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홀로 성벽 아래로 내려가 농민들과 소통하고 있는 인세티아 남작을 지켜보다 그대로 성벽에 주저앉았다. 엠마가 봤다면 기겁했을 모습이지만, 다행히 여기에는 나 하나뿐이었다.
‘엄청나게 피곤하다.’
아스페리츠가 체온을 뺏어가더니, 인세티아 남작이 고민을 안겨줬다. 덕분에 몸과 머리가 모두 무거웠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에 힐링이 필요했다.
‘그 둘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건 역시 해리뿐이지!’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해리를 찾아갈 힘도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공명이었다.
[해리.]
[이브리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해리가 놀라서 대답했다. 최근에는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해리에게 달려갔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서 말을 건 것은 오랜만이었다.
[해리. 이리 와서 나 좀 안아줘요. 내가 지금 힐링이 필요하거든요.]
[지금?]
[응. 지금.]
나는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여기가 어디냐면요…….]
하지만 내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도 전에 해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잊었어? 이젠 네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 안 해줘도 돼.”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 해리가 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여기에 내 영혼의 조각을 심어 뒀잖아. 마음만 먹으면 네가 어디에 있든 널 찾아낼 수 있어.”
“와. 이거 진짜 편하다.”
나는 웃으며 해리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함이 기분 좋아 해리의 손을 뺨에 가져다 대자,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그런가 싶어 해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얼굴만큼이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워.”
“네?”
“네 몸, 너무 차가워.”
“내 몸이요?”
아스페리츠가 껴안았을 때는 체온이 떨어져 오들오들 떨렸지만, 이제는 몸이 무겁고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 에취!”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굳어있던 해리의 얼굴이 더 딱딱해졌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성벽에 꽂혀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오베론 공작가의 상징이 새겨진 깃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펄럭이고 있었다. 높은 성벽 위라 그런지 아무래도 지면보다는 바람이 심한 편이었다.
“아니면 역시 아스페리츠 때문일지도…….”
“아스페리츠?”
해리가 나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 미친 정령이 왜?”
“아까 아스페리츠가 날 껴안았었거든요. 물의 정령이라고 어찌나 차가운지… 몸이 덜덜 떨리더라니까요.”
내 말에 걱정을 담고 있던 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미친 정령이랑 껴안았어?”
“아.”
‘내가 내 무덤을 팠군.’
아스페리츠가 계약을 하겠다며 다짜고짜 내게 입을 맞췄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는 해리가 직접 그 상황을 봤지만, 이번에는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 알게 됐다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적당히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해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해리는 입 맞춰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투덜거리다가, 결국에는 화를 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해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고 귀가 빨개졌지만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거 안 통해.”
“정말 안 통해요?”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해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처음보다 길고 깊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빨아 머금자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해리의 몸이 더욱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풀렸겠지?’
나는 그렇게 기대하며 해리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을 뿐 해리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정말 안 통하네.”
나는 눈을 껌뻑이며 의외의 상황을 마주했다.
‘이 방법이 안 통하면 앞으로 해리를 뭘로 조련해야 하지?’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해리가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브리아. 넌 꼭 이런 방법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더라?”
“하지만 이게 제일 잘 통하잖아요.”
내가 느끼기에 해리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잘 먹히는 편이었다.
“넌…….”
해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넌 내 몸만 좋아하지?”
“……네?”
“그러니까 늘 이런 걸로만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거지?”
“……네에?”
생각지 못한 대사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꼭 순진한 총각을 희롱하는 음흉한 아낙네 같잖아요.”
해리의 말이 너무 황당해서 튀어나온 말인데, 입 밖으로 내고 보니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순진한 총각=해리.
음흉한 아낙네=나.
‘이렇게 대입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군.’
나는 빠르게 과거의 행적을 반성했다.
‘이번엔 대화로 풀어볼까. 나는 교양인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나는 부루퉁한 해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스페리츠와의 입맞춤이나 포옹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걔는 그냥 액체잖아.’
반투명하고. 차갑고. 그게 전부였다.
‘조금 더 후하게 쳐줘도 그냥 물고기지.’
아무리 상체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다리는 비늘이 덮인 꼬리였다. 해리는 악마지만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라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아스페리츠는 그 범주 밖의 기이한 존재일 뿐이었다.
“해리. 아스페리츠는 그냥 액체잖아요. 액체랑 껴안은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냥 물세례 한 번 맞은 기분이라고요.”
나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나긋한 목소리로 내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해리는 내 말에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래도 싫어. 생긴 건 사람이잖아.”
“하체는 물고기인데요? 막 비늘도 있고.”
“그래도 어쨌든 상체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그래봤자 액체인데…….”
“그래도 싫어! 생긴 건 사람이잖아!”
대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 위로 똑같은 대화가 몇 번이나 반복됐다.
‘이렇게 해서는 하루가 다 지나도 안 끝나겠어.’
오늘은 나의 지난 행적을 반성하며 몸이 아닌 말로써 대화를 해 볼 생각이었지만, 이 발전 없는 대화를 반복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해리.”
“왜?”
“나 오늘은 그냥 음흉한 아낙네 할게요. 교양인은 다음 기회에 될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요. 이런 말이지.”
나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쪼그려 앉아 있던 해리의 몸이 뒤로 무너졌다.
“이런 해결 방법은 싫다니까?”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않고 무너진 해리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윽.”
두 다리에서 느껴지는 내 무게에 해리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싫은 거 맞아요?”
“그, 그래!”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라니까! 나 정말 싫…….”
나는 해리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에 하려던 말을 빼앗긴 해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는 그런 해리를 향해 산뜻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라고요?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래.’
나는 해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대로 그의 입을 집어삼켰다.
마침 삼키기 좋게 그의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나는 거리낄 것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입맞춤을 했으니, 해리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해리가 반응을 보이는 곳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입안의 여린 부분을 조금씩 건드리자 멍하니 굳어 있던 해리에게서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해리의 몸에 얹은 손을 통해 조금씩 그의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삐진 게 풀리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느긋하게 움직이려는 순간, 해리의 손이 내 허리를 붙잡아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며 상대의 온기와 체향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읏!”
생각지 못한 움직임에 속에서부터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비명을 기점으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내가 주도하는 입맞춤에 멍하니 녹아내렸던 해리가 이번에는 나를 공략하고 있었다. 내가 해리를 잘 아는 것처럼 해리도 나를 잘 알았다. 해리는 내가 예민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건드리며 나를 괴롭혀댔다.
한 번 주도권을 빼앗기자 그 뒤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해리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며 정신없이 그와 입을 맞출 뿐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해리의 손이 등 뒤의 끈을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 풀기 힘든데.’
리본을 잘 정리해서 안쪽으로 넣기 때문에, 여자 옷을 잘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풀기가 힘들었다.
‘뭐, 해리라면 그냥 힘으로 뜯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드레스가 아깝지 않나.
“설마 지금 다른 생각하는 거야? 나랑 입 맞추는 중인데?”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둔해졌는지 해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해리가 끈을 만져서…… 이거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알아요?”
“끈……? 풀어……?”
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아무래도 제가 만지고 있는 게 드레스를 벗을 때 풀어내는 끈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윽. 진짜 순진한 총각과 음흉한 아낙네잖아.’
나는 속으로 헛기침을 하며 순진한 총각에게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해리가 만지고 있는 거, 드레스 벗을 때 풀어내는 끈이거든요.”
“으, 어, 응?”
해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등에서 손을 뗐다.
‘해리답다면 해리다운 반응인데.’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진지하게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얼마나 가르쳐야 하는 거지.’
흐린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그래요. 얼굴만 봐도 그게 아닌 건 알겠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
“나 안 놀랐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남아 있는 해리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해리라면 드레스 끈 푸는 방법은 모를 것 같고, 그럼 그냥 뜯어버릴 텐데, 그래서야 드레스가 아까울 것 같다…… 뭐,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죠.”
나는 가볍게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해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그의 입술에 고정했다. 아직 서로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입맞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던 것이다.
“흐음.”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해리가 다시 내 등에 손을 얹었다. 끈이 있는 자리를 따라 해리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자 겨우 잊고 있던 긴장이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렇구나. 이걸 뜯어버리면, 드레스를 벗길 수 있구나.”
해리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양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머릿속에 새겨 넣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거, 뜯어버려도 돼?”
이번에는 내게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성벽 위에서의 경험이라니. 상당히 하드코어하지 않나. 게다가 아래에는 에렐로 들어오고 싶다며 몰려든 농민들이 가득했다.
“처음은 좀 평범하게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 질문에 해리의 얼굴이 묘해졌다.
“……지금 당장 뜯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네?”
나와 해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짧고도 긴 침묵을 깬 쪽은 나보다 훨씬 덜 민망한 입장의 해리였다.
“당장 여기서 일을 치를 생각이었다니…….”
해리가 씩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음흉하구나, 내 주인님?”
“내 잘못 아니에요! 해리가 그렇게 오해하도록 애매하게 말했잖아요!”
“애초에 머릿속에 그런 선택지가 있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음흉하지.”
“그런…….”
하지만 실제로도 음흉했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음흉해서 죄송합니다, 순진한 총각.’
할 말을 잃고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무는 내 모습에 해리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
해리가 웃으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웃음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내 주인님이 내 몸만 좋대도 주인님이 좋은걸.”
“잠깐만요.”
‘그 오해 아직도 진행 중이었어?’
나는 해리의 발언에 화들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엄청나게 오해가 있는 발언이거든요? 당장 고개 들고 나 봐요!”
내 외침에 해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봐요, 테오하리스 씨. 멋대로 실망하고 체념하지 말라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해리의 두 뺨을 감쌌다.
“내가 해리의 몸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근데 해리의 몸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해리의 몸도 좋아하는 거지.”
내 말에 해리가 도로록 눈을 굴렸다.
“결국 내 몸이 좋다는 거 아냐?”
“그래요. 그건 당연히 좋아하죠. 이걸 누가 싫어하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얼굴에. 이렇게 훌륭한 신체조건을 갖췄는데. 이런 외모를 싫어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내가 잘 생기고 몸 좋은 사람한테 전부 이러는 건 아니거든요.”
주변에 잘 생기고 몸 좋은 사람은 많았다.
‘리던이나 카시안도 외모는 꽤 훌륭하고, 인세티아 남작도 봐줄 만하지.’
“그 사람들이 기분 상했을 때, 그 사람들을 달래겠다고 내가 입을 맞추진 않잖아요.”
‘애초에 달래줘야겠다는 생각부터가 안 든다고.’
나는 해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이렇게 위로해주는 존재는 해리뿐이에요. 왜냐하면, 해리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존재니까.”
해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해리?”
나는 고장 난 것처럼 느리게 눈만 껌뻑이는 해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해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이런 건 주인님한테만 해.”
“응. 알아요.”
“다른 녀석들한테는 이런 거 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
“응. 그것도 알아요.”
“전부 너한테만, 너하고만 하고 싶어.”
해리가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진지한 목소리에 기묘한 긴장이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다른 녀석이랑 하지 마.”
“안 해요.”
“손잡는 것도, 껴안는 것도 싫어. 난 그것도 다른 녀석이랑 안 한단 말이야.”
“알았어요. 앞으로 아스페리츠가 또 달려들면, 그땐 침을 뱉어 줄게요.”
비장한 내 목소리에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침? 왜 하필 침이야?”
“내가 재채기를 했더니 침이 튀어서 더럽다면서 떨어지더라고요. 침을 뱉으면 백 퍼센트 퇴치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그 미친 정령한테 침을 뱉…….”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해리가 곧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재채기!”
“네?”
“너 재채기 했잖아! 몸이 안 좋은 게 분명해. 감기라도 걸린 거 아냐?”
말을 듣고 보니 코도 간질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몸이 좀 무겁기는 했는데…….”
“아픈 게 분명해. 인간은 약한데, 넌 그중에서도 특히나 더 약한 편이니까.”
해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미친 정령, 내가 진짜 가만히 안 둬.”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당장 방에 가서 쉬자.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해리는 당장 나를 방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들이닥친 나와 해리를 보며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나를 대신해 해리가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의사를 불러야겠어.”
“감기요? 아가씨께서요?”
엠마가 화들짝 놀라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엠마가 면목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송구스러운 듯했다. 서둘러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체온을 가늠해보던 엠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장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엠마가 심각한 얼굴로 방을 나서자마자 해리가 이불 안으로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맞닿은 해리의 몸이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해리 아니에요? 몸이 엄청 뜨거운데.”
내 말에 해리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바보야. 너 따뜻하라고 일부러 뜨겁게 한 거잖아.”
“이런 것도 가능해요?”
“그럼. 내가 뭘 못하겠어?”
오랜만에 듣는 해리의 잘난 척이었다. 처음 계약했을 때만 해도 해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요즘엔 나 대단하지-라는 말보다는 나 예뻐해줘-라는 말을 더 많이 하지만.’
나는 해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은 드라이어가 아니라 히터네요.”
“히터? 그건 또 뭔데?”
“음……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거죠.”
“그래? 그럼 난 최고의 드라이어이자 최고의 히터겠네.”
드라이어와 히터가 고철 덩어리 기계라는 사실을 알면 해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나를 이따위 것들과 비교했냐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둘 다 없으니 상관없었다.
“그래요. 해리는 최고의 드라이어, 최고의 히터에요.”
“그럼, 그럼.”
해리가 뿌듯하게 웃으며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지글지글 끓는 온돌 바닥에 누운 것처럼 이불 속 공기가 후끈했다.
‘이러다 익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따뜻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지만, 차가운 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몸은 거부하지 않고 온기를 받아들였다.
‘졸려.’
나는 노곤해지는 몸을 느끼며 해리의 품 속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