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반투명한 인어가 들뜬 얼굴로 와이번을 타고 있는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정령의 샘을 떠나 이렇게까지 멀리 나오는 건 처음이라고 하는군.”
인어는 세상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신기한지 이카난에게 연신 질문을 던져댔다. 정령의 언어는 나른한 노래 같아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금세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다시 벨모른이군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에단의 말처럼 벨모른 영지가 작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쪽이 양들이 죽어 있었던 목장입니다.”
에단이 넓은 들판을 가리켰다. 초록색 들판 사이로 하얀 점들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저 하얀 점들이 양이겠지.’
“아무래도 목장 근처에 돌이 있을 가능성이 크겠죠?”
“돌의 생명력으로 양들을 살리려고 한 거라면, 예. 그렇겠지요.”
“곧장 저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와이번이 목장에 내려앉았다가는 양들이 놀라서 혼비백산할 것이 뻔했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외곽에 내린 뒤 목장으로 걸어가야겠네요. 정령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알려줘요.”
내 말에 이카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정령에게 말을 전했다. 이카난의 말을 들은 인어가 베넘을 뒤집은 정령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말을 꺼냈다.
“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카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요?”
“이 정령이 말하기를, 자기가 힘을 쓰면 문제없이 목장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는군.”
“그래요? 반가운 이야기네요.”
와이번이 안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확보된 공터는 목장에서 상당히 멀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려면 시간과 체력이 상당히 소모될 것이다. 그러니 정령의 힘을 빌려 곧장 목장으로 갈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기에는 이카난의 얼굴 표정이 미묘했다.
“왜요? 좋은 이야기 맞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정령들의 생각은 종종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괴상망측하기 때문에…….”
이카난이 인어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여는 순간, 내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억?”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양탄자가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물로 만들어진 양탄자 위에 안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카난과 해리, 에단 역시도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나 지금 엄청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말이야.”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씩 웃고 있는 인어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양탄자의 네 귀퉁이가 하나로 모여들었다.
“으어어!”
“악!”
“엇!”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만두피에 싸인 고기처럼 양탄자 속에 찌그러졌다. 나는 해리의 품에 쏙 들어가 투명한 양탄자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바르르 떨었다.
“……나도 지금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에 에단이 동조했다. 이카난도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정령들의 생각은 괴상망측하다고.”
이카난의 깊은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넷을 싼 양탄자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꺄아악!”
엄청난 속도감과 흔들림에 입에서 절로 비명이 쏟아졌다. 롤러코스터나 번지점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감으로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는 이런 감각은 생전 처음이었다.
양탄자는 구름을 뚫고 내려가 금세 목장의 들판에 내리꽂혔다. 땅에 내려오자마자 꽁꽁 묶여있던 양탄자가 풀리며 구겨져 있던 몸이 튕겨 나왔다. 다행히 정령이 제대로 힘을 쓰기는 한 모양인지 몸에는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속이 울렁거려.’
“우읍.”
어지러워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널브러진 우리를 향해 양들이 몰려들었다.
“메에에에-”
“메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옷이며 머리카락을 물어뜯고 있는 양들을 밀어냈다. 인어의 형태를 한 정령은 뿌듯한 미소와 함께 우리 주위를 맴돌며 무어라 종알거리고 있었다. 나른하고 듣고 좋은 노래 같았던 말소리가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카난. 저 미친 정령이 뭐라는 거예요?”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팔꿈치로 이카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카난 역시 양들의 습격에 머리를 쥐어뜯기고 있었다.
“저 미친 정령이 말하기를, 자기 덕분에 제대로 도착했으니 칭찬을 해달라고 한다.”
“뭐요? 칭찬? 칭차아아안?”
나는 기가 막혀 인어를 노려보았다. 잡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나 멱살을 잡고 목을 짤짤 흔들었을 마당에 칭찬이라니.
“해리. 저 상황 파악 안 되는 정령한테 본때를 보여줘요.”
“나만 믿어.”
해리가 제 얼굴을 핥고 있던 양을 밀어내며 악마다운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뿌듯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던 인어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인지 행동을 멈추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와 주인님을 바닥에 내던져?”
해리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올랐다.
“거기서 딱 기다려, 미친 정령.”
매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부른 불꽃을 본 정령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인어가 이카난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양떼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카난은 그의 말을 통역해 줄 정신이 없었다.
“내가 네 놈을 수증기로 만들어주지.”
해리가 인어를 향해 다가가자, 눈치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빠른 정령이 슬그머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걸 눈뜨고 놓칠 해리가 아니었다.
“네놈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며 재빨리 인어의 뒤를 쫓았다. 인어가 더욱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내가 알게 뭔가.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미친 정령과 악마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이기는 건 우리 해리지.’
나는 마음 놓고 해리의 응징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목장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양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들이 신기한지 양들은 우리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가장 인기가 좋은 건 이카난이었다.
‘숲의 일족에게는 동물을 유혹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양들은 황홀한 얼굴로 이카난을 물고, 핥고, 빨아댔다. 양들이 어찌나 열정적인지 당황한 이카난은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구해줘야겠군.’
힘으로 이 엄청난 양떼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내 악역 얼굴이지.’
말까지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내 얼굴이라면 간단하게 양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봐, 양들.”
나는 이카난에게 들러붙어 있는 양들을 향해 최대한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악역 얼굴은 제대로 웃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서워지는 효과가 있었다. 악역 미소의 효과는 역시나 대단했다.
“메에엣!”
“메에에에!”
내 미소를 본 양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하얗게 질려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도망쳤다.
‘무기가 제대로 통한 걸 기뻐해야 하는 건가.’
나는 애매한 기분이 되어 한숨을 내쉬며 이카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구해준 거예요.”
“……그 얼굴은 효과가 대단하군.”
이카난이 조용히 감탄하며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단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악역 미소가 양들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닌 모양이네.’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양들이 순식간에 달아나자 엉망이 된 몰골의 우리 일행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엉망이 된 몰골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록색 풀이 가득한 평원에 새하얀 양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이것이 벨모른 백작령이 가진 부의 원천이지.’
만약 이 원천이 무너지려고 했다면 벨모른 백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로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다는 요정의 샘에서 신비의 돌을 훔쳐냈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터. 하지만 그것이 벨모른 백작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벨모른 백작은 재력을 과시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에게는 자신의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이브리아. 내가 혼내줬어.”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 등 뒤에서 뿌듯함이 가득한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해리가 머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인어의 뒷목을 틀어잡고 있었다.
“머리랑 팔을 수증기로 만들어줬는데, 물이라서 그런지 바로바로 재생이 되더라고.”
해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인어의 뒷목을 놓아주자, 인어가 질린 얼굴로 부르르 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이 미친개 같은 놈은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냐고 하는군.”
“그러는 너도 충분히 미친놈 같다고 해줘요.”
나는 이카난이 통역해주는 정령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턱 끝으로 목장을 가리켰다.
“그렇게 투덜거릴 시간이 있으면 여기에 잃어버린 돌이 있는 지나 잘 살펴보라고도 말해주고요.”
나는 이카난이 나의 말을 인어에게 전하는 사이 해리에게로 다가섰다.
“꼴이 엉망이잖아요.”
미친 정령을 혼내주려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옷매무새며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럼 정리해줘.”
내 지적에 해리가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높이 손을 뻗지 않아도 해리의 머리가 바로 앞에 있어 아주 편했다. 자연스럽게 해리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있으니 옆에 있던 에단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저, 처음부터 궁금했습니다만…….”
나와 해리의 얼굴이 동시에 에단을 향했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에단이 부담스러운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 역시 두 분은 연인이신 겁니까?”
그 질문에 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응! 어떻게 알았어?”
“아니, 뭐, 그런 건 그냥 보기만 해도 알지요.”
“그래? 보기만 해도 알겠어?”
에단의 말에 해리의 얼굴이 더욱 뿌듯해졌다.
“사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다들 우리가 연애 중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알게 됐어.”
“……예?”
에단이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사람들은 참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우리가 모르는 걸 먼저 알아채는지.”
“……아뇨.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하셨다면 당연히 알아채죠…….”
“그렇구나. 난 전혀 몰랐어!”
“……예, 뭐, 그러실 수도 있겠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단은 신기한 생물 보듯 해리를 쳐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정령과는 다른 의미로 이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가 하는 눈빛이었다.
“길잡이!”
해리와 에단의 대화를 지켜보는 내게 이카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베넘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기다!’
본능적으로 저곳에 신비의 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물기둥이 솟아오른 곳을 향해 달려가자 분노한 정령이 들판을 엉망으로 뒤집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목장마저 베넘처럼 쑥대밭이 될 기세였다.
“이 미친 정령은 또 왜 이래요? 돌도 잘 찾았는데.”
“돌이 이상하다고 한다. 원래 품고 있던 것과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인간들이 돌을 오염시켰다고 분노하는 중이다.”
“뭐라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기둥 가까이 다가섰다. 바닥에 묻혀 있었던 것인지, 흙으로 더러워진 돌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게 신비의 돌이라니.’
아무리 살펴봐도 평범한 돌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신비의 돌을 집어 들었다. 평범한 외관에 비해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어, 이건.’
손을 데우는 따뜻한 감각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의 돌을 만진 적이 있었다.
‘리안트로 숲에서!’
나는 금세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생명수 앞에서 만졌던 태양의 심장 조각도 이 돌처럼 뜨거웠었다.
‘……나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말이야.’
내가 불안함을 느끼며 돌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기이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 이 감각 역시 태양의 심장 조각을 만졌을 때와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붉은 빛이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신비의 돌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돌에서 흘러나온 빛은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손의 반지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붉은 빛이 반지 속으로 흘러들자, 분노해서 날뛰고 있던 인어 정령이 잠잠해졌다. 인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찬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윽. 내가 돌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 버린 거 아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는 슬그머니 발뺌하며 돌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인어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인간. 너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 순간 머릿속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듯한 어린 목소리였다. 생소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머릿속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다, 인간이여. 네 눈앞에 있는 정령.]
어느새 인어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할 수도 있는 거였어?]
그렇다면 여태까지 이카난을 통해 대화하는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령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우리의 인정을 받은 존재뿐이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이 미친 정령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왜?’
얼떨떨하게 정령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익숙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어. 역시 너는 특별한 인간이었구나.]
[난 특별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방금 네가 오염된 신비의 돌을 정화했잖아. 평범한 인간은 그런 걸 못 한다고.]
[……돌을 정화해?]
나는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은 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만졌더니 자기가 알아서 붉은 빛을 뿜어냈을 뿐이라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짝이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생명수 앞에서 벌어졌던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긴 걸 보면, 이 신비의 돌 역시 태양의 심장 조각이었던 것 같다.
‘그럼 나 벌써 태양의 심장 2조각을 모은 거야?’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벌써 이렇게 일이 진행되었다니. 그렇다면 벨모른에서 벌어졌던 그 많은 사건들 역시 내가 이 조각의 힘을 회수하도록 이끌기 위한 태양신의 안배였던 걸까.
‘역시 이건 태양신의 저주야…….’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태양신을 향해 이를 갈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난 안 할 거라고!’
내가 솔을 향해 갖은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사이, 정령도 나름의 결론을 내렸는지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 인간. 나의 계약자가 되어도 좋다.]
정령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계약자라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미 내가 거둬들인 존재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에렐에 수집해둔 존재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 미친 정령까지 더해질 필요가 없었다.
[뭐, 뭐라고? 나의 계약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정령이 충격 받은 얼굴로 바르르 떨었다.
[나, 나는 정령인데? 만물의 근원인 물의 정령이라고. 모두들 나와 계약하고 싶어 했는데!]
[응. 그런데 난 아냐.]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냥 그런 일도 있는 거야. 세상 모든 일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거든.]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돌은 제대로 찾았지? 내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정화까지 제대로 됐다니까, 이제 이거 갖고 샘으로 돌아가. 베넘도 제대로 복구해 놓고.]
나는 다시 돌을 주워 인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인어는 여전히 충격 받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나와의 계약을 거부할 수가 있어…….]
[이봐 정령. 어서 이거 받고 돌아가라니까?]
다시 한 번 돌을 내밀며 인어를 재촉했지만, 그는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인간이 날 거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도 안 돼!]
그렇게 외친 인어의 몸에서 강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바로 앞에 있던 나는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미친 정령이.]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닦아냈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내 경고에도 정령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흥. 정령은 인간의 말은 듣지 않아. 계약자라면 모를까.]
수작이 훤히 보이는 말이었다.
‘인간이 감히 내 제안을 거부하고 계약하지 않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구나.’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는 수밖에.
[……좋아, 정령.]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령을 불렀다.
[하자고, 그 계약.]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이 물줄기부터 그만둬.]
[싫어. 물줄기를 멈추면 말을 바꿀 거잖아?]
‘이게 정말!’
얄미운 말투에 이성이 뚝 끊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나는 차분하게 웃었다.
‘그래. 계약이 뭐가 문제겠어.’
계약을 한 뒤에 명령을 내려서 샘에 처박혀 있으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계약 따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이 성가신 미친 정령도 치워버리자.’
[계약은 어떻게 하면 돼?]
[서로의 이름을 말하고, 계약을 맺는다는 맹세를 하지.]
생각보다 간단한 절차였다.
[내 이름은 이브리아 오베론이야. 너는?]
[내 이름은 아스페리츠.]
정령이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물줄기가 멎었다. 나는 그제야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나와 계약하겠어?]
천진한 얼굴의 아스페리츠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스페리츠. 난 너와 계약하겠어.]
[좋아! 그렇다면 계약의 맹세를.]
웃고 있던 아스페리츠가 그대로 내게 다가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물이 입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몸이 서늘해졌다.
[이것으로 우리의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씩 웃으며 말하는 아스페리츠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의 있었던 목소리가 이젠 명확하게 청년의 것으로 들렸다.
‘그러고 보니 외모도…….’
소년에 가까웠던 모습이 단단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나 아스페리츠, 정령들의 왕, 계약자 덕분에 오랜만에 원래의 모습을 찾았군!]
[아, 이게 원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네가 정령들의 왕이라고?]
[그래. 나는 모든 정령들의 왕, 만물의 근원인 물을 다스리는 아스페리츠다.]
[……말도 안 돼.]
경악한 내 모습에 아스페리츠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내 원래 모습이 좀 놀랍긴 하지? 아무리 너라도 내 원래 모습이 이렇게 위엄 넘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다!]
[이딴 게 정령들의 왕이라니. 정령 세계도 망했어.]
나와 아스페리츠의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뭐라고?]
내 말을 들은 아스페리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분노한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 정령이, 내 주인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씩씩대는 해리를 보면서도 아스페리츠는 여유로웠다. 본래의 모습을 찾고서는 조금 전 해리에게 당해 머리가 수증기가 됐었던 기억을 전부 잊은 모양이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저 엉덩이에 불이 난 강아지처럼 날뛰는 녀석도 너의 계약자인가?]
[그래.]
[그렇다면 특별히 저 녀석도 정령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지.]
아스페리츠는 해리가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을 아량을 베풀며 여유롭게 웃었다.
[어이, 엉덩이에 불 난 강아지. 나는 정령들의 왕이자 이브리아 오베론의 계약자인 아스페리츠다. 너의 이름은 뭐지?]
길길이 날뛰던 해리가 아스페리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스페리츠? 정령들의 왕? 이브리아의 계약자?”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도 이 미친 정령이 정령왕인 줄은 몰랐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해명했지만, 해리가 궁금했던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이 녀석이 왜 네 계약자인데?”
“아. 하도 물줄기를 뿜어대길래 그걸 좀 멈추려고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미친 정령이랑 계약을 해?”
“그러는 해리랑은 뭐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계약했나요.”
해리와 계약을 한 이유도 고작 벽난로에 불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논리적인 지적에 해리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할 말을 잃고 눈을 껌뻑이는 해리를 향해 아스페리츠가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아, 이 녀석의 이름은 해리로군. 반갑네, 해리. 같은 이브리아 오베론의 계약자끼리 잘 지내보자고!]
“……누가 같다는 거야? 계약자라고 다 같은 줄 알아? 너랑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거든?”
해리가 날카롭게 아스페리츠를 노려보며 손 위에 푸른 불꽃을 불러냈다.
“감히 내 주인님에게 입을 맞춘 벌부터 받으시지.”
해리의 위협에도 아스페리츠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허허, 해리. 내가 조금 전처럼 얌전히 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정령들의 왕 아스페리츠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될 일이고.”
해리가 코웃음을 치며 아스페리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스페리츠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그러자 바닥에서 흙으로 된 손이 올라와 해리의 두 발을 단단히 붙잡았다.
크게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붙잡힌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스페리츠를 노려보았다.
“……치사하게 부하들을 부리겠다 이거지?”
[부하들을 부리는 것도 나의 능력이다.]
아스페리츠가 특유의 얄미운 말투와 표정으로 해리의 눈앞을 얼쩡거렸다. 명백한 도발에 해리가 헛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 불은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거든?”
경고와 동시에 거대한 불덩이가 아스페리츠의 오른쪽 팔을 향해 날아 들었다. 강력한 불길에 자신의 팔이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자, 아스페리츠가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정말 강력한 불이군. 본체로 돌아온 내 팔을 날려버릴 정도라면,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아스페리츠가 떨어져 나간 팔을 재생시키며 해리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해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 꼼꼼하게 그를 살핀 아스페리츠가 정답을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보니 너는 악…….]
“거기까지. 우리 주인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그 입을 닫는 게 좋겠어. 여기 네 말을 알아듣는 녀석이 있잖아?”
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카난을 힐끗거렸다. 다행히 아스페리츠도 해리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군. 알려져서 좋을 일은 아니지. 나 역시 이브리아 오베론이 곤란할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아예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라서 다행이군.”
해리가 투덜거리며 자신의 발을 붙잡고 있는 흙의 손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두 발이 자유로워진 해리가 이번에는 아스페리츠가 아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입맞춤은 아스페리츠 혼자 한 게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스페리츠의 입술이 부딪힌 건 내 입술이었다.
‘설마 나한테도 응징을 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상당히 억울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아스페리츠와의 입맞춤은 입맞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그냥 물이 입술을 스치고 가는 느낌이었으니 세수를 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브리아!”
해리가 화난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길고 긴 잔소리와 불만이 쏟아질 것이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럴 땐 먼저 치고나가는 게 상책이야.’
나는 재빨리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너 저 녀석이랑…….”
나는 해리의 불만이 제대로 쏟아지기 전에 그의 입술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불만을 쏟아내려던 해리의 입이 할 말을 잃고 떡 벌어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린 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이브리아.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해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해리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화 안 낼 거죠?”
활짝 웃으며 해리를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너 못 됐어. 왜 나는 화도 못 내게 해?”
“그래서 나한테 화내려고요?”
“……아니.”
해리가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제대로 입 맞춰주면 왜 화났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최대한 화난 척을 하고 있지만 이미 기분이 풀어진 티가 났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 해리의 화난 체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알았어요. 제대로 해줄게요. 나중에 집에 가서.”
“왜? 여기선 안 돼?”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요.”
“메에에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새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양들이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곳에서 진한 키스를 할 기분은 안 든단 말이지.’
해리 역시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했다.
[지금 보니 악마는 여기 있었네.]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와 해리를 지켜보던 아스페리츠가 감탄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그 혼란의 상황 속으로 이카난과 에단이 합류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에단이 달라진 아스페리츠의 모습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
“사정을 말하자면 긴데, 어쨌든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페리츠를 바라보았다.
[돌을 찾아주면 베넘을 복구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
[걱정 마. 아스페리츠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베넘과 웨어울프들의 문제는 해결이고.’
이제 벨모른 백작과 진지한 대화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