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5/156)

* * *

적당히 환영 만찬을 마무리한 뒤, 나는 곧장 해리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 결심을 한 순간이 가장 용기가 넘치는 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의 용기는 무뎌지고 걱정만 늘어난다.

‘조상님들도 그랬잖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러니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해리. 나 들어가도 돼요?”

나는 씩씩하게 해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리?”

몇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해 봤지만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잠들었나?’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잠에 빠질 수 있을 만큼 어두운 저녁이기는 했다.

‘그게 아니면 방에 없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문고리를 당기자 별다른 저항 없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는 거리낌 없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들어오라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지만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리도 매번 내 허락 없이 멋대로 내 방에 들이닥치는걸. 오늘은 그 반대가 되었을 뿐이라고.’

방 안은 누군가의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어디 간 거지?’

제법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인지 방 안에는 그 흔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 자리를 비운 거면 곧 돌아오겠지. 여기에서 기다려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해리의 방을 둘러보았다.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리의 방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늘 해리가 먼저 나를 찾아왔으니, 내가 여기까지 걸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해리의 방은 이런 분위기구나.’

딱 필요한 것만 갖춰진 실용적인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몇 번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구경할 거리가 뚝 떨어졌다.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해리가 매일 내 침대를 차지하니, 오늘은 내가 그렇게 해볼 참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익숙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해리를 껴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의 냄새였다.

‘침대에 이렇게 체향이 많이 배는구나.’

내 침대에 누웠을 때는 이런 걸 느끼지 못했다.

‘원래 자기 냄새는 못 느끼니까.’

이런 건 다른 사람의 침대에 누워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익숙한 향기를 맡으니 바쁘게 움직이느라 지쳤던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아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으으. 잠들 것 같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하지만 몸이 나른하게 풀어진 순간 이미 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른해진 몸을 따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조금씩 느려졌다.

[주인님. 여기서 주무시려고요?]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유피테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 여기가 싫습니다. 사방에 악마 냄새가 진동한다고요. 방으로 돌아가서 주무시면 안 될까요, 주인님?]

“으응…… 그래야지…….”

[주인님!]

마침내 유피테르의 다급한 목소리마저 의식 저편으로 멀어지고, 순식간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나는 그렇게 수마에 굴복했다.

* * *

‘제발 좀 꺼져주셨으면.’

리피와 레피는 똑같은 생각을 하며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종이새를 노려보았다. 종이새를 만들어 낸 장본인은 테오하리스였다. 인간들에게는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로 불리며, 악마들에게는 첫 번째 악마로 추앙받는 그가 집무실 구석에 무기력하게 늘어져 종이접기나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종이접기의 재료가 우리가 처리해야 할 서류라는 거지.’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그 테오하리스였다. 리피와 레피는 감히 그를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접어 날린 종이새를 곱게 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걸까?’

‘이유는 하나뿐이잖아.’

두 악마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브리아 오베론. 자신들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테오하리스를 개처럼 부리는 인간 여자.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그 여자뿐이었다.

‘레피. 네가 물어봐. 이러다가 우리 서류가 전부 새가 되게 생겼어.’

‘왜 나야? 네가 물어봐.’

‘네가 형이잖아.’

‘넌 이럴 때만 형을 찾냐?’

그렇게 한참이나 투덕거리던 두 악마는 결국 가위바위보로 희생자를 선정했다. 희생자는 레피였다.

“해리 님. 그 인간 여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 인간 여자’라는 말에 열심히 종이새를 접고 있던 해리의 손이 멈췄다.

“함부로 부르지 마.”

해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레피를 쳐다보았다. 싸늘한 눈빛에 레피가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머릿속에서는 ‘인간 여자를 인간 여자라고 하지 도대체 뭐라고 하냐’는 생각이 스쳐 갔지만, 그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악마들에게는 더 강한 자의 말이 곧 법이었다.

“이브리아 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호칭이 훨씬 정중하게 바뀌었는데, 해리의 눈빛은 오히려 더 싸늘해졌다.

“누가 이름을 부르래? 이브리아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럼 주인님과…….”

“그것도 안 돼. 이브리아는 나만의 주인님이니까.”

“그럼 계약자님과…….”

“계속 짜증나게 할래? 이브리아는 내 계약자야.”

할 수 있는 모든 호칭을 박탈당한 레피가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그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부르지 마.”

“예?”

“그냥 부르지 말라고. 너희가 뭔데 이브리아를 불러?”

잔뜩 삐뚤어져 씩씩대는 해리의 목소리에 레피와 리피가 시선을 교환했다.

‘리피. 이거 아주 중증이신데.’

‘그러게, 레피. 이러다 나중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시겠어.’

‘설마 그렇게까지.’

‘아냐, 레피. 그보다 더한 것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두 악마의 시선이 씩씩대는 해리를 지나 수북하게 쌓인 종이새로 향했다.

‘제발 좀 꺼져주셨으면.’

두 악마의 생각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신은 두 악마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짜증 나니까 그만 갈래.”

해리가 손에 남아 있던 마지막 종이새를 허공에 날려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두 악마는 여기에 더 계셔도 된다는 빈말을 입에 올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리를 배웅했다. 해리는 일사불란한 두 악마의 행복한 배웅을 받으며 제 방을 향해 힘없이 걸었다.

‘이브리아 방으로 갈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그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어차피 날 쫓아내겠지.’

-어, 나 지금 좀 바쁜데. 오늘은 혼자 놀면 안 돼요?

이브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태양신 솔과 만난 이후 이브리아는 어딘가 이상해졌다. 이브리아는 어떻게든 감추려는 것 같았지만, 이브리아의 모든 것에 예민한 해리는 그녀의 눈빛에 섞인 묘한 경계심을 쉽게 눈치챘다.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해리는 솔과 만난 직후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던 이브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솔이 이브리아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이브리아한테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악마는 원래 잔인하고 비열한 존재였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상대를 죽이고 속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인간들도 그것을 알기에 악마를 두려운 존재로 그렸다. 지금이야 이브리아 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지만, 해리 역시 그런 악마였다.

‘그 여자가 이브리아에게 내 본성에 대해 속삭인 걸까? 날 조심하라고?’

제가 손만 뻗어도 움찔거리며 눈을 피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인간이 악마를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약자는 강자를 무서워하게 되어 있으니까.’

강자가 친절하게 굴며 다가온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인간이 개미에게 친절하게 군다고 해도 개미는 인간을 두려워할 것 아닌가. 악마와 인간의 관계도 그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이브리아가 이러는 건 당연한 일이야.’

오히려 지금까지 겁도 없이 악마를 믿었던 이브리아가 이상했던 거다.

‘첫 계약자였던 그 머저리도 날 엄청나게 무서워했었고.’

하지만 모든 걸 알면서도 해리는 우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날 무서워하지 그랬어.’

신뢰를 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애정을 받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처음부터 그런 것들을 몰랐다면 이렇게 우울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브리아는 영원할 것처럼 달콤한 선물을 해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가, 예고도 없이 그걸 뺏어갔다. 그러니 이브리아가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워야 정상인데.

‘내가 어떻게 내 주인님을 미워해?’

속 시원하게 이브리아를 미워할 수도 없어서 이 상황이 더 짜증 났다. 이브리아가 밉기는커녕, 머릿속에 ‘내가 어떻게 하면 이브리아가 다시 날 예뻐해 줄까?’ 하는 궁리만 가득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해리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방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이브리아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어……?”

말도 안 되는 풍경에 해리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상황 파악은 쉽지 않았다.

‘내가 이브리아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내 방이 아니라 이브리아 방에 와버린 건가?’

워낙 정신을 놓고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구조나 가구를 보면 제 방이 확실했다.

‘그럼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보다.’

역시 이쪽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해리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열까지 세고 다시 열자.’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머릿속으로 1부터 10까지 숫자를 셌다.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절차였다.

‘1, 2, 3, 4, 5, 6, 7, 8, 9, 10!’

해리는 씹어 내듯 또박또박 숫자를 헤아린 뒤 다시 눈을 떠 문을 열었다. 그런데도 이브리아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제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설마 진짜?’

해리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는 천천히 제 방으로 들어섰다. 분명히 자신의 방인데. 이브리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해리는 들어서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들인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느린 걸음이 마침내 침대 앞에 다다랐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걸터앉아 손가락으로 잠들어 있는 이브리아의 뺨을 쿡 찔렀다.

“으음…….”

손가락이 뺨에 닿자마자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이브리아가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이기 시작했다. 해리는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뗐다.

“진짜 이브리아다.”

해리는 입을 떡 벌렸다.

‘계속 피하더니 갑자기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다시 눈을 뜨면 이브리아는 금세 자신을 두려워하는 어린 인간 여자로 돌아와 할 말만 하고 돌아가 버릴 테니까.

해리는 이브리아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관찰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지만, 이브리아가 제 시선을 알아채고 눈을 뜨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뒤척이느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 굳게 닫힌 두 눈, 오똑한 코와 예쁜 입술까지. 무방비한 이브리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입 맞추고 싶어.’

하지만 잠들어 있는 이브리아 몰래 그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해리는 악마였다.

‘그러게 누가 내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래?’

그는 악마답게 자신이 좋을 대로 결론을 내렸다.

‘가볍게 입만 맞추는 거야, 가볍게.’

그게 이브리아를 향한 변명인지 스스로를 향한 다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해리는 마음속으로 연신 그 말을 되풀이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 악마! 주인님께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유피테르가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어차피 녀석은 이브리아가 써주지 않으면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음에 안 들면 넌 닥치고 눈이나 감고 있든가.]

해리는 유피테르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며 조금씩 이브리아와 가까워졌다. 이브리아의 얼굴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그녀의 체향이 짙게 느껴졌다.

‘신기해.’

제 냄새로 가득한 방 안에 이브리아의 향기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째서인지 뱃속 깊은 곳이 싸해졌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으으음…….”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해리가 의아해하는 사이, 제게 가까워지는 사람의 기척을 느낀 이브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해리와 이브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리?”

이브리아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해리를 불렀다. 하지만 도둑 키스를 하려다 들켜버린 파렴치한은 그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해리네.”

다시 들려온 이브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명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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