다. 놈도 우리가 자기를 토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라르고 영주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흑룡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곧 내게로 눈을 돌렸다.
“흑룡을 어떻게 상대하실 건지 계획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동부 연합의 병사들도 그에 맞춰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어차피 일반 병사들은 흑룡을 상대하기 힘들 거예요.”
드래곤은 신체 능력이 뛰어난 데다 마법까지 쓴다. 평범한 인간이 당해낼 수 없는 존재였다. 병사들의 역할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고, 만약의 경우 흑룡의 발을 잠시나마 묶어두는 것 정도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언덕 주변을 지키고 있어 줘요. 그럼 우리가 흑룡을 때려잡을게요.”
“흑룡을 때려잡아요? 두 분이서요?”
라르고 영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계획을 듣고 이샤 후작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나는 성검의 주인이고, 이쪽은 대마법사 후손이잖아요.”
놀란 얼굴이었던 라르고 영주가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 대단한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이시니까요. 흑룡도 충분히 상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주도 그 영웅 서사시를 알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라르고 영주가 고민도 않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의 주인께서 보여주시는 활약에 저는 물론이고 우리 병사들도 크게 감명받았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병사들이 과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와 해리를 쳐다보더라니.
‘카시안이 왕이 되면 그 영웅 서사시를 못 부르게 하는 법이라도 만들라고 할까.’
나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리는 라르고 영주가 내어준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리의 이상한 태도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평소라면 귀찮을 정도로 내 옆에 붙어 있었을 해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소파에 웅크려 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날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닌 듯한데.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해리. 우리 이거 그만하면 안 돼요?”
“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는데도 해리가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모른 체를 했다.
“계속 이러면 나 진짜 화낼 거예요. 그래도 돼요?”
화를 낸다는 말에 해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협박 아닌 협박이 먹힌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조금 더 강하게 해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우릴 방으로 안내해 준 기사가 참 잘 생겼던데.”
움찔.
“어쩔 수 없네. 해리가 안 놀아주니까 그 사람이랑 놀아야겠다.”
또 움찔.
혼잣말인 척 하지만 사실은 해리가 들으라고 일부러 떠드는 소리였다.
‘이젠 쐐기를 박아야겠군.’
나는 연신 움찔거리는 해리를 슬쩍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설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그 기사가 밖에 있으려나?”
나는 일부러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이 문에 가까워질수록 해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해리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좀 붙잡아라.’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초조하게 해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해리가 다른 남자와 놀아야겠다며 나서는 나를 붙잡지 않으면 충격이 대단할 것 같았다.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개가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해서는 인사도 안 하는 걸 보는 기분이겠지.’
심지어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소박맞는 이 상황이 억울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지 마.”
내 손이 문고리에 닿았을 때,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해리가 살포시 옷자락을 붙잡아 내 걸음을 막았다.
“다른 놈이랑 놀면 싫어. 나하고만 놀아줘. 응?”
평소와 같은 칭얼거림이었다. 나는 그제야 기분이 풀어져 헛기침하며 뒤돌아섰다. 울먹이며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해리를 보고 있으니 상황에 맞지 않게 계속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애써 미소가 그려지려는 것을 참아내며 팔짱을 끼고 해리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나랑 안 놀아준 건 해리거든요?”
자기가 날 피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인지 해리는 제대로 된 변명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나랑 놀기 싫어졌어요?”
내 질문에 해리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빨리 나 안아줘요.”
나는 온천에서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본 해리는 이번에도 선뜻 내 품에 뛰어들지 못하고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널 안으면 입 맞추고 싶어질 거야.”
“뭐가 문제인데요? 입 맞추면 되죠.”
“하지만, 입 맞추면 널 잡아먹고 싶어질 텐데. 난 그렇게 자제심이 강한 악마가 아니란 말이야.”
해리를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난 하고 싶으면 해야 하고, 갖고 싶으면 가져야 되는 그런 못된 악마야. 그러니까 네가 울어도 멈추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지나치게 음흉해지는 게 무서워서 아예 날 피했다는 거야?’
아니. 이 바보 같은 악마가 이제 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런 문제를 고민할 시기는 초저녁에 지나가 버렸다고.’
나는 황당해져서 헛웃음을 흘렸다.
“말했잖아요. 언제든지 잡아먹으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도 해리의 입에서 ‘하지만’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난 못해. 널 아프게 하는 건 싫단 말이야.”
해리가 내 품에 폭 안기며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게 제일 좋아. 네 가까이 가면 난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또, 잡아먹고 싶을 거니까.”
나는 익숙하게 품을 파고드는 해리의 등을 토닥이며 눈을 굴렸다.
“하지만 이미 가까이 왔잖아요. 이제 어떡해요?”
“몰라. 다 네 잘못이야. 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는데, 주인님이 날 꼬셨잖아.”
“응. 그랬죠. 내가 꼬시긴 했는데…”
반쯤은 상황에 떠밀려서 꼬시게 된 꼴이라 조금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핑계를 대지 않는 책임감 넘치는 주인이지.’
“내가 꼬셨으니까,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건가?”
내 말에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다.
“그, 어, 아프다고, 힘들다고, 그런, 그랬는데!”
나는 횡설수설하는 해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 아프게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처음은 아픈 거랬어.”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속는 셈 치고 해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그랬는데요?”
“마담 루이제가.”
“그걸 보여 준 사람은 당연히…….”
“엠마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생각 그대로의 흐름에 미간을 슬쩍 찌푸리는 나를 보며 해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엠마가 신간이 나왔다면서 보여줬는데, 첫날밤을 맞이하는 어린 연인의 이야기였어. 그런데 남자가 크고 서툴러서 여자가 아프다면서 엉엉 울어버렸단 말이야.”
해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마담 루이제에게 미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 격정적인 관능 소설을 쓰던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첫날밤의 풋풋함이야?’
나는 나조차도 기겁하게 만들었던 미친 수위의 소설을 떠올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냥 계속 그런 글이나 쓰시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나의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듯 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어떻게 널 아프게 할 수 있어? 난 네가 나 때문에 아픈 거 싫어. 나 때문에 우는 것도 싫고.”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해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촉촉했다.
“그러니까 난 참을 거야! 참을 수 있어!”
‘분명히 날 너무 좋아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긴 한데.’
비장한 선언에 해리를 바라보는 내 두 눈이 흐려졌다.
‘……그러니까 누가 그걸 바라냐고.’
배려의 방향이 한참이나 잘못됐다. 답답한 심정으로 바보 같은 악마를 바라보고 있으니, 물이 담겨 있던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아스페리츠가 고개를 쑥 빼고 나타났다.
[와, 저 머저리. 생각보다 더 모자라잖아?]
아스페리츠가 해리의 주위를 맴돌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내 허리춤에 걸려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유피테르도 조심스럽게 아스페리츠의 말에 동조했다.
[원래 저 악마는 모자랐습니다, 정령왕.]
[그동안 이런 꼴을 옆에서 지켜보느라 고생이 많았겠네, 성검.]
[원래 악마는 모자라서 악마인 거니까요. 제대로 채워졌으면 그게 악마겠습니까.]
[그건 또 옳은 말이군! 역시 성검은 똑똑해.]
[이 자리에서 멍청한 건 저 모자란 악마 하나뿐이지요.]
아스페리츠와 유피테르의 만담을 듣고 있던 해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라고? 내가 뭐가 모자란데!”
[그걸 모르는 점이 모자란 거지요, 악마.]
[그래.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 악마.]
아스페리츠와 유피테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브리아! 진짜 내가 모자라?”
두 존재의 협공에 해리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만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해리가 틀렸다. 나는 힘없이 해리를 지나쳐 침대로 향했다. 그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해리를 보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잠이나 자요, 해리. 내일 흑룡이랑 싸우려면 체력을 비축해놔야죠.”
슬쩍 이야기를 돌렸지만 결국 아스페리츠와 유피테르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말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해리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모자라? 멍청해? 그런 거야?”
“해리.”
나는 연신 질문을 던지는 해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자요.”
평소라면 단번에 침대로 달려왔을 해리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돼?”
“응. 지금의 해리를 보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한 해리에게 잡아먹히길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틀렸다.
그러니까.
‘내가 해리를 잡아먹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