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1/156)

* * *

나는 해리, 유피테르, 아스페리츠를 한 자리에 모아 두고 회의를 시작했다. 늘 내 다리에 장착되어 있던 유피테르도 오늘은 당당한 회의의 참석자로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할게요. 안건은 동부에 사는 드래곤, 과연 우리가 잡을 수 있을까-예요.”

“당연히 잡을 수 있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리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성검이나 물귀신의 힘까지 필요하지도 않아. 나 혼자 간단하게 때려잡을 수 있어. 나만 믿어, 주인님.”

해리의 당당한 말에 금세 아스페리츠의 반박이 돌아왔다.

[드래곤은 인간계 최강의 존재다. 물론 너와 나는 인간계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불도깨비.]

“뭐냐, 물귀신. 너 고작 드래곤 따위에게 쫄았냐?”

[뭐라고? 나는 정령들의 왕이다. 고작 드래곤 따위에게 쫄지 않는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걸 쫄았다고 하는 거다, 이 겁 많은 물귀신아.”

[나는 쫄지 않았어!]

나는 악마와 정령이 투덕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가장 이성적인 유피테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피테르의 생각은 어때요? 우리가 흑룡을 이길 수 있을까요?”

[물론 이길 수 있습니다. 드래곤은, 특히 흑룡은 아주 강력한 영물입니다만, 악마와 정령왕, 거기에 저까지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힘을 쓰려면 주인님께서 직접 저를 가지고 드래곤을 마주하셔야 합니다.]

“음.”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금세 유피테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챘다.

“내가 싸우는 데 짐이 될 거라는 소리죠?”

[송구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상당히 매정한 대답이었지만 나 역시 유피테르의 말에 납득했다. 나는 조금만 걸어도 지치는 저질 체력에다 마력도 쩜오에 검은 다루지도 못한다. 객관적으로 나의 전력은 0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전력 0에 그치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지.’

보통 이런 짐들은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 전력에 마이너스로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제대로 싸우려고 한다면 나 같은 짐은 아예 빠져주는 게 일행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럼 나와 유피테르가 빠지고 해리와 아스페리츠만 보내면 어떨까요? 나 같은 짐이 있는 것보단 전력이 조금 줄어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돌려 해리와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이 비린내 나는 물귀신이! 네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냐?”

[뭐? 그러는 너는 뇌가 녹아버려 생각 따위는 없는 거냐, 이 불도깨비야!]

유치한 말투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고 있는 한 마리의 악마와 한 마리의 정령을 보고 있자니 눈이 저절로 흐려졌다.

[……저 둘만 보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유피테르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던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안 괜찮을 것 같아요. 저 둘만 보냈다가는 분명히 대형 사고를 칠 거예요.”

[아주 깊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유피테르와 나는 확신했다. 역시 저 둘만 흑룡에게 보내는 건 무리였다.

“어쩔 수 없네요. 단순무식한 작전을 세울 수밖에.”

[단순무식한 작전이라고 하시면?]

“간단해요. 단체로 몰려가서, 다 같이 때린다. 원래 몰매에는 장사 없는 법이거든요.”

내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님.]

“괜찮아요. 어떻게든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점이 더욱 불안한 겁니다, 주인님.]

유피테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해리와 아스페리츠의 싸움은 끝날 줄을 몰랐다.

‘내가 다시는 이 녀석들을 데리고 회의를 여나 봐라.’

나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 * *

흑룡을 이기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하니 결론은 간단해졌다. 동부로 가서 흑룡과 싸우고, 더 이상 인간에게 공물을 뜯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말이냐?”

내 선언에 이샤 후작이 활짝 웃었다. 선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소가 참 보기 좋았다.

‘내가 정말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같은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내가 웃을 때마다 사람들이 공포에 덜덜 떠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저희는 흑룡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잘 몰라요. 길을 안내해 줄 안내자가 필요해요.”

“그건 걱정 마라. 동부 귀족 연합에서도 병력을 소집해 흑룡 토벌을 도울 테니까. 그들과 함께 흑룡의 둥지로 가게 될 거다.”

“그렇다면 문제없네요.”

사실 동부에서는 어떠한 병력도 지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나만 덩그러니 흑룡의 둥지로 밀어넣을 줄 알았는데.’

사실 흑룡과 싸우는 데 그들이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덩그러니 보내지는 것과 뒤에서 많은 병력이 지원해주는 건 기분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병력을 소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그동안 너 역시 휴식을 취하며 흑룡을 상대할 준비를 할 수 있겠지.”

사실 내게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었다. 손에는 성검을 들고, 오른쪽에는 해리, 왼쪽에는 아스페리츠를 세운다. 이 이상의 준비가 필요할까?

하지만 여유가 주어진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었다.

‘그 사이에 에렐의 온천을 홍보할 수도 있고 말이지!’

이샤 후작은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이자 동부의 맹주라,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입김이 상당했다. 그의 눈과 귀에 들어간 정보는 동부 전역은 물론 귀족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에렐에 머무르실 건가요?”

“그래. 준비가 되면 너와 함께 동부로 갈 생각이다. 물론 네가 불편하다면 먼저 이샤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으마.”

이샤 후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불편하긴요. 제 외숙이신데요.”

“이브리아.”

이샤 후작이 조금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말해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에렐에서 너의 준비를 돕겠다.”

“준비. 물론 필요하죠.”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몸에 쌓인 피로와 부정을 씻어내 경건한 마음으로 흑룡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 * *

“이건…….”

가파른 산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보며 이샤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가 왜 공중에 매달려 있는 거지?”

그의 말이 옳았다. 쓰임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케이블카는 공중에 매달린 마차처럼 보일 뿐이었다.

‘사람과 물건을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아.’

다만 마차를 끄는 말과 땅을 구르는 바퀴가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에렐에 처음 만들어진 이 케이블카의 동력은 청요석이 지니고 있는 마력이었다.

“이걸 타고 온천으로 갈 거예요.”

“……온천? 이걸 타고?”

이샤 후작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 얼굴과 케이블카를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물건의 원리는 아주 복잡하죠. 원하시면 설명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이샤 후작의 뒤로 들뜬 기색의 메이슨이 불쑥 나타났다. 메이슨의 옆에는 리던과 카시안도 함께였다.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 메이슨과 달리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메이슨과 함께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가 설명하는 케이블카의 원리를 질리도록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도 몇 번이나 당했지.’

메이슨은 아주 훌륭한 백과사전이었지만, 상대가 궁금하지 않은 지식도 강제로 알려준다는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깨달았다. 주먹으로 맞는 것도 아프지만, 지식으로 두드려 맞는 것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라는 걸.

‘지금 당장 저 지식 폭력배를 막아야 돼!’

나는 메이슨의 입이 트이기 전에 재빨리 문을 열어 케이블카에 올라타며 싱긋 웃었다.

“긴 설명보다는 한 번 체험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내가 방금 자신을 지식 폭력배의 마수에서 구해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샤 후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설명보단 빨리 이 기묘한 마차를 타보고 싶군요.”

“그렇다면야.”

이샤 후작의 말에 메이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이 현실이 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요.”

메이슨이 열린 문을 지나 자연스럽게 케이블카에 탑승했고, 그 뒤를 이샤 후작이 뒤따랐다. 하지만 리던과 카시안은 제자리에 못 박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케이블카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하세요? 어서 타요.”

나의 재촉에 리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안전한 건가?”

리던의 질문에 카시안도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이런 빈약해 보이는 줄이 마차며, 이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모두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평소와 달리 말이 참 많아진 두 남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무서우세요?”

내 말에 노예 왕자들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를!”

“말도 안 됩니다!”

동시에 튀어나온 소리에 리던과 카시안이 민망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헛기침했다.

“전 그저 이 낯선 물건의 안전성이 의심될 뿐입니다.”

“전하. 저의 계산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카시안의 말에 이미 케이블카에 타고 있던 메이슨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5살 이후 단 한 번도 계산을 틀린 적이 없습니다.”

메이슨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던과 카시안이 할 말을 잃고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 내키지 않는 얼굴로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왕자님들이 이렇게 겁쟁이일 줄은 몰랐네요. 왕을 선택할 임무를 받은 자로서 나라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내가 혀를 끌끌 차며 케이블카의 문을 닫자 리던과 카시안의 얼굴이 벌게졌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합리적인 의심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예예. 당연히 그러시겠죠.”

나는 그들의 항변을 한 귀로 흘리며 케이블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라파쉬를 바라보았다. 나의 눈짓에 라파쉬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청요석이 박힌 동력원을 조작했다. 곧이어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블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 중턱까지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바퀴도, 말도 없는 마차가 조금씩 높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서서히 달라졌다. 점점 작아지는 풍경 속에 삶의 흔적으로 가득한 마을과 아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들판이 한 폭에 담겨 있었다.

‘이런 풍경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단순히 산을 오르는 이동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케이블카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 처음에는 긴장된 얼굴로 굳어 있던 사람들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건 케이블카에 대한 온갖 이론을 쏟아내던 메이슨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블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메이슨 역시 직접 타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샤 후작이 창가에 바짝 붙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눈에 놀라움과 감탄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겁니까?”

원리. 창밖을 바라보던 이샤 후작이 금기의 단어를 꺼내고야 말았다.

‘안 돼!’

나와 리던, 카시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어떻게든 메이슨의 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원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귀를 쫑긋거렸던 메이슨이 우리보다 더 빨랐다.

“이제 원리가 궁금해지셨군요.”

창밖의 놀라운 풍경을 볼 때보다 더 상기한 얼굴의 메이슨이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르래의 원리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니까 그 도르래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케이블카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르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 거 안 궁금하다고!’

하지만 지식 폭력배는 그런 우리의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식 폭력배인 거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귀를 닫았다. 메이슨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 *

우리는 메이슨의 지식 폭력에 잔뜩 지친 상태로 목적지에 다다랐다.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한바탕 이론 이야기를 쏟아 낸 뒤 만족한 메이슨뿐이었다.

“여기가 새롭게 개발한 에렐의 온천이에요.”

산 중턱에 솟아난 온천은 저택 근처의 작은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풍경도 아주 훌륭해서, 리조트로 개발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렐에, 아니, 왕국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샤 후작이 감탄한 얼굴로 온천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먼 하늘 위로 와이번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온천의 풍경이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완벽한 휴양지죠.”

나는 웃으며 온천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곳이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가 될 것이다.

“이왕 오셨으니 온천욕을 즐기시는 건 어때요? 별장에 개인 욕탕이 준비되어 있거든요. 모두 온천수를 끌어왔죠.”

“별장 모두에 온천수를?”

“네.”

내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귀족들에게 개인 욕탕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샤 후작의 반응을 보니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군.’

감탄하며 별장을 바라보는 이샤 후작의 반응에 뿌듯하게 웃고 있는 내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천수는 어떻게 끌어온 거지요?”

메이슨이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빛냈다.

“각 별장에 모두 온천수를 끌어오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웠을 텐데. 이번에도 역시 드워프의 기술을 활용한 겁니까?”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지식 폭력배에 이어 물음표 살인마냐.’

메이슨을 괜히 데려온 것은 아닐까.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는 네 사람을 별장으로 안내한 뒤, 나 역시 별장 하나를 차지하고 욕탕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풀었더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물론 기분이 좋은 이유는 더 있었다.

‘회원권을 팔았어!’

온천 리조트를 직접 체험한 이샤 후작은 회원권 구매를 결정했다. 회원권의 가격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 상당히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선별을 통해 초대받은 사람만 회원권을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결국 넘어오고 말았다.

-회원권은 원한다고 해서 모두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리조트에서 특별히 선정한 분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그 초청장을 받은 분들만 회원이 될 수 있어요.

-사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말이냐?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물건을 내놓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적당한 값을 치르고 물건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우위에 서는 건 구매자다. 판매자는 어떻게든 물건을 팔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평범한 판매 과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정한 기준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물건을 팔겠다고 선을 그었다.

‘일종의 프리미엄 마케팅이지.’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판매하면서 물건의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소수, 최상위의 프리미엄 귀족들에게만 판매하는 회원권. 그것을 가진 선택된 회원. 이 타이틀은 자신이 상류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귀족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소위 말하는 명품들이 이런 전략을 쓰지.’

-아직 회원 초청 명단은 만들지 않았지만, 그 안에 이샤의 이름이 있으리란 건 확실하지요. 그래서 제가 오늘 외숙께 이 리조트를 보여드리는 거고요. 아마 회원은 100명 안쪽이 될 거예요.

적당히 상대를 높여주면서 내가 가진 물건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슬쩍 흘린다. 명예를 원하는 자들에게 백이면 백 먹혀드는 전략이었다.

‘이제 동부로 돌아간 이샤 후작은 자랑스럽게 이 회원권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그러면 주변 귀족들도 이 회원권을 사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나의 계획에 리던과 카시안도 도움을 주었다.

먼저 내 전략을 눈치챈 건 리던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회원권을 하나 구매하지. 카시안, 너도 하나 사.

-왕자님들이 회원권을요?

-왜? 설마 우린 회원 자격이 안 되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죠.

왕족이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면 프리미엄은 더 높아진다. 나로서는 당연히 환영이었다. 하지만 왕족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회원권으로 과시하지 않아도 그들은 모든 귀족들의 정점에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의아하게 리던을 바라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이걸 사면 그대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거잖아? 난 그대를 도와주고 싶어.

-왜요?

-말했잖아. 내가 누굴 모시고 싶은지.

그렇게 말하는 리던의 눈은 진지했다.

‘에렐에 남고 싶다는 게 진심이었구나.’

나는 머리를 끝까지 온천 안에 밀어 넣으며 생각에 빠졌다.

‘이제 곧 왕이 될 사람을 결정해야 돼.’

점점 약속된 결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흑룡을 때려잡고 돌아오면 대충 그 시기가 아닐까 싶은데….’

사실 리던이 왕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바꾼 시점에서 나의 고민은 간단해졌다.

‘이왕이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게 낫잖아. 결정의 날이 오면 카시안을 선택하면 돼. 카시안은 잘 할 거야.’

태양신이 준 소설 속에서 카시안은 훌륭한 왕이었다. 아마도 태양신은 이 선택을 위해 내게 카시안이 왕이 되는 미래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물속에 들어가 고민을 이어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숨이 부족해졌다. 나는 물속에서 빠져나오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옷이 푹 젖어 몸이 아주 무거웠다.

‘이럴 때 필요한 사람이 있지.’

[해리.]

나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드라이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름을 부르자마자 응답했을 해리가 조용했다.

[해리?]

[……응.]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니 그제야 해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해리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아…… 그런 일이 좀 있기는 했지…….]

해리가 이렇게까지 기운 없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이쪽으로 와요.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얼굴…… 지금 꼭 봐야 해?]

이번에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내가 부르는 데 해리가 거부하다니? 처음 겪는 상황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자기와 놀아달라며 칭얼거리는 해리를 달랜 적은 있지만, 내가 불렀을 때 싫다며 내빼는 해리를 설득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하루 종일 안 놀아줘서 삐졌어요?]

[그런 거 아냐.]

[그런데 왜 내 얼굴이 보기 싫어요?]

[아냐! 네 얼굴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해리가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리더니 곧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침울한 얼굴로 나타난 해리가 내 몰골을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라서 손을 뻗었다.

“이렇게 젖은 채로 있으면 또 감기 걸려!”

해리가 내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열기를 불러오자, 물에 푹 젖어 있던 몸이 금세 보송보송해졌다.

‘역시 최고의 드라이어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태평하게 감탄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 몸의 물기를 모두 날려버린 해리가 다시 침울한 얼굴이 되어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진짜 적응 안 되네.’

늘 내게 치근덕거리던 해리가 내게서 거리를 두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해리.”

“응.”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며 해리를 부르자, 해리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왜 도망쳐요?”

“안 도망쳤는데?”

“지금 도망치고 있잖아요.”

“아닌데?”

나는 다가가고, 해리는 물러서고.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나는 해리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알았어요. 가까이 안 갈 테니까 이야기해봐요. 오늘 도대체 왜 이래요? 반응이 영 이상하잖아요.”

“아냐. 나 안 이상해.”

“아뇨. 누가 봐도 이상하거든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가 이렇게 이상할 이유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역시 내가 안 놀아줘서 토라진 거죠? 알았어요. 지금부터 놀아줄게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이리 와요! 안아줄게요!”

하지만 이번에도 해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 나 너랑 안 놀 거야.”

처음 내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시무룩한 얼굴을 한 해리가 단번에 내 제안을 거절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해리의 빈자리를 보며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껌뻑였다. 활짝 벌린 두 팔이 상당히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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