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6/156)

16장. 신성한 피

나는 앞에 놓인 두 개의 병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왼쪽은 신전에서 구입한 포션. 오른쪽은 웨어울프들에게서 얻은 그들의 피였다.

‘이제 포션을 분석해서 비슷한 걸 만들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막막했다. 나는 이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니까.

‘역시 포션을 분석할 전문가를 구해야겠어.’

신전만큼 대단한 포션은 아니지만, 민간에도 약초를 배합해 포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포션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약물이었으나 작은 상처에는 그럭저럭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포션을 분석한 뒤에 웨어울프의 피로 비슷한 걸 만들어 보라고 하면…’

물론 분석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쉬웠다면 벌써 신전의 포션과 비슷한 약물들이 판을 치고 있을 테니까. 만약 분석을 하더라도 정확한 구성이나 비율은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나의 목표는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드는 것 정도였다.

‘시간도 오래 걸릴 거야.’

끈기를 가지고 천천히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웨어울프의 피가 든 병을 들었다. 병을 눈높이까지 들어 가볍게 흔들자 내용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이브리아 오베론.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스페리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액체가 출렁거리는 병 너머로 시큰둥하게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흔드는 거 말이야.]

[왜?]

[웨어울프의 피에는 독이 있으니까.]

[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멈췄다.

[……넌 말을 한 글자로밖에 못해?]

투덜거리는 아스페리츠의 목소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웨어울프의 피에 독이 있다고?]

길어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스페리츠가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몰랐어? 웨어울프의 피를 마시면 열이 심하게 올라 보름 만에 죽는다고 하지.]

[전혀 몰랐어.]

웨어울프의 피로 포션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인세티아 남작 역시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아마 인간들은 잘 모르는 사실인 것 같았다.

‘하긴. 웨어울프는 오래 격리되어 살아서 그들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없지.’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걸 모르고 포션을 만들었다간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저 미친 정령이 쓸모있는 순간도 있군.’

나는 새삼스럽게 아스페리츠를 바라보다 다시 웨어울프의 피로 눈을 돌렸다.

‘그럼 이걸 포션으로 만드려면 이 피를 해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포션을 만드는 데 복잡한 과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일이 조금 더 어려운 일이 된 것뿐이야.’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병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웨어울프의 피는 왜 가져왔어?]

나는 아스페리츠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괜찮은 정보를 준 보답으로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생각이었다.

[이걸 이용해서 포션을 만들 거야.]

[포션?]

[응. 이 포션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어.]

[그래?]

내 말에 아스페리츠가 신전에서 사들여 온 포션을 유심히 살피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내가 도와줄까?]

[네가 뭘 어떻게 돕겠다는 건데?]

[이거랑 비슷하게 만들고 싶다며. 성분을 알려주면 되는 거 아냐?]

[……그게 가능해?]

[아주 간단한데? 포션도 결국 물로 만든 거잖아.]

아스페리츠가 젠체하며 포션을 손에 들어 굳게 닫힌 뚜껑을 열었다.

“아!”

아스페리츠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단번에 포션을 모두 들이켰다.

‘저게 얼마짜린데!’

그는 내가 경악에 차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포션을 음미하고 있었다.

[흐음. 그렇군. 읽어냈어.]

아스페리츠가 금세 뿌듯한 얼굴이 되어 내게 빈 병을 내밀었다.

[정말이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텅 비어버린 병을 건네받았다.

[정령은 진실해. 지금 당장 내용물이 뭔지 불러주지.]

아스페리츠의 가벼운 태도 덕분에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이미 포션은 사라진 뒤였으니 딱히 방법이 없었다.

[기다려. 받아 적을 종이가 필요하니까.]

나는 서랍 속에서 종이를 꺼내 펜을 들었다. 받아 적을 준비를 하는 내 옆에서 잔뜩 신이 난 아스페리츠가 방방 뛰었다.

[전체를 100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되겠지?]

[비율까지 알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난 정령들의 왕이니까. 이런 건 아주 간단하다고.]

‘이렇게 나오니까 믿음이 안 가는 거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우선 이야기해봐.]

[주요 성분은 물과 트롤의 피야. 물은 50, 트롤의 피는 30 정도야. 그 외에 10가지의 재료가 더 있어.]

나는 바쁘게 아스페리츠가 부르는 재료들을 적어 나갔다. 생각보다 흔하고 값싼 재료들이었다.

‘정말 이걸 조합하면 포션이 된다고?’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신뢰도가 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걸로 정말 포션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내 의심에 아스페리츠는 다시 한번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은 진실하다니까?]

[하지만 장난기도 많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조심스럽게 재료와 비율이 적힌 종이를 챙겼다. 사람을 고용해 종이에 적힌 대로 포션을 만들어 보면 답이 나올 문제였다.

‘여기서 트롤의 피만 웨어울프의 피로 바꾸는 거지.’

하지만 그 전에 해독은 필수였다.

[이 피도 해독해줄 수 있어?]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아스페리츠에게 웨어울프의 피를 내밀었다.

[난 위대한 정령왕이야. 당연히 할 수 있지! 뚜껑 좀 열어 줄래?]

아스페리츠의 요구대로 피가 담긴 병을 열자, 그가 순식간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병 안에 담긴 웨어울프의 피에서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오더니, 짙은 붉은빛이 조금 연한 색으로 변했다. 피가 검푸른 빛에서 맑은 적색으로 바뀌자 병 속으로 들어갔던 아스페리츠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깨끗하게 해독했어. 이젠 독이 전혀 없어.]

확인을 해보려면 직접 먹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했지만, 그런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이게 해독이 됐는지도 확인해보라고 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날 데려오길 잘했지?]

미친 정령이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명백하게도 칭찬을 바라는 눈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쓸모가 있었어.]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정령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전히 성가신 녀석인데, 이렇게 도움이 되니 기분이 묘했다.

[이브리아 오베론. 이걸로 칭찬을 대신할 건 아니지?]

[그럼?]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스페리츠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꼭 껴안았다.

[난 따뜻한 게 좋더라.]

만족스러워하는 아스페리츠와 달리 나는 차가운 물에 휩싸인 듯한 감각에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따뜻한 난로를 원하는 거라면 나보단 해리가 더 나을 텐데.’

하지만 해리와 아스페리츠가 껴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재빨리 지워버리며 아스페리츠에게 명령했다.

[아스페리츠, 비켜.]

[싫어.]

[넌 내 계약자잖아. 근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그러는 너도 내 계약자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

해리와의 계약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하다면, 아스페리츠와의 계약은 조금 더 동등한 관계처럼 느껴졌다.

‘부하보다는 동료 느낌에 가깝다고나 할까.’

역시 이 미친 정령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완전 성가셔.]

나는 투덜거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덜덜 떠는 데도 미친 정령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에취!”

아스페리츠는 내가 요란하게 재채기를 한 뒤에야 겨우 나를 놓아주었다. 그것도 나의 상태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침 튀었어.]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녀석이었다.

* * *

나는 아스페리츠를 겨우 쫓아내고 손으로 차갑게 식은 팔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뚝 떨어진 체온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해리한테 몸 좀 데워달라고 해야겠다.’

나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주님.”

하지만 해리를 찾아 움직이기도 전에 밖에서 인세티아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방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세티아 남작과는 매일 아침마다 간단한 회의를 하고는 했다. 그 자리에서 오늘 꼭 처리해야 할 일과 진행 중인 사업들에 대한 점검을 한다. 오늘 아침에도 남작과 회의를 했으니, 그가 이렇게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뭔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들어와요.”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남작의 방문을 허락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예상대로 난처한 얼굴을 한 인세티아 남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더욱 깊어진 불안을 안고 남작에게 묻자 남작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가서 보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직접 보라고요? 뭘요?”

“우선 외성의 정문으로 가시죠.”

에렐 영지는 크게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영지의 경계를 따라 길게 늘어선 높은 석벽 안쪽이 외성, 영지 중심부의 땅에 원형으로 세워진 낮은 석벽 안쪽이 내성이었다. 내성은 영주의 공간이었다. 저택과 넓은 정원이 낮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고요했다.

그에 비해 외성은 영지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이었다. 늘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그 외성의 정문이라면 외부에서 에렐 영지로 들어오는 가장 첫 관문이었다.

‘그럼 에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인데.’

내부의 문제라면 내 뜻대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영지에서는 영주가 곧 왕이니까 어떤 식으로 해결하든 내 마음이지만…….’

외부의 문제라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지고, 그건 곧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소리였다. 나는 부디 큰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죠. 외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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