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9/156)

* * *

나는 당장 해리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 놀라운 깨달음을 나 혼자만 알고 있기는 아까웠다.

‘악마들은 연애가 뭔지 모른다고는 했지만…….’

해리의 쾌락을 채울 방법을 찾기 위해 악마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악마들은 본능에 따라 몸을 섞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에는 연애나 결혼 같은 개념이 없다고 했다. 워낙 자유롭게 쾌락을 즐기다 보니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기 힘든 경우도 많아서 자연스레 모계 사회가 형성되기도 했다.

‘해리는 연애가 뭔지 모르는데, 나는 해리랑 연애 중이라니.’

그 사실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 연애가 뭔지 모르면 어때. 내가 가르쳐주면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해리의 방 문을 두드렸다.

“이브리아!”

문을 활짝 열고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한 해리가 금세 불안한 얼굴로 내 등 뒤를 힐끗거렸다.

“혹시 이번에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왔어?”

“아뇨. 오늘은 혼자예요.”

나는 씩 웃으며 해리를 끌어안았다. 해리가 갑작스럽게 달려든 내게 밀려 뒷걸음질 쳤다.

“어어…”

해리의 입에서 얼떨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게 상당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해리, 긴장했어요?”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해리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긴장을 풀라고 한 행동인데, 오히려 해리의 몸이 더 뻣뻣해졌다.

“아, 아, 아닌데? 나 긴장 같은 거 안 했는데?”

“긴장했네.”

“안 했다니까?”

“거짓말하면 키스 안 해줄 건데요?”

내 말에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나 엄청 긴장했어.”

짧은 침묵 뒤에 해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진실을 고백했다.

“네가 이렇게 날 안아준 건 처음이라서, 엄청 긴장돼.”

“처음이라고요?”

나는 해리의 가슴팍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 해리 많이 안아주지 않았어요?”

“내가 안아달라고 안 해도, 내가 예쁜 짓을 안 해도 안아준 건 처음이잖아.”

해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네. 있었어요, 좋은 일.”

“무슨 일인데?”

“나도 몰랐는데, 내가 연애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방금 그걸 알게 됐어요!”

“연애?”

해리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입을 벌렸다.

“아. 나 그거 알아.”

“어? 알아요? 악마들은 연애가 뭔지 모른다던데.”

“응. 원래 우리한테는 없는 개념인데, 여기 와서 알게 됐어. 마담 루이제 책에 연애라는 말이 나왔거든.”

“……그 관능 소설 정말 유용하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까지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거기선 연애가 뭐래요?”

“우선 서로를 연인이라고 불러.”

“그리고요?”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걸 허락하는 사이랬어. 누구보다 가까워서,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것까지 모두 공유하는 거라고.”

“그래서요?”

“응. 그래서 거기 나오는 인간들이…….”

기억을 더듬는지 천천히 말을 잇던 해리가 이야기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브리아. 너 연애 중이야?”

“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 연인이라는 놈이랑 그런 것도 했어?”

관능 소설로 연애를 배운 해리가 말하는 ‘그런 것’이라면 뻔했다.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는 걸 말하는 거겠지.’

“아직요. 그런데 언젠가는 하겠죠?”

‘해리가 날 잡아먹는 법을 언제 배워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태평하게 해리의 배움을 걱정하는 내 말에 그가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왜요?”

“그런 거 하지 마. 네가 나보다 다른 자식하고 더 가까워지는 거 싫어.”

“그럼 그것만 안 하면 돼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는 건 괜찮나?”

내 말에 해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지 마.”

해리가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으며 쓰러지듯 내 몸에 기대왔다. 커다란 남자의 무게에 못 이겨 휘청거리자, 해리가 흔들림 없이 나를 꼭 껴안았다.

“그러지 마, 이브리아. 나만 예뻐해 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자식이랑 연애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 듣는 그 자식이 기분 나쁠걸요?”

“그 자식 기분이 나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있죠. 그 자식이 해리인데.”

내 말에 씩씩대던 해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강하게 나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나를 바라보는 해리의 얼굴이 멍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가 연애하고 있는 상대, 해리잖아요.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

“……어어?”

“인세티아 남작이 그러더라고요. 다들 나랑 해리가 연애하는 줄 안대요.”

“……어어어?”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맞더라고요. 내가, 해리랑 연애하고 있는 거였어.”

나는 까치발을 들어 해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행이네요.”

“뭐가?”

“해리한테 연애가 뭔지부터 알려줘야 하는 줄 알고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잘 알고 있네요.”

내 말에 해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해리의 두 눈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네 연인이라는, 그러니까, 너랑 내가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라는 거야?”

“네.”

“내가 너하고 다른 사람과는 할 수 없는 모든 걸 해도 된다는 거고?”

“네.”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해리의 눈이 열기로 가득 찼다. 해리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을 스칠 때마다 해리의 허리를 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해, 이브리아.”

“나도 좋아해요, 해리.”

언젠가 똑같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무게는 완전히 달랐다.

[드디어 제대로 의미가 통했군요. 그동안 답답해서 죽을 뻔 했는데….]

유피테르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 잠시 눈과 귀를 닫고 있겠습니다. 1시간 후에 일어나지요.]

“……1시간도 부족하다고, 성검.”

그렇게 투덜거린 해리가 머뭇거리며 조금씩 내게 다가와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 섰다.

“뭘 하려고 1시간이 부족한데요?”

“글쎄.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해리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눈, 코, 입. 나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오는 시선을 따라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내 눈이 완전히 감기는 것과 동시에 해리가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해리와 몇 번이나 입을 맞췄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해리에게 잠식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숨이 뒤섞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부족한 숨을 채우려 더욱 해리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해리에게 매달려도 부족한 숨이 충족되지 않았다.

“이브리아.”

해리가 괴로운 얼굴로 천천히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기쁜 것인지, 곤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너한테 심어준 내 영혼의 조각이 기분 좋게 울려.”

해리가 내게 준 영혼의 조각이 내 상태에 반응하여 그에게 영향을 준다고 했던가. 나는 웃으며 제 가슴을 부여잡은 해리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응. 나 지금 되게 기분 좋거든요. 그게 다 느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아주 신기했다.

‘상대의 기분에 공명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나도 느껴보고 싶어요. 내 영혼의 조각도 해리한테 주면 안 돼요? 그럼 나도 해리의 기분에 공명할 수 있잖아요.”

“그건 안 돼.”

해리가 단번에 거절했다.

“좋은 감정에만 공명하는 게 아니라서 인간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럼 불공평하잖아요. 해리는 내 감정을 이렇게 선명하게 느끼는데, 난 해리 감정을 모르니까.”

“내가 전부 솔직하게 말해 줄게. 그럼 되잖아.”

“……뭐, 사실 말해 줄 필요도 없겠어요.”

‘해리는 전부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나는 열기로 가득한 해리의 얼굴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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