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높은 건물의 지붕 위에 앉아 세 남자가 웨어울프를 제압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간단하네.’
셋의 공세에 그 강하다는 웨어울프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픽픽 기절하고 있었다.
‘뭐, 해리는 혼자서도 와이번을 제압했었으니까.’
와이번과 웨어울프를 비교하자면 더 거대하고 하늘까지 날 수 있는 와이번이 더 강했다.
‘웨어울프 정도는 쉽지.’
일방적인 싸움에 일말의 긴장마저 사라졌다. 나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두 무릎을 끌어안고 턱을 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웨어울프들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군요.]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반쯤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움직임이 이상하다고요?”
[원래 보름달의 영향을 받아 늑대화가 되고 난폭해지는 것은 맞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공격성은 과하다는 건가요?”
[예. 모든 생명체의 가장 큰 본능은 생존 아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도망치는 게 대부분입니다. 웨어울프도 마찬가지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유피테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웨어울프들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본능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저 악마처럼 압도적인 상대를 만나면 도망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와이번들 역시 해리를 상대할 때 역부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종족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만약 종족을 지키려는 마음보다 본능이 앞섰다면, 살기 위해 당연히 도망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늑대화가 되면 본능과 폭력성이 극대화된다는 웨어울프에게 그런 생각이 있을 리는 없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확실히 이상했다. 웨어울프들은 광폭하게 으르렁거리며 쉴 새 없이 세 남자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다른 웨어울프가 쓰러지는 걸 봐도 달려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는 공격에 이카난과 리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이카난은 한정된 화살을 회수하며 싸우느라 더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째 불안하네요.”
[뭔가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뜻하지 않게 이상한 일에 잘 휘말리는 편이라서요.”
이게 모두 태양신이 깔아준 꽃길 탓이었다.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걸 제외하면 나한테 그리 나쁜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내가 바라는 인생이 귀찮은 일을 피하는 삶이라는 거다.
‘설마 이 일도 태양신이 깔아준 꽃길은 아니겠지.’
나는 불안함에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부터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벨모른 백작이 누가 사람이고 누가 웨어울프인지 모를 정도로 그 수가 많다고 했을 때는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엄청 많네요.”
벨모른 백작의 말은 단순히 공포에 질린 인간의 과장이 아니었다. 나는 공간을 가득 채운 웨어울프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눈으로 얼핏 세어 봐도 백이 훌쩍 넘었다.
“베넘에서 넘어 온 웨어울프에, 그들에게 물려 웨어울프가 된 벨모른 사람들까지 모두 잡아들인 거니까.”
리던이 질린 얼굴로 웨어울프들을 바라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뒤, 더러워진 손수건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제 슬슬 제 모습을 찾겠군.”
리던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햇살이 점점 커져 기절해있는 웨어울프들을 비추자, 늑대처럼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던 그들의 몸에서 서서히 털이 사라졌다. 길고 날카로웠던 손톱과 발톱도 줄어들어 점차 인간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주 순조로운 변화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어……”
나는 생각지 못한 문제에 당황해 입을 벌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웨어울프들이 전부 알몸이었던 것이다.
“……옷이라도 좀 챙겨드려야 하나……?”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으니 옆을 지키고 있던 해리가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왜 이래요?”
나는 시야가 가려진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리의 손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어찌나 힘이 좋은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해리의 팔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결국 힘으로 해리의 손을 치우는 걸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손 좀 내려요.”
“싫어.”
“왜요?”
“아직 내 몸도 안 봤잖아! 그런데 다른 놈 몸부터 본다는 게 말이 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꼭 이런 것까지 1등이어야 돼요?”
“당연하지. 난 너의 모든 첫 번째가 될 거야.”
“그러는 해리는 왜 다른 여자 몸을 보는데요?”
“……어?”
내 질문에 해리가 당황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나 안 봤는데? 진짜야. 아무것도 못 봤어. 아니, 조금, 어쩌다 보니 보긴 했는데, 별로 감흥도 없고 그렇거든?”
“나도 그래요. 해리 몸 말고 다른 건 봐도 별 감흥 없으니까, 그냥 손 좀 내려요.”
하지만 의외의 적이 해리의 편을 들었다. 리던이었다.
“아니. 그냥 그대로 있어.”
“왕자님은 또 왜 그러세요?”
“그다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잖아. 사람을 시켜 옷을 좀 챙겨오지. 그때까지만 좀 참아.”
“아니, 왕자님도 보고, 이카난도 보고, 해리도 보는데. 왜 나만 못 보게 해요?”
당당한 내 주장에 리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대는 이런 걸 보고 싶나?”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눈이 가려진 채로 답답한 게 싫다고요. 뭐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이게 뭐라고. 그냥 보게 해라.”
이카난이 나의 아군으로 합류했다.
“그저 자연 상태의 인간이 널려 있을 뿐이지 않나?”
“맞아요. 그냥 자연 상태의 인간일 뿐인데.”
나는 이카난의 지지에 힘을 얻어 목소리를 높였다.
“같이 다니는 분들이 어찌나 섬세하신지. 아주 불편해 죽겠다니까요.”
“이브리아 오베론. 그대가 너무 수더분하다고는 생각 안 해봤나?”
리던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사람을 시켜 옷을 가져오겠어. 이들도 눈을 뜨고 이성을 되찾으면 알몸인 게 부끄러울 테니까.”
웨어울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그 말도 옳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나 혼자만 이러고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다 같이 밖에 나가서 기다려요.”
어차피 나갈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었다. 그걸 지키고 있으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웨어울프들이 도망칠 일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합의하지.”
리던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것인지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가려진 채로는 밖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해리의 팔을 잡아당겨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내 상황을 피력했다.
“그런데 해리. 이렇게 눈이 가려진 채로는 나갈 수가 없…….”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이 번쩍 들렸다.
“앗!”
순식간에 땅에서 발이 떨어지며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놀라서 나를 들어 올린 존재를 꽉 붙들었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낮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안전하게 모실게, 주인님.”
* * *
우리는 곧 이성을 찾은 웨어울프들과 마주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하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중에는 두려움이 흘러 넘쳐 눈물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새벽에 그렇게 날뛰었던 늑대인간들이라고는 아무도 생각도 못 하겠는걸.’
어제 해리가 직접 때려잡아 데려온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 역시도 이들이 웨어울프라는 걸 믿기 힘들었을 거다. 새벽의 그 치열한 전투를 겪고서도 웨어울프들에게는 상처는커녕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트롤만큼 뛰어난 재생력을 가지고 있어 상처는 물론이고 몸의 피로까지 모두 회복되어 버린 것이다.
[웨어울프는 리더를 중심으로 무리 생활을 합니다.]
누구와 이야기하면 좋을지 몰라 웨어울프들과 미묘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으니 유피테르가 슬쩍 정보를 흘려주었다.
[이곳에도 리더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화 상대를 정하는 건 쉬웠다.
“이 무리의 리더가 누구죠?”
내 질문에 웨어울프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곳으로 향했다. 시선을 받은 자는 무리의 중앙에 섞여 있던 순박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왜소한 체격에 낯빛이 어두운 사내는 리더의 위엄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내 앞까지 걸어 나왔다.
건장한 사내들도 여럿 있는데 어째서 이 자가 웨어울프들의 리더가 된 것일까?
의아한 기분으로 남자를 관찰하고 있으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에단입니다.”
“정말 당신이 리더인가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예. 그렇습니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에도 남자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런 침착함 때문에 리더가 된 것 같군.’
상대는 평민이지만, 그 위치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브리아 오베론이에요.”
나는 반갑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에렐의 영주이고, 당신은 웨어울프들의 리더이니,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 똑같네요.”
‘위치에 맞는 대접을 해주는 것이 성공적인 대화의 시작이지.’
우두머리를 잘 대접하고, 그 모습을 그가 대표하고 있는 무리에게 보여주는 것. 이 간단한 행위 하나만으로도 한 무리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만나서 반갑다니…….”
내 말에 잔뜩 지친 얼굴의 리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에 치열한 전투를 치른 상대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기가 찬 눈치였다.
“에단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나는 그런 리던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눈앞의 남자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웬만하면 빨리 악수해주면 좋겠어요. 뻗은 손이 좀 민망해서.”
허공에 홀로 뻗은 손을 가볍게 흔들자 어쩐지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에단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악수는,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웨어울프와 접촉하면 당신도 짐승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에단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로 배척당한 적이 많았나 보네.’
벨모른 백작의 태도만 보아도 웨어울프가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통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른한 눈꺼풀 사이로 뜻밖에도 형형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대화가 통할 상대인지 시험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나 어느 쪽이든 내게는 상관없었다.
“물리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하던데요. 웨어울프는 전염병이 아니라고요.”
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카난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 시선을 받은 이카난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악수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쪽의 기분이 내킬 때의 이야기겠지만요.”
내 말에 형형하던 에단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제 쪽에서 내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단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악수하자 에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마치 악수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신기한 눈으로 맞잡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웨어울프라는 걸 알고도 악수하자며 손을 내민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사실 그걸 노렸어요. 당신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요.”
“……보통 그런 걸 직접 이야기하는 겁니까?”
에단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당신 같은 부류에겐 가식보다 솔직한 게 잘 먹힐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에단이 눈을 크게 떴다. 의표를 찔린 얼굴이었다.
“정곡을 찔렸죠?”
에단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지만, 경계심이 한 꺼풀 떨어진 그의 얼굴을 보면 내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죠. 왜 베넘을 빠져나와 벨모른으로 온 거예요?”
강이 메말라 길이 생긴 건 하나의 기회였다. 웨어울프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을 건너 벨모른으로 오는 것을 선택했다.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을 터.
“당신들은 베넘을 모르죠.”
내 말에 에단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곳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으니까요.”
에단의 말처럼 베넘은 미지의 땅이었다. 오래전 웨어울프들을 격리시킨 이후, 평범한 인간은 누구도 그 땅을 밟지 않았다.
“기회가 있다면 이곳을 빠져나가 풍요로운 땅으로 나가는 게 당연한 겁니다.”
“다른 이들이 당신들을 배척하더라도요?”
“굶주리는 것보단 낫겠죠.”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벨모른에 몰려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배척당하는 삶 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니까요.”
나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웨어울프들은 보름마다 늑대화된다. 평범한 인간들의 마을에 섞여 살기엔 힘든 점이 많았다.
“그래서 식량만 구하고 다시 베넘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양과 돼지를 훔쳐 다시 메마른 강을 건너려는데…….”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베넘에 남아 있던 일족들이 벨모른을 향해 도망치고 있더군요.”
“……네?”
“우리도 쫓겨난 겁니다. 지금은 베넘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쫓겨나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물론이고 리던까지 놀란 얼굴을 했다.
“베넘은 웨어울프들의 땅이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 땅에서 너희들을 몰아낼 수 있단 말이지?”
리던의 질문에 에단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를 베넘에서 쫓아낸 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베넘이 원래 정령의 땅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정령?”
에단의 말에 리던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설마 정령이 너희들을 쫓아냈다고 할 셈인가? 책임 전가도 적당히 해. 사고 친 걸 면피하겠다고 전설 속의 존재를 끌어 오나?”
리던의 비난에도 에단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단 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베넘의 웨어울프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까지 똑같은 눈빛이었다.
“……그게 면피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고?”
리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동요하는 일이 드문 이카난도 이번에는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우리 역시 베넘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좋으나 싫으나 조상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온 우리의 땅이잖습니까.”
에단이 침울한 동료들을 훑어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노한 정령들이 베넘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폭풍이 불고, 땅이 뒤집히고…… 누구도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말로 정령이, 아니, 정령들이 갑자기 왜……?”
리던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나도 머리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벨모른에 웨어울프가 날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이제는 베넘의 정령까지 문제라니.
“우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정령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니…….”
에단도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라면 내가 해볼 수 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카난이 앞으로 나섰다. 엘프의 특징인 긴 귀를 발견한 에단이 희망에 찬 눈빛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군요. 숲의 일족은 정령과 대화할 수 있다고 했지요.”
“정령의 언어를 안다. 직접 정령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완벽하게 구사하긴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대화는 할 수 있겠지.”
“그럼 베넘으로 가야겠군요.”
일행의 새로운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러나 이곳을 완전히 비울 수는 없었다. 벨모른 백작과 소통하고 웨어울프들을 감시할 사람이 하나 정도는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 역할이라면…….’
이카난은 정령과 대화를 해야하고, 해리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남는 건 리던 하나뿐이었다. 그는 신분으로도 이곳의 영주인 벨모른 백작에게 눌리지 않을 테니 더욱 적절했다.
“왕자님.”
내가 자신을 부를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리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남아서 벨모른의 상황을 통제하지.”
“부탁드릴게요.”
나는 리던에게 벨모른의 상황을 맡긴 뒤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베넘으로 향하는 길은 웨어울프들밖에 모르니까요.”
“그러죠.”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약속을 해줘야겠어요.”
“약속이라면?”
“정령이 진정하고, 베넘이 안정화되면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이요.”
이건 벨모른 백작과의 거래를 위한 조건이었다. 웨어울프들이 그들의 터전으로 돌아가야만 강의 상류에 보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죠.”
에단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제안인데, 베넘이 안정화되면 에렐과 교역을 했으면 좋겠어요.”
“……교역이요?”
“네. 베넘이 척박한 땅이라 먹고 살기가 힘들다면서요. 우리와 교역하면 먹고 살 길이 조금은 열릴 거예요.”
땅을 떠날 수 없다면, 내가 에렐을 풍요롭게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그곳을 풍요롭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땅이 척박하다면 자급자족은 힘들다. 어쩌다 엘프들을 영지민으로 받아들여 땅을 일굴 수 있게 된 운 좋은 상황이 아니라면, 결국 교역을 통해 발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넘이 풍족해지려면 그 방법을 써야 한다.
‘하지만 여태까지 베넘과 거래하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
사람들은 웨어울프들을 생각할 때 늑대화 된 괴물의 모습만을 떠올린다. 그런 괴물과 거래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들과 충분히 거래를 할 수 있겠어.’
게다가 그들이 가진 것 중에 꽤 탐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에단은 자신들이 가진 엄청난 유산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교역이란 것은 서로 교환할 것이 있을 때나 하는 게 아닙니까. 베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단이 반가우면서도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강에서 자라는 물고기나 잡아서 자급자족할 뿐이죠. 물품을 구입한다고 해도 지급할 돈이 없고요.”
“내가 베넘에 바라는 건 식량이나 물품이 아니에요. 돈도 아니고요.”
“그걸 제외하면 뭐가 남지요?”
“몸이요.”
“……예?”
내 말에 에단이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건 리던과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이카난만 태연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모, 몸을 원한다고? 웨어울프의?”
나를 바라보는 해리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누군가의 몸이 필요하다면 내걸 써!”
열심히 눈을 굴리던 해리가 결단을 내렸다는 듯 비장하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에 관심이 없었다.
“해리의 몸을 가져다가 어디에 쓰게요?”
“안 써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써보면 꽤 쓸모가 많을걸?”
‘물론 이래저래 쓸모가 많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구상하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몸이었다.
“필요 없어요.”
단호한 거절에 해리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뻐끔댔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홀로 열심히 땅을 파는 해리를 외면하고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 에렐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할게요. 대가는 몸으로 지불하세요.”
“그, 몸이라는 게…….”
“더 정확하게는 피를 원해요.”
“네?”
“교역의 대가로 당신들의 피를 줬으면 좋겠어요.”
좀 더 정확해진 내 말에 에단의 얼굴이 굳었다.
“거래를 위해 일족을 죽여야 한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뇨, 웨어울프들을 죽이겠다는 게 아니라…… 피를 좀 뽑아줘요.”
“……예?”
에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던과 해리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이카난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 생각이 있다고.’
웨어울프는 트롤과 맞먹을 만큼의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생력이 강한 트롤의 피는 포션의 핵심 재료였다. 그렇다면 비슷한 재생력을 가진 웨어울프의 피 역시 포션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웨어울프의 피로 포션을 만든다. 그게 나의 생각이었다. 신전이 강력한 회복 포션을 제조해 영향력과 부를 거머쥐었다는 소리를 듣고 번뜩 떠오른 계획이었다. 트롤은 마수로 분류되기 때문의 그들의 피 역시 왕실의 재산이었다. 하지만 웨어울프는 마수가 아니므로 왕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의 피를 수급받을 수 있었다.
‘그걸 내가 선점하는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베넘의 상황을 정리한 뒤에 나누죠.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그러지요.”
에단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베넘의 분노한 정령들을 달래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