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4/156)

* * *

내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을 겪든 말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여느 때와 똑같이 하루의 태양이 떨어지고, 똑같이 다음 날의 태양이 떠올랐다.

‘차라리 망해버리라지, 이놈의 세상.’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새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지만 마주하는 모든 것이 내게는 새로웠다. 어제까지는 책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진짜 현실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엘프들이 도착했습니다. 일전에 논의했던 것처럼 거처를 제공하지요.”

나는 새로운 소식을 전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인세티아 남작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분들께서 농사를 지을 땅도 확보해뒀습니다. 직접 상태를 보러 가시겠습니까?”

“뭘 그렇게까지. 그냥 남작이 잘 안내해줘요.”

“그러죠. 하지만 엘프분들에게 환영 인사는 하셔야 합니다.”

“꼭 그래야 할까요?”

의욕 없는 내 말에 남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래도 매사 열심히 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만, 오늘은 지나치게 의욕이 없으시군요.”

“정확히 봤어요. 난 지금 의욕이 하나도 없어요, 남작.”

나는 순순히 나의 무기력함을 인정했다.

“이러나저러나 내 인생은 망했거든요. 제멋대로인 신이 나한테 저주를 내리는 바람에. 그런데 뭘 열심히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내 삶은 그 저주대로 흘러갈 텐데.”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입니까?”

“헛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진짜예요. 신이 나한테 저주를 내렸다니까요.”

책상에 늘어지며 우는소리를 하는 나를 향해 남작이 가볍게 혀를 찼다.

“엠마.”

그는 내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엠마에게 지시를 내렸다.

“영주님께 냉수 한 잔 가져다 드려.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으니까.”

“남작. 나도 잠이 덜 깬 거였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냉수 한 잔으로는 안 될 것 같군.”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조금 쉬시겠습니까? 짧게 휴가라도 즐기시죠. 최근 너무 바쁘게 움직이긴 하셨으니까요. 지칠 만도 합니다.”

나는 책상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남작이 누그러진 말투만큼이나 풀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슬쩍 창밖을 쳐다보니 역시나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인세티아 남작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요? 무섭게.”

의심 가득한 내 말에 남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좌역으로서 영주님을 몰아붙이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오신 뒤로 에렐이 정말 많이 발전했으니까요. 아마 영지 사람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얼굴에 드물게도 미소가 슬쩍 걸려 있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다 영주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영주님께서는 저희 영지민들의 미래를 짊어지고 계신 분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남작이 그렇게 말하면 내 투정이 굉장히 민망해지거든요.”

나는 민망함에 자세를 바로 했다. 내 삶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면,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뜻이었다. 어쩌다 떠맡게 된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물론 돈 많은 백수의 호의호식도 포기할 순 없지. 그렇다면…….’

재빨리 할 걸 다 끝내놓고, 그 뒤에 즐긴다! 나는 빠르게 목표를 수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전부 재빨리 해치워버립시다!”

* * *

‘환영 인사를 해야 한다기에 정말 인사만 하는 건 줄 알았더니.’

인세티아 남작은 새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대대적인 만찬을 열었다. 좋은 술과 음식, 거기에 음악까지 더해졌으니 사실 만찬보다는 가벼운 파티에 가까웠다.

파티는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귀족들의 우아한 파티보다는 와이번 토벌이 끝난 뒤 마을에서 느꼈던 평민들의 축제 분위기와 비슷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자유롭게 춤을 추고, 누군가는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왕도 귀족들이 봤다면 근본 없다며 펄쩍 뛰었을 만한 파티였다.

‘하지만 손님이 엘프인데 어쩌겠어.’

엘프들은 자유로운 종족이었다. 인간들의 규율과 법칙에 따르지 않는 손님들을 모셔놓고 귀족들의 우아한 파티를 여는 건 이상했다.

“먼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내 인사에 동료 엘프들과 조금 떨어져 과실주를 마시고 있던 타라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길잡이를 따르는 일을 고생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검은 숲은 마음에 드세요?”

인사치레로 물은 질문이었는데, 타라문이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주 훌륭한 숲이더군. 인간들의 손을 많이 타지 않았어. 나무 역시 훌륭했다.”

“흑철목은 에렐의 자랑이죠.”

동시에 돈줄이기도 했다.

“그 나무라면 자랑으로 삼을만하다. 이제 우리의 생명수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겠지.”

“잘 자랄 것 같아요?”

에렐의 토양과 기후는 특이했다. 그들의 터전이 있던 풍요로운 리안트로 숲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제아무리 생명수라도 에렐의 극한 환경을 견디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타라문은 내 질문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무의미한 질문이로군. 생명수는 어느 땅에서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게 사막이라도요?”

꽤 극단적인 예시에도 타라문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 그곳이 사막이라도 생명수는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곳은 더이상 사막이 아니게 되겠지.”

“생명수가 뿌리를 내리면 땅이 달라지는 건가요?”

“생명수는 스스로 생명력을 만들어 내는 나무다.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지. 그래서 생명수 주변이 늘 풍요로운 거다.”

이제야 엘프는 어느 곳에서나 싹을 틔울 수 있다던 타라문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자신 있었던 거군요?”

내 말이 정확했는지 타라문이 옅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을 풍요롭게 만들지. 내년이면 이곳에서 황금빛 들판을 보게 될 거다, 길잡이여.”

춥고 척박한 에렐은 모든 것이 무채색이었다. 그 무채색의 세상에 예쁜 황금빛이 들어찬다면 꽤 보기 좋을 것이다.

“그런데 길잡이.”

타라문이 흐뭇하게 황금빛 들판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불렀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탁이요?”

“그래. 리안트로 숲에서 보았던 이카난을 기억하나?”

“그럼요.”

숲에서 말을 섞고 이름을 알게 된 엘프는 타라문과 이카난, 단둘뿐이었다. 그중 하나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길잡이가 그 녀석을 거둬주었으면 한다.”

“……제가요? 이카난을요?”

“그래.”

나는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카난을 거둬달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라는 건 안다. 인간에게 자연 속에 사는 엘프를 거둬 달라니…….”

내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타라문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카난은 조금 특이한 녀석이다. 그래서 우리 엘프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겉돌고 있지.”

“뭐, 제 기억으로도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말 몇 마디로 해리의 성격을 긁을 정도였으니 확실히 평범한 엘프는 아니었다.

‘사람 속만 긁는 줄 알았더니 같은 엘프들 속도 마구 긁었나 보네.’

하지만 타라문이 언급한 이카난의 특이함은 그런 성격에 대한 부분이 아닌 것 같았다.

“이카난은…….”

타라문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비장하게 말했다.

‘이카난에게 큰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덩달아 긴장해서 타라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 녀석은 마법사다.”

‘에이, 뭐야.’

긴장이 풀리며 순식간에 맥이 빠졌다. 물론 마법사는 희귀한 존재였다. 왕국에서도 그 수가 적기 때문에, 강한 힘을 가진 마법사 캐서린이 남작 영애라는 신분에 비해 훨씬 큰 존재감을 뽐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은 아니잖아.’

하지만 내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유피테르가 슬쩍 알려주었다.

[주인님. 엘프는 마법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엘프는 자연에 순응하는 일족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일구는 신의 가호를 타고 났지요. 신을 모시는 신관과 비슷합니다. 그에 비해 마력은 자연을 거스르는 힘이고요.]

자연에 순응하는 엘프와 자연을 거스르는 마력.

[완전히 상극이네요?]

[예. 그러니 엘프 사이에서 마법사가 태어났다면…]

[일종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겠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유피테르와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타라문이 침묵을 깨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단한 마법사가 길잡이, 그대의 충실한 종이었지. 이카난을 그의 제자로 삼아 제 힘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으면 한다. 우리 엘프들은 마력에 무지해 누구도 이카난을 도와줄 수 없었다.”

“이카난을 해리의 제자로요?”

제자를 둔 해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해리가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친절하게 마법을 가르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제자가 해리의 속을 마구 긁었던 이카난인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마법사협회에 부탁해보는 건 어때요?”

내 제안에 타라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명수를 죽일 뻔한 마법사협회 놈들을 어떻게 믿고 우리 엘프를 맡기겠나? 그들은 우리의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깊은 한숨을 내쉰 타라문이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믿을 인간이 길잡이뿐이다. 도움을 준다면 반드시 보답하겠다.”

엘프들은 에렐에 황금빛 들판을 선사해줄 존재였다. 나로서는 당연히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 문제는 나보다 해리의 뜻이 더 중요했다. 먼저 해리의 의견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상당히 난처해졌다.

‘해리를 보는 건 아직 좀 껄끄러운데.’

해리를 제대로 인식한 이후 나는 괜히 어색해 그를 은근슬쩍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놀아달라며 칭얼거리는 게 일과인 해리가 당연히 반발했지만, 일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쳐냈다.

‘완전히 핑계는 아니었다, 뭐.’

바쁜 정도를 두 배 이상 부풀리긴 했지만, 엘프들을 맞이하는 문제로 바쁘게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해리를 쳐낼 수 있었던 건데.’

이젠 오히려 엘프들 때문에 내가 먼저 해리를 찾아야 할 일이 생겼다.

‘어쩌겠어. 어색하다고 계속 해리를 이런 식으로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더 빨리 오긴 했지만…….’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사이에 다시 뻔뻔함을 되찾아 해리를 마주할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쩌겠어. 난 원래 좀 뻔뻔한 편이니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해리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의외로 넘어야 할 산이 낮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카난을 제자로 책임져야 하는 건 해리니까, 먼저 그에게 물어볼게요. 해리가 괜찮다고 하면 저희가 이카난을 거두죠.”

내 말에 타라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렇다면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군. 곧 이카난을 그대에게 보내겠다.”

“해리가 거절할 수도 있어요.”

사실 나는 거절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었다. 평소의 해리를 생각하면 그랬다. 하지만 타라문은 자신의 생각에 꽤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마법사, 아주 충실한 그대의 종처럼 보였다. 그런 자가 그대의 뜻을 거역할 리 없어.”

“글쎄요. 그렇게 보여도 의외로 반항을 많이 하는 터라.”

“하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늘 그대가 이겼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내가 입을 꾹 다물자 타라문이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우리 이카난을 잘 부탁하지, 길잡이여.”

꼭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는 학부모 같은 말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