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7/156)

* * *

성벽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본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게 다 뭐예요?”

“보시다시피, 사람들입니다.”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거리는 나와 달리 인세티아 남작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처럼 성문 밖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당장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인세티아 남작을 슬쩍 흘겨본 뒤 다시 성벽 아래로 눈을 돌렸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부터 아주 어린 아이까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다양해서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공통점을 찾자면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

허름한 옷차림에 지쳐있는 얼굴도 다들 비슷했다.

‘꼭 피난민을 보는 것 같네.’

하지만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성문 앞에 몰려든 거예요?”

“동부에서 온 농민들입니다.”

“동부요?”

“예. 타셴, 라르고, 아센베츠…… 아무튼 다양합니다.”

인세티아 남작의 입에서 왕국 동부에 자리 잡은 영지들의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수가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결국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서…”

이건 간단하지 않은 문제다.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긴다. 직감이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나의 직감은 불길한 일에 있어서는 꽤 정확한 편이었다.

“그쪽 사람들이 여기까지 왜 왔는데요?”

“자신들을 에렐의 영지민으로 받아달라고 합니다.”

“네?”

한 영지에 정착해 주민증을 발급받고 소작권을 얻은 자는 영주의 허락 없이 다른 영지로 이주할 수 없었다.

“영주들에게 허락은 받았대요?”

내 질문에 인세티아 남작이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영주님. 이 세상에 그런 걸 허락할 영주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주 제한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는 범죄를 저지른 자가 도망쳐 다른 영지에 정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초기에는 그런 목적이 잘 지켜졌다. 범죄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영주의 허락을 받아 다른 영지로 이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제도의 목적이 미묘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노동력은 곧 재산이었다. 영지민의 이주를 허락한다는 것은 곧 그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 영주들은 제도를 악용해 영지의 노동력을 지켜냈다.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피해를 받는 평민들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없었고, 같은 처지인 영주들은 서로가 서로를 눈감아줬다. 영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국고를 채우는 왕실도 한 통속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전부 살던 곳에서 도망쳐 나온 평민들이라는 건데.’

“왜 도망쳤는지도 들었어요?”

고향을 등지고 도주까지 감행했다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묻지는 않았지만, 뭐,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동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영지들의 세금이 높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올해는 흉년까지 겹쳤죠.”

‘먹고 살기 참 힘들었겠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그럼 왜 하필 우리 영지로 온 거래요? 에렐도 척박하기로 유명한 영지잖아요.”

“그것 역시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인세티아 남작이 미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요즘 에렐과 영주님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내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고요?”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니 인세티아 남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떠돌지요. 여태까지 영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래저래 사건을 몰고 다니기는 했지.’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빠른 반성의 시간을 가진 뒤 남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돌아다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벌떼처럼 몰려든 건데요?”

“그건 제 입으로 직접 말하기가 좀…….”

인세티아 남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곧 음유시인을 저택으로 부르겠습니다.”

“……음유시인이요?”

“예. 지금 왕국 전역에 영주님을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가 유행이거든요.”

“……대서사시요? 왕국 전역에?”

믿기 힘든 이야기에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나를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가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왕국 전역에서 노래되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그딴 노래를 만들었단 말인가.

‘그게 누구든 미친 게 틀림없어.’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 건 보통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아요?”

“대서사시의 영웅으로 칭송될만한 사람들 중에 산 사람이 없었을 뿐이죠.”

인세티아 남작이 태연한 얼굴로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나 그냥 악역으로 살게 해줘…… 영웅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한 번 들어보십시오.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남작은 벌써 그걸 들은 거예요?”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저택 사람들 대부분이 들어봤을 텐데요. 마을에 나가기만 해도 지겹도록 들리는 노래라.”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민망해졌다.

“……그 이야기 말고 저 농민들 이야기나 하죠.”

나는 더 민망해지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 하죠?”

“그거야 영주님 뜻에 달렸지요. 받아주실 겁니까?”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글쎄요.”

이들을 받아들여 에렐의 노동력을 늘리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에렐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라 어디서나 인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자기 농민들을 잃은 동부의 영주들이 난리법석을 피우겠지.’

이주 제한 제도를 들먹이며 당장 농민들을 돌려보내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으. 귀찮은 미래가 그려진다, 그려져.’

상상만으로도 질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현실은 상상보다 더할 것이다.

‘역시 돌려보내는 게 낫겠지?’

하지만 희망을 품고 먼 곳까지 걸어 온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도 할 짓은 아닌 듯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선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죠.”

“농민들을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그건 더 고민해봐야죠. 이게 하루아침에 내려질 결론은 아니잖아요.”

인세티아 남작은 내 결정에 달려 있다고 했지만, 이 문제에는 엮여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결론을 내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기간동안 저 사람들을 전부 성 밖에 내버려둘 수도 없고…”

남작의 말을 들어보니 성문 앞에 이렇게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닌 듯했다.

“돌려보낼 땐 돌려보내더라도 회복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할 것 같아요.”

건강한 성인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일 것이다.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는 건 좀 그렇지.’

“그래서 우선은 영지로 들인 뒤에 생각해보려고요.”

“한 번 안으로 들이시면 다시 내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돌려보내기로 결정 내리신다면 골치 아파질 거예요.”

“음. 그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든-이라니…….”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인세티아 남작이 곧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 영주님께선 정말 어떻게든 일이 풀리는 경우가 많으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운을 한 번 믿어 봐요.”

“믿습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믿는 건 영주님의 운이 아니라 영주님의 판단력입니다.”

“아뇨.”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운을 믿어줘요. 내 판단력을 믿는 건 부담스럽거든요.”

“잘 됐네요. 부담스러우시라고 드린 말이니.”

남작이 씩 웃으며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는 영주님의 ‘판단력’을 믿고 농민들을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다시 한번 판단력을 강조하며 내게 부담을 지웠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능구렁이 같다니까.’

오베론 공작이 어째서 이 남자를 완전히 믿고 에렐을 맡겨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결론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이동 반경을 제한해야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농민들은 환영하겠죠. 다시 쫓아낼 경우 원망 역시 어마어마하겠지만……”

남작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나를 보았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내 대책 없는 말을 따라하며 씩 웃는 남작을 보니 확실해졌다. 역시 이 남자는 능구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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