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156)

* * *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해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해리와의 거리가 가까운 상태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 질문에 굳어 있던 해리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까웠던 숨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어, 나는, 그게…….”

“나쁜 짓 하려고 했구나.”

“아냐!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하겠어? 절대 아냐!”

“아닌 것 치고는 너무 당황하는데요?”

정곡을 찔린 건지 해리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이왕 들킨 거, 그냥 하려던 거 할래.”

해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뭘 해도 넌 나 무서워하잖아. 그럴 거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그런 취급 받을래.”

“내가 해리를 무서워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해리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읏!”

놀라서 신음을 흘리자, 해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 입을 맞춰왔다.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혀에 그렇지 않아도 깊은 수면으로 나른해져 있던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상대가 종이 악마인지, 진짜 악마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질척하게 엮여오는 상대가 해리라는 것만 선명했다.

해리와의 입맞춤은 이미 익숙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의 해리는 익숙한 행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해리의 손이 치마 속을 파고들어 내 허벅지를 쓰다듬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해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해리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내게서 멀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치마가 말려 올라가 허전한 아래를 힐끗거리며 해리에게 물었다.

“해리.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몰래 하려던 게 이거였어요?”

해리는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해도 되는데,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는 것도 좀 필요하고…….”

어쩐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뭐, 생각보다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그러진 않네.’

여태까지 해리를 피해 다닌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래도 조금은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해리가 입술을 비벼 온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았다.

‘종이 악마든, 진짜 악마든 해리는 해리다-이건가.’

그건 해리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구축해온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가짜라고 생각하고 쌓아온 관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까지 가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해리가 종이 악마가 아닌 진짜인 걸 알고 나니까 현실감이 느껴져서…….’

예전에 입을 맞출 때보다 더 몸이 달아올랐던 것도 같고.

‘으. 나 좀 변태 같다.’

스스로의 음흉함이 민망해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부러 해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진짜 그거 하려고 했어요? 나 잠든 사이에?”

펄쩍 뛰며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해리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조용했다. 나는 의아해져 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해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왜 나 안 밀어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동안 왜 자길 피해 다녔냐며 칭얼거릴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불만이 튀어나왔다.

“내가 마음대로 너한테 입 맞추고, 너 만지고 그러는데. 왜 나 안 밀어내? 왜 가만히 있어?”

“……그게 불만이에요?”

“그래!”

아니. 그게 도대체 왜 불만이란 말인가.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입만 뻐끔대고 있으니 해리의 두 눈에 점점 물기가 차올랐다.

“어어…….”

‘설마 울어?’

내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해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헉. 내가 울린 건가? 그런 건가? 아마 그런 거겠지?’

의도치 않게 악마를 울려버린 인간이 된 나는 당황해서 눈을 껌뻑였다. 도대체 내가 이 악마를 어떻게 울린 걸까.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우는 남자를 달래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생각해보니 내 눈앞에서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너 왜 가만히 있어? 내가 멋대로 굴면 네가 혼내야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나를 향해 해리가 물었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 무서워서 이제 반항도 못 하는 거야?”

해리의 입에서 쏟아지는 질문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해리를 왜 무서워해?’

오히려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던 과거를 반성 중이었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해리의 입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태양신이 내가 엄청 무서운 악마라고 그랬어? 비열하고 저급한 놈이니까 피하라고?”

한참이나 제 할 말을 쏟아낸 해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숫제 통곡을 시작했다.

“나 왜 무서워하는데? 난 네 개인데. 네가 하라면 뭐든 하는 네 건데.”

‘그러니까 이게 전부 무슨 말이냐고.’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선 이 악마를 어떻게든 달래야겠군.’

나는 몸을 일으켜 해리를 불렀다.

“해리. 고개 들어봐요.”

하지만 몇 번이나 불러도 해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서글프게 우는 소리만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말로는 안 되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해리의 뺨을 감싸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해리 안 무서워해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단호하게 말했지만 해리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 왜 날 피해 다녔는데?”

“음…….”

거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을 해리에게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믿기도 힘든 이야기이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반성하느라 해리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요.”

“반성?”

“네. 여태까지 내가 해리를 좀 우습게 보고 있었거든요.”

‘과거의 나, 해리를 가짜 세계의 종이 악마로 생각하고 막 나갔었지.’

“그거 반성하는 중이었어요.”

나의 고백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자길 우습게 봤다고 화난 거겠지. 화내면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해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반성? 그거 오래 걸려? 얼마나 걸려? 그만하고 그냥 나 봐주면 안 돼?”

질문을 와르르 쏟아내는 해리를 보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해리는 정말 개 같았다. 주인이 아무리 잘못해도 애정만 주면 된다며 꼬리를 흔드는 개.

“난 네가 날 우습게 봐도 상관없어. 그게 뭐가 대수라고.”

해리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반성 그만하자, 이브리아. 응?”

나는 해리의 등을 토닥이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를 다독였다.

“알았어요. 나 이제 반성 그만할 테니까, 해리도 울지 말아요.”

“정말? 이제 반성 안 할 거야?”

“네. 해리가 괜찮다고 해줬으니까 이젠 반성 그만 해도 돼요.”

내 말에 해리가 반색하며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이제 나랑 놀아줄 거지?”

“그럼요.”

“나 피하지도 않아?”

“그렇다니까요.”

“다행이다.”

두 번이나 나의 확답을 받아낸 뒤에야 해리가 울어서 코끝이 빨개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는 손을 뻗어 해리의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주며 씩 웃었다.

“어휴. 이 울보를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긴. 잘 데리고 살아야지. 네가 나 책임진다고 했잖아.”

혹시나 내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다는 듯, 해리가 제 눈물을 닦아주던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손 잡아주고, 껴안아주고, 입도 맞춰줘야 돼. 그럼 난 너의 착한 해리가 될게.”

“그렇게 안 해주면 못된 해리가 되려고요?”

해리가 큰일 날 소리를 한다는 듯 펄쩍 뛰었다.

“내가 어떻게 내 주인님한테 못되게 굴어?”

“그럼요?”

“그럼…….”

잠시 생각하던 해리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럼 네가 날 예뻐하도록 노력해야지.”

“예를 들면요?”

“예쁜 짓을 한다든가.”

“예쁜 짓?”

해리가 말하는 예쁜 짓이 뭘까. 짐작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니 머뭇거리던 해리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지그시 포개졌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얼마 전 해리가 메이슨보다 자기를 더 예뻐해 달라며 내게 입을 맞췄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나치게 귀여운 예쁜 짓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예쁜 짓이에요?”

“예쁜 짓 아냐?”

“예쁜 짓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해리.”

“제대로?”

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해리의 상체가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기울어졌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것인지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놀라움으로 굳어버린 해리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느리고 집요하게 내부를 괴롭히자, 해리의 목 깊은 곳에서부터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속에서 뒤섞였다. 해리는 어쩔 줄 몰라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고, 나는 그런 해리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를 달랬다.

해리의 손을 매만질 때마다 그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더 깊게 그의 속으로 다가갔다. 나를 향해 있던 무게 중심은 어느새 해리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해리의 몸이 뒤로 넘어갔고, 나는 그대로 그를 따라 앞으로 쏟아졌다.

나는 해리의 가슴을 짚고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손을 짚은 해리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의 거대한 고동이 느껴졌다. 이제 해리의 얼굴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붉어져 있었다. 나는 완전히 풀어진 얼굴의 악마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예쁜 짓은 이런 게 예쁜 짓이지.”

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두 입술 사이로 쌕쌕대는 거친 숨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공부 더 하고 와야겠어요, 해리. 이러다 나 언제 잡아먹으려고요?”

내 도발에 흐렸던 해리의 눈이 점차 선명해졌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해올게.”

해리가 여전히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귀여운 경고였다.

“그래서 내가 너, 잡아먹을래.”

‘아이고, 어느 세월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 걸 알았는지, 해리가 제 가슴을 짚고 있던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번에도 너무 놀렸나?’

또다시 반성을 시작하려는 찰나, 해리가 평소에 보기 힘든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아주 맛있게 잡아먹을 거야, 이브리아.”

손목을 쥔 해리의 손이 이렇게 뜨거운 데도, 어째서인지 등줄기가 서늘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 주인님.”

해리가 달콤한 목소리로 웃으며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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