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9/156)

* * *

이브리아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자마자 의사를 데리러 갔던 엠마가 방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본 엠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개 요정님. 의사가 왔는데…….”

이브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의 귀족 여성이었다. 해리와 연인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외부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브리아 앞에서 실없이 구는 해리라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엠마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빠르게 알아챘다.

“알았어.”

해리가 잠든 이브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이 없어도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불 속에 작은 불의 기운을 남겨 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들여보내도 돼.”

“예.”

허락이 떨어지자 엠마가 서둘러 의사를 안으로 들였다. 의사는 빠르게 이브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리의 시선에 긴장한 듯 연신 식은땀을 흘려댔다.

“몸살감기입니다. 몸에 피로도 많이 쌓이신 것 같고요.”

진찰 끝에 의사가 몸을 일으켰다.

“처방해드린 약을 드시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면 금세 나아지실 겁니다.”

“충분한 휴식이 얼마를 이야기하는 건데?”

“적어도 이틀은 일에서 손을 떼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해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거, 사흘로 하자.”

“예?”

“아니, 닷새. 닷새가 좋겠어.”

“예에?”

의사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자 해리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브리아에게 닷새는 쉬어야 한다고 말해줘. 알겠지?”

“예에……”

해리가 눈을 부라리자 의사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금세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해리가 이번에는 엠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잠시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이브리아를 좀 부탁해.”

엠마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해리가 한시도 이브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엠마의 질문에 해리가 씩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손봐줄 놈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 * *

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한 기운을 따라 발을 놀렸다. 원래부터 물과 불은 상극이었다. 악마 중에도 물을 다루는 녀석들이 있는데, 해리는 그들과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짜증나는 물비린내.’

해리는 코웃음을 흘리며 축축한 기운이 응축된 곳에 멈춰 섰다. 이브리아와 함께 온 적이 있었던 저택 인근의 온천이었다.

“야. 물귀신.”

해리의 부름에 고요하던 수면이 잘게 떨리더니, 곧 물속에서 아스페리츠가 튀어나왔다.

[왜. 불도깨비.]

“내가 왜 불도깨비야?”

[그러는 난 왜 물귀신인데?]

허공에서 만난 두 존재의 눈빛에 불이 튀고 있었다.

“호칭은 됐고.”

오랜 눈싸움 끝에 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넌 좀 맞자.”

해리가 손을 들어 아스페리츠를 공 모양의 불길 안에 가두었다. 물 한 방울 빠져나갈 틈 없이 사방이 꽉 막히자 아스페리츠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뭐, 뭐하는 거야? 왜 이래?]

“말했잖아. 우선 좀 맞자고.”

해리가 씩 웃으며 불의 공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공의 움직임은 현란했다.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꺼졌다가, 좌우로 흔들리기도 하며 신나게 춤을 췄다.

[악! 윽! 야! 헉!]

공이 움직일 때마다 아스페리츠의 비명이 쏟아졌다.

[야! 이러다 내 몸 다 없어지겠어!]

“왜? 재생이 특기라며? 그렇게 해 보지 그래?”

[네 불이 수분을 끌어오는 걸 막고 있잖아!]

“그래? 안타깝네.”

[너 이러기야? 같은 계약자를 둔 동지끼리?]

꽤 즐거운 얼굴로 아스페리츠를 괴롭히고 있던 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지? 너 따위와 내가?”

해리가 코웃음을 흘리며 더욱 요란하게 공을 튕겼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스페리츠의 비명이 더욱 높아졌다.

[야! 야! 나 이제 진짜 심장밖에 안 남았어! 이러다 나 소멸한다니까?]

“소멸해.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소멸하면 균형이 깨지는 거 알지? 새로운 정령왕이 태어날 때까지 자연의 균형을 유지할 존재가 사라지는 거라고!]

“그게 뭐.”

해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연의 균형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아스페리츠의 말에는 해리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면 인간들이 제일 고생할 텐데, 그럼 우리 계약자도 힘들어질걸?]

요란하게 춤을 추던 공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칫.”

해리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흔들자, 아스페리츠를 감싸고 있던 불길이 사라졌다. 단순한 엄살은 아니었던지 아스페리츠의 외관은 너덜너덜했다. 그는 재빨리 온천의 물속으로 뛰어들어 제 몸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시켰다.

[이봐, 불도깨비.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거야? 왜 공격하는데?]

“너 때문에 내 주인님이 아프잖아.”

[네 주인님? 이브리아 오베론 말이야?]

아스페리츠가 눈을 크게 떴다.

[이브리아 오베론이 아파? 나 때문에? 왜?]

“걔가 춥다는 데도 무시하고 계속 껴안았다며 이 물귀신아.”

[겨우 그걸로 아파?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은 정말 약하구나.]

“감탄이 나오냐? 이 미친 정령이.”

해리가 아스페리츠를 향해 불덩이를 마구 날렸다. 물속에 들어가 제 힘을 찾은 아스페리츠는 아주 가볍게 날아오는 불덩이들을 피했다.

[이봐, 불도깨비. 내가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너 이브리아 오베론을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랑한다는 감정, 뭐 그런 걸 느끼는 거야?]

“너 따위에게 대답할 것 같아?”

해리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소리쳤다. 물론 그 얼굴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야. 너 진짜 웃긴다.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수가 있어?]

아스페리츠가 배를 잡고 요란하게 웃기 시작했다.

“닥쳐. 웃지 마.”

그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해리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데?”

[아니, 그렇잖아. 엘프나 인간? 서로 사랑할 수 있지. 드워프와 인간? 역시 사랑할 수 있어.]

아스페리츠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리의 옆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악마와 인간? 정령과 인간? 말도 안 되지. 존재의 근원부터가 다르잖아. 우리와 인간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간과 악마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힘, 수명, 사고방식. 사실 외형이 비슷하다는 걸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었다.

[너, 인간이 우리와 생긴 게 비슷하다고 같은 종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스페리츠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인간과 동료는 될 수 있어. 하지만 연인은 안 돼. 개와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연애는 못 하는 것처럼.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불도깨비.]

해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고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스페리츠의 말 어디에도 틀린 곳이 없어서 짜증스러웠다.

[아마 이곳에서 너한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줄게.]

해리의 어깨에 얹은 아스페리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 차려, 불도깨비. 나는 홀로 남겨져서 후회하고 상처받는 존재들을 많이 봤어.]

“그딴 거 신경 안 써.”

해리가 아스페리츠의 손을 쳐내며 픽 웃었다.

“어차피 그건 내 상처잖아.”

해리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 같은 존재와 인간의 사랑에서 손해를 보는 건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원해서, 내가 손해를 보겠다는데 그게 왜?’

다른 존재가 오지랖을 떨며 조언하고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해리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시작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난 이브리아만 괜찮으면 돼. 나는 그 애의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줄 수 있어.”

해리의 말에 아스페리츠가 조금 안쓰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이미 늦었네, 이미 늦었어.]

* * *

나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이불 속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얇은 옷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손으로 대충 땀을 닦아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무거운 이불이 허리 아래로 떨어졌다.

‘목마르다.’

땀을 한가득 흘린 덕분인지 몹시도 목이 탔다.

[여기, 물.]

목이 마르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도 아닌데, 타이밍 좋게 눈앞에 물이 내밀어졌다. 평범하게 컵에 담긴 물이 아니었다.

‘……물 덩어리?’

나는 눈을 깜빡이며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물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직접 먹여주기까지 해야 하는 거냐?]

“아.”

나는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 꽂혔을 때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스페리츠가 물을 만들어 준 거구나.’

당연하게도, 나는 아스페리츠에게 물을 먹여달라고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사실 허공에 떠 있는 이 물도 조금 의심스러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난치러 온 건 아닌가 보네.’

해리가 아스페리츠를 혼내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니, 내가 자기 때문에 아프다는 걸 알고 사과라도 하러 온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정상적인 부분도 있었구나.’

나는 아스페리츠에 대한 평가를 미친 정령에서 상식은 조금 있는 미친 정령으로 수정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마셔? 내가 이런 물 덩어리는 마셔본 적이 없어서.”

[간단하지. 입 벌려.]

아스페리츠의 말대로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물이 쏙 들어왔다. 나는 입안에 가득 찬 물을 그대로 삼켰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한결 정신이 맑아졌다.

“고마워.”

[별말씀을.]

아스페리츠가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인사하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사과하러 온 게 아니었나?’

어쩌면 물을 준 것이 그 나름의 사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미친 정령은 진짜 정수기가 될 작정인가.’

나는 웃음을 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은 방음이 대단히 잘 되어 있었다. 이곳에 소리가 흘러들어올 정도라면 바깥이 상당히 소란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그대로 문을 향해 걸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누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낮은 목소리로 남자들이 서로의 주장을 외치며 다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그대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서 소리를 높이고 있던 두 남자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브리아!”

“영주님!”

해리와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두 사람의 깜짝 놀란 얼굴이 내 얼굴에 닿았다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해리의 얼굴은 벌게졌고, 남작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얇은 슬립만 입은 채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작! 보지 마!”

“……이미 안 보고 있습니다.”

해리가 재빨리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얹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단추까지 모두 꼼꼼하게 잠근 해리 덕분에 나는 외투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너무 과한 방어 아닌가.’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양손을 외투의 소매에 꿰어 넣었다. 소매가 어찌나 길었는지 내 손끝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와. 엄청나게 크다.’

해리에게는 딱 맞는 옷인데 내가 입으니 어깨선이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새삼 남자와 여자의 체격 차이를 실감하며 외투의 소매를 접었다. 두어 번 소매를 접자 그제야 제대로 두 손이 드러났다. 손이 드러나니 갑갑함이 덜한 것 같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두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안까지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 소리 때문에 깼어?”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며 인세티아 남작을 노려보았다.

“아주 좋으시겠네. 뜻대로 이브리아를 깨워서.”

하지만 인세티아 남작은 해리의 빈정거림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영주님. 몸 상태가 어떠십니까?”

“음. 생각보단 가벼워요. 사흘이나 푹 쉬기도 했고.”

사실 몸은 어제부터 멀쩡했다. 하지만 해리가 절대 침대에서 나오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쉬었다.

‘의사는 닷새를 쉬라고 했지만…….’

그 말을 하는 의사가 지나치게 해리의 눈치를 봤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역시 그것이 온전한 의사의 의견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말해 봐요.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모양이죠?”

아무리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세티아 남작이라지만 아픈 사람을 재촉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태양신을 만난 뒤 의욕을 잃고 있을 때, 먼저 쉬라고 말을 꺼낸 사람도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찾아와 내 방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해리와 소리까지 높였다면 내가 꼭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예.”

내 질문에 남작이 면목 없다는 듯 민망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가 상대하는 건 상당히 무례가 될만한 분인지라.”

인세티아 남작은 에렐의 공식적인 영주였다. 이제 나에 대한 소문이 워낙 많이 퍼져 실질적인 영주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남작은 공식적인 에렐의 관리자였다. 그런 사람이 상대하는 것이 무례가 될 만한 손님이라면 몇 없었다.

‘아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왕족뿐이지 않나. 리던과 카시안은 이미 에렐에 있으니, 손님이라며 찾을 왕족은 왕이나 왕비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는데.’

도무지 손님의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손님인데요?”

내가 끝내 손님의 정체를 추측하지 못하고 남작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샤 후작이십니다.”

“이샤 후작이라면…….”

나는 빠르게 머릿속의 정보를 떠올렸다. 어릴 적 세상을 떠난 이브리아의 어머니, 그녀의 남동생이 지금의 이샤 후작이었다.

‘선대 이샤 후작은 일찍이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준 뒤 요양 중이라지.’

내가 정보를 떠올림과 동시에 인세티아 남작이 다시 한번 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예. 영주님의 외숙이시죠.”

이제야 인세티아 남작이 말한 무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집안 어른이 오셨는데 내가 환영 인사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상당한 무례겠네요.”

“물론 그런 일로 꼬투리를 잡을 분은 아니십니다만…….”

인세티아 남작은 이샤 후작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지도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오베론 공작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가문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무례를 저지를 필요도 없죠.”

내 말에 인세티아 남작도 동의한다는 듯 살짝 웃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말씀하시던가요?”

“아뇨.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런 이야기가 아닐지…….”

하필 동부에서 농민들이 대거 몰려온 직후의 방문이었다. 이샤 후작의 입에서 나오게 될 이야기의 주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후작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영주님을 찾으시기에 우선 응접실로 모셔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준비할 시간이 조금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나는 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은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곧장 손님을 맞이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준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인세티아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여 공연을 준비해뒀습니다.”

“공연이요?”

“예. 마침 저택에 음유시인이 와 있거든요. 그때 영주님을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를 궁금해하시기에 초청해뒀죠.”

“……설마.”

불길한 예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음유시인이 내 외숙 앞에서 그 대서사시를 부를 거라고요?”

“그렇겠지요. 영웅 대서사시는 그의 주요 레파토리니까요.”

“절대 안 돼요!”

“어째서요? 나쁜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건 널리 자랑해야 합니다.”

싱긋 웃는 인세티아 남작을 보며 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어요. 30분! 아니 15분이면 돼요! 그러니까 그 공연만은 절대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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