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4/156)

* * *

“웨어울프들은 모두 베넘으로 돌아갈 겁니다.”

내 말에 마주 앉은 벨모른 백작이 미심쩍은 얼굴로 콧수염을 매만졌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불안하시다면 각서라도 써드릴 수 있습니다. 뭐, 다음 보름이 되면 그런 종이쪼가리 없이도 확실히 일이 해결됐다는 걸 알 수 있으시겠지만요.”

자신감 넘치는 나의 말투에 의심을 거둔 것인지, 벨모른 백작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흠흠. 내가 에렐의 영주를 의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첫 만남에서 사적인 관계를 들먹이지 말라고 말한 보람이 있었는지, 이제 벨모른 백작은 나를 이브리아가 아닌 에렐의 영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예 말귀를 못 알아먹는 인간은 아니어서 다행이군.’

“흠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해결했다는 것이 놀라워 그런 것이었으니 너무 마음 상하진 않았으면 좋겠네.”

벨모른 백작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약속했던 대로 강의 상류와 중류에 보 건설을 허락하지. 단, 보 건설은 보름이 지나 웨어울프들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뒤에 시작하면 좋겠군.”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어차피 건설 준비에도 시간이 걸린다. 현장을 보고 설계를 하는 시간만 해도 한 달이 훌쩍 걸릴 것이다.

“하지만 보의 건설 비용은 벨모른에서 모두 부담해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벨모른 백작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보를 짓지 않아도 문제없어. 건설을 허락해주는 것만으로도 에렐에는 큰 이득이잖나?”

“네. 그렇게 생각했죠. 이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나는 웃으며 탁자 위에 신비의 돌을 내려놓았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벨모른 백작이 예상치 못한 돌의 등장에 흠칫했다.

하지만 백작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돈의 팔촌의 작은 아버지라는 우스운 인맥까지 뻔뻔하게 들이댔던 사람 아닌가. 그는 그때처럼 뻔뻔한 미소로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애써 감췄다.

“이게 무엇이길래.”

“모른다는 거짓말은 그만두시죠. 기사단을 뒤집어 그날 샘에 간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모르는 소리라고…… 으악!”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백작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와 함께 고꾸러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물론 나라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거야.’

벨모른 백작 앞에 놓여 있던 찻잔에 아스페리츠의 얼굴이 불쑥 솟아나 있었다.

[이런 것도 가능해?]

[난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지.]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브리아 오베론. 내가 아무리 네 계약자라도, 꼭 너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잖아.]

악마의 계악자와 정령의 계약자는 그 의미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잠깐. 그럼 명령을 내려 이 녀석을 샘에 처박아 두겠다는 나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그냥 망한 것이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절망하고 있는 사이 아스페리츠가 더욱 목을 길게 빼고 벨모른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백작의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어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무렵, 아스페리츠가 완전히 찻잔에서 빠져나와 내 옆에 섰다.

[기억나. 그날 샘에 와서 돌을 가져간 인간 중에 이 녀석도 있었어.]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벨모른 백작이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일에 직접 나섰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의심 많은 사람이라 기사들만 보내지 못하고 따라나섰겠지.’

속 좁은 벨모른 백작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라면 신비의 돌을 발견한 기사가 돌을 가지고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 이 유령은 뭐냐!”

“유령이 아니라 정령입니다. 정령의 샘에 살고 있던 정령들의 왕이죠.”

“말도 안 돼!”

이건 벨모른 백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믿기 힘든 말이긴 했다.

‘갑자기 정령왕이라니. 게다가 얘는 정령왕이라기엔 너무 위엄이 없어.’

나는 장난기 가득한 아스페리츠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믿기 힘드시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백작께선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걸 좋아하시잖아요. 벨모른을 물바다로 만들면 이 녀석이 정령왕이라는 걸 믿으실까요?”

“뭐, 그런!”

백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아스페리츠를 번갈아 보았다.

‘주도권은 확실히 내가 쥐고 있군.’

이건 처음부터 내가 질 수 없는 거래였다. 나는 웃으며 조금 전 백작에게 제시했던 제안을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

“보의 건설 비용은 벨모른에서 모두 부담해주셔야겠어요.”

물론 덧붙이는 말이 더 있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나는 신비의 돌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저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때로는 구체적인 협박보다 두루뭉술한 협박이 잘 먹히는 법이었다. 벨모른 백작처럼 상상력이 좋은 부류에게는 더욱 그랬다. 나는 순식간에 늙어가는 벨모른 백작의 얼굴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 *

이제는 다시 에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성과를 얻게 됐으니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저희의 땅을 되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모른 백작령을 나와 와이번 앞에 선 내게 에단이 웨어울프 일족을 대신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할 것 없어요. 나도 얻을 게 있으니 움직인 거니까요. 잊지 않았죠? 내 노력이 공짜가 아니라는 거.”

“물론입니다. 몸으로 갚겠습니다.”

에단이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나 늑대화되어 무섭게 날뛰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선한 미소였다.

“그런데 베넘으로는 어떻게 돌아가죠? 다시 강물이 차올랐는데.”

“벨모른에서 배를 내어주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베넘에서 벨모른으로 오는 건 어렵지만, 벨모른에서 베넘으로 가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튼튼한 배와 뛰어난 사공만 있다면 강을 건너는 건 쉬웠다. 베넘의 웨어울프들이 그간 강을 건너지 못했던 건 그 배와 사공이 없었기 때문이니, 외부에서 베넘으로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태까지 그걸 감히 시도한 사람이 없었을 뿐.

‘하지만 이제부턴 베넘도 완전히 고립된 땅은 아니게 될 거야.’

“에렐에 도착하면 베넘으로 교역을 담당할 사람을 보낼게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내 말에 에단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이만 떠날까요?”

리던과 이카난은 이미 와이번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해리는 혼자 와이번 위에 올라타지 못하는 나를 번쩍 안아들고 능숙하게 와이번의 등에 안착했다.

“그럼 출발하죠.”

[그래! 출발!]

출발을 외치는 내 목소리 뒤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넌 왜 따라와?]

[당연히 내 계약자를 따라가야지.]

[정령의 샘은 안 지켜?]

내 질문에 아스페리츠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걸 내가 왜 지켜. 돌만 있으면 알아서 잘 정화돼.]

[여태까지 거기서 살았잖아.]

[그건,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서 그랬지.]

[그래서? 날 따라가겠다고?]

[응.]

[싫어. 돌아가. 계약 파기할래.]

[계약 파기는 쌍방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돌아가는 건 나도 싫어.]

[넌 왜 계약자 말을 안 들어?]

[그럼 이브리아 오베론, 넌 왜 내 말을 안 듣는데? 계약자면서?]

아스페리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완전 성가셔.]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스페리츠를 노려보고 있는 해리를 꼭 껴안았다.

“이브리아?”

열심히 아스페리츠를 견제하고 있던 해리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 미친 정령을 보니 해리가 얼마나 착한 계약자였는지 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더 예뻐해 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해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기서 번식 행위를 할 기세군.”

“내가 왜 이런 꼴을 봐야…….”

[또 눈을 감을 시간입니까.]

한 엘프와 한 인간과 한 성검의 한탄이 차례로 이어졌다.

* * *

에렐에 도착하니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멀리서 와이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던 건지, 따로 기별을 하지 않았는데도 인세티아 남작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이 잘 풀렸는지는 안 물어봐요?”

“그런 건 영주님의 얼굴 표정만 봐도 압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영주님께선 마음먹은 걸 꼭 해내시는 분이니까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말이지요.”

신뢰를 받아 좋다고 해야 할지, 내가 불도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애매한 기분으로 인세티아 남작을 보고 있으니, 그가 내 뒤에 선 일행들을 훑어보다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뭘 주워 오신 겁니까.”

남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내가 에렐에 새 식구를 데려오는 게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영주님. 아무거나 함부로 막 주워오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나도 얘 안 줍고 싶었어요.”

나는 천진한 얼굴로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아스페리츠를 흘겨보며 남작에게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해도 막무가내로 따라오는데, 꼴에 정령왕이라고 뿌리치기도 쉽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정령왕이요?”

시큰둥하게 새 손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작의 얼굴에 금이 갔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시려고 정령왕을 주워오셨습니까.”

“나의 꿈은 언제나 하나죠. 평화로운 에렐에서 조용하게 평생을 사는 것.”

“그 꿈, 벌써 반 이상은 어긋난 것 같은…….”

나는 재빨리 인세티아 남작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씨가 된댔어요. 그러니까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인세티아 남작이 제 입을 틀어막은 내 손을 살짝 붙잡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입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참 좋을 텐데요.”

남작의 말이 한숨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정작 아스페리츠는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성가셔하는지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참이나 정원을 둘러보던 그가 물방울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지자 남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번 손님에게는 따로 방을 내어드리진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고 보니 나는 수집만 해놓고 그 뒷일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네.’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남작과 집사가 제 할 일을 잘해줬다는 뜻이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남작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카난도 방을 배정받았나요?”

이카난은 엘프라 인간들의 방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일 테니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예. 대마법사님의 제자라고 하시기에, 가까운 곳으로 준비해 드렸습니만…….”

남작이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이카난을 바라보았다.

“잠을 방이 아닌 정원의 나무 위에서 주무셔서 정원사가 놀라서 뒤집어진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거대한 물체가 뚝 떨어지는 바람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고요.”

‘그 거대한 물체가 이카난이었구나.’

남작의 한탄에 이카난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그에게 열매를 주었지. 특별히 아주 달고 맛있는 것으로 골랐다.”

“……그 정원사는 달콤한 열매보다는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잠은 방에서 주무시는 게 어떨까요.”

남작의 제안에 이카난도 할 말이 많다는 듯 불만을 토로했다.

“인간들의 침대는 너무 폭신하다. 땅이 꺼지는 것 같아서 불안해.”

“그렇다면 매트를 좀 더 딱딱한 걸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노력해보지. 정원사가 달콤한 열매를 싫어하는 줄은 미처 몰랐군.”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대답이었지만, 남작은 이카난에게 방에서 자겠다는 대답을 받아낸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남작. 그쪽 이야기가 마무리됐으면 이제 나와 대화를 좀 나누죠.”

벨모른에서 얻은 것들을 두고 남작과의 논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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