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프들은 농사를 위해 제공된 척박한 평야 위에 생명수를 심었다. 본격적인 밀과 보리 농사는 생명수가 뿌리를 내리고, 주변의 땅을 생기로 가득 채운 뒤에야 가능하다고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구나.’
엘프들은 생명수가 새로운 땅에 자리 잡기를 기다리며 에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숲에 틀어박혀 새로운 터전을 일구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에렐의 새로운 영지민이 되기를 자처했다.
‘숲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농작물을 돌볼 때나 밖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엘프라면 원래 고독한 숲의 수호자라는 이미지 아닌가?’
실제로 리안트로 숲에 터전을 잡고 살았을 때에는 가까운 영지와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유피테르는 원래 엘프들의 성향이 그리 고독하지는 않다고 말해주었다.
[엘프는 무엇보다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인님을 길잡이로 삼아 인간의 땅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인간들과도 조화를 이뤄야겠다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그들이 에렐에 스며들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엘프와 인간의 사이를 중재하느라 고생할 일은 없어진 거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엘프들의 정착 문제처럼 잘 풀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점점 가을 우기가 다가오는데…….’
아직까지 강의 방비가 완벽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또다시 지난 악몽이 반복되겠지.’
“사정이 급박하니, 이제 저도 왕자님들을 독촉할 수밖에 없겠네요.”
나는 리던과 카시안을 앞에 앉혀 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방을 건설하는 일은 어떻게 진행 중인가요? 아직도 재상이 영지 곳곳을 쏘다니고 있던데.”
먼저 질문을 받은 카시안이 다소 초췌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간 물음표 살인마 메이슨의 질문 공세에 많이 시달린 모양이었다.
“자금 집행은 무난하게 될 겁니다. 그럼 곧 제방 건설이 시작되겠지요.”
“중간에서 재상이 훼방을 놓으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방 설계도를 직접 골라주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그걸 뒤엎지는 않을 거예요.”
“설계도를 직접 골라줘요? 그 재상이요?”
“네. 여러 안을 두고 고민 중이었는데, 재상이 보자마자 쓸 만한 설계도는 하나뿐이라고 못을 박더군요.”
그때를 떠올렸는지 카시안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에서 부족한 부분을 고쳐주기까지 했습니다. 천재는 천재구나 싶었죠.”
“……뭐, 그것참 익숙한 이야기네요.”
나는 메이슨이 한자리에 서서 케이블카의 설계도를 완벽하게 보충해버린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메이슨은 틀리거나 부족한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방에다 자기 지식을 뽐내고 다니는구나.’
결과적으로 에렐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니 오히려 환영할만한 오지랖이었다.
“그런데 메이슨 제상은 왜 아직도 에렐에 남아 있는 거래요?”
메이슨이 에렐에 온 것은 제방 건설에 중앙의 자금을 지원해도 좋을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예정대로 자금을 지원해 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글쎄요. 뭔가 메이슨 재상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요?”
내 질문에 카시안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재상이 원래 호기심이 많지 않습니까. 머릿속의 물음표를 전부 해결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뭐, 에렐에는 신기한 게 많으니까요.”
메이슨이 관찰하고 있는 곳들이 어디인지는 매일 보고 받고 있었다. 검은 숲과 서리기사단의 훈련장, 라파쉬와 마법사들의 작업장까지. 그는 에렐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은 참견을 다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메이슨이 왕국의 재상이 아니라, 에렐의 참모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나의 반응이 싱거웠는지 카시안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재상이 에렐에 머무르는 걸 생각보다 싫어하지 않는군요?”
“그분이 생각보다 쓸 만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메이슨의 갖은 참견이 해가 되었다면 진즉에 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조언은 아주 정확해서, 오히려 영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케이블카만 해도 그래.’
메이슨이 순식간에 설계도를 완성시켜 준 덕분에 벌써 제작에 들어갔다.
“……재상을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그대 한 사람뿐일 겁니다.”
메이슨은 재상으로 왕국의 다양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 다들 메이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으니, 그의 ‘쓸모’를 평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가차 없는 평가는 이미 그에게 밉보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리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왕자님. 상류의 보 문제는…….”
질문을 끝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군요.”
나는 리던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의 눈에 곤란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역시 벨모른 백작 쪽에서 쉽게 협력해주지 않죠?”
벨모른 백작령은 강의 상류에 자리 잡고 있어 우기에도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자기 영지에 피해가 없는데, 하류 사람들이 곤란을 겪는다고 제 영지에 보를 만들어 줄 영주가 몇이나 될까? 벨모른 백작이 현상 유지만을 바라며 유야무야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리던의 입에서 애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벨모른은 조건부로 보 건설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조건부로요?”
“에렐이 벨모른을 도와준다면 벨모른 역시 에렐을 돕겠다는군.”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겠다는 건가.’
계산적이라 얄밉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주 타당한 주장이었다. 만약 내가 벨모른 백작의 입장이었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적당히 타협해서 보를 건설하는 게 좋겠지.’
우기가 다가오고 있어 우리 쪽의 사정이 급했다.
“벨모른이 우리에게 바라는 도움이 뭔데요?”
“그건 에렐의 영주, 성검의 주인이자 대마법사와 용기사들의 주군인 그대를 만나 직접 말하고 싶다고 한다.”
“절 직접 만나서요?”
“아무래도 영지 안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어. 최대한 비밀스럽게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제야 리던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밀에 부치고 싶은 문제라면 당연히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벨모른 백작은 외부인인 내게 도움을 청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부에서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한 모양이네요.”
“백작과는 서신으로만 의견을 주고받아 그곳 영지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흘러가는 사정만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벨모른에서 발생할만한 심각한 문제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벨모른 백작령은 양 목축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왕국에서 생산되는 양모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벨모른의 특산물은 이 양모를 두툼하게 짜 만든 모직물이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따뜻하기까지 한 최고급 모직물은 한 영지의 한 달 예산에 육박할 정도로 값이 비쌌다. 거칠고 투박한 하급의 모직물도 비싼 가격에 팔리긴 마찬가지였다. 왕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이웃 제국의 귀족들까지 벨모른의 모직물을 사랑했다. 덕분에 벨모른은 왕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영지가 됐다.
‘벨모른 백작은 사교 시즌마다 왕도에 나타나서는 돈을 종이처럼 뿌리고 다닌다지.’
그렇게 태평하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부의 도움을 청할 문제라면? 당연히 이 모직물 생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충 짐작이 가네요.”
“뭐, 뻔한 이야기지.”
리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카시안도 동의한다는 듯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와 관련해서 에렐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벨모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럼 제가 벨모른 백작과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네요.”
“이건 내 시험인데 그대가 나서주는 건가?”
“왕자님의 시험이지만, 에렐의 현실이기도 하죠. 이런 문제에 시험을 따지고 있는 것도 웃기잖아요. 당장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달린 문제인데.”
내 말에 리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상당히 미묘했다.
“……제가 뭐 이상한 말 했어요?”
지난 말을 곱씹으며 묻자 리던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웃기는 소리를 해서 미안하군. 시험 생각은 접어 두고 문제 해결에 집중하지.”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신데요? 엄청 즐거워 보이시는데.”
내 지적에 외려 리던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 * *
나는 곧장 벨모른 백작에게 편지를 보냈다. 리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달받았으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벨모른 백작은 내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당히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비밀리에 영지를 찾아줬으면 좋겠대요. 편지로 이야기할만한 사안이 아니라고요.”
눈으로 편지를 훑으며 꺼낸 말에 인세티아 남작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자존심 강한 벨모른 백작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조금 의외로군요.”
말하는 투가 벨모른 백작에 대해 잘 아는 눈치였다.
“벨모른 백작을 알아요?”
“북부 귀족 연합의 일원으로 자주 얼굴을 보았죠.”
변방 귀족들은 중앙의 왕도를 기준으로 동, 서, 남, 북으로 나뉘어 각자의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난번 트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서부 귀족 연합이 나섰던 것처럼, 북부의 귀족들 역시 연합을 이루고 긴밀한 협력을 도모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벨모른은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입니다. 덕분에 아주 콧대가 높아서…….”
인세티아 남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줄였다. 그 뒤에 올 말이 그리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상대하기 썩 편한 상대는 아닙니다. 워낙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라서요.”
“그 부분은 걱정 없겠네요. 자기애는 나 역시 뒤처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벨모른 백작 앞에서도 기죽거나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나를 보며 인세티아 남작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점이 벨모른 백작과 다르시지요.”
“좋은 거죠?”
인세티아 남작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은 그쪽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죠. 벨모른으로 가보려고요.”
이후의 결정은 벨모른의 상황을 파악한 뒤에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벨모른에 대해 알아둬야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백작이 조금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점이 문제죠. 하지만 영주님이라면 걱정 없습니다.”
“그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인데요.”
“어차피 영주님께선 주위의 평가에 관심 없으시잖습니까.”
“아. 방금 그 말로 좀 더 욕에 가까워졌네요.”
“그리고 영주님께선 그게 욕이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겠죠.”
나를 정확하게 파악한 말이었다.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씩 웃으니, 인세티아 남작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영주님께서 연애를 조금 덜 요란하게 해주셨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연애?”
“예. 사용인들의 입을 단속하는 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서요.”
“……내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내 질문에 인세티아 남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모르셨습니까?”
“난 몰랐는데요. 언제부터 내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본인의 연애는 본인이 잘 아시겠죠.”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요. 내가 연애하는 중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에요. 이런 걸로 왜 장난을 치겠어요?”
“…….”
인세티아 남작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마법사님과 하시는 그게 연애가 아니면 뭡니까?”
“해리요? 나 해리랑 연애하는 중이에요?”
“……아마 영주님만 빼고는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아니에요. 해리도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럼 마법사님과 영주님, 두 분만 빼고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왜요?”
“왜라니…….”
남작이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냥 누가 봐도 연애 중이시거든요, 두 분.”
“하지만…….”
나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뗐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손도 잡았고, 키스도 했고, 껴안고 한 침대에서 잠도 자고, 서로 좋아한다고도 말했다.
‘이게 누가 봐도 연애하는 게 맞긴 한데…….’
처음 시작은 필요에 의해서였다. 해리의 쾌락을 충전해서 그가 폭주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처음의 목적을 잊은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 만약 해리와 입을 맞추지 않아도 그가 폭주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기꺼이 해리와 입을 맞출 것이다.
‘왜냐면, 해리가 좋으니까.’
나는 좋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해리는 이제 더 이상 종이 악마가 아니었다. 내 애완견도, 내 소유물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도 해리에게 입을 맞췄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와. 나 진짜 해리랑 연애하고 있나 봐요.”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인세티아 남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