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정리
나는 멍하니 서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차는 저택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받아들이는 나의 감상은 무척이나 달랐다.
‘여기가 책 속의 가짜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차원에 실존하는 진짜 세상이라고?’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이 세상에 떨어져 이브리아 오베론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이곳이 진짜 세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 세계를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당연히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소설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가 무모하고 대책 없이 앞만 보고 달려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인식 덕분이었다. 어차피 여긴 진짜 세계가 아니니까. 진짜 나는 진짜 세계에서 죽었으니까.
‘그런데 여기도 진짜 세계라고? 이 몸도 진짜고?’
솔이 그렇게 말했다.
-왜 나를 하필 이브리아의 몸에 집어넣었어요? 당신이 쓴 이야기의 주인공인 캐서린의 몸에 집어넣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몸과 영혼에도 짝이 있어요. 제 것이 아닌 그릇에 영혼을 집어넣으면, 영혼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버리죠.
-그렇다는 말은….
-저쪽 세상에서 당신의 그릇이 무역회사에 다니는 여성이었다면, 이쪽 세상에서 당신의 그릇은 이브리아 오베론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진짜 당신 몸입니다. 이쪽 세상에서는.
-그럼 여기 있던 이브리아의 영혼은요?
-원래 그 영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당신이 잘 알잖아요. 내가 이미 보여줬으니까.
-…없어지죠. 당신이 보여준 이야기 속에서는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두 세계의 시간이 어긋나 있어서, 당신을 데려오기 전까지 임시로 그릇을 지킬 영혼이 필요했어요. 그게 이야기 속의 이브리아였고요. 이 몸의 진짜 주인은 처음부터 당신이었어요.
-이게 진짜 내 몸이라고요?
-그래요. 전부 당신 거예요, 이브리아 오베론. 그 몸도, 그 삶도.
하지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이 삶에 현실감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작은 마찰음과 함께 싸한 고통이 뺨을 타고 퍼졌지만, 여전히 이게 현실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뺨을 쳐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강한 힘으로 휘두른 손이 뺨에 닿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나타난 해리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왜 갑자기 자해를 하고 그래?”
나는 고개를 돌려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우울해졌어.”
손목을 붙잡은 해리의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마저 현실감이 없었다.
“태양신이 너한테 헛소리라도 했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대답 없는 나를 앞에 두고 해리가 홀로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원래 좀 그래. 머리가 꽃밭이라서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한다니까.”
해리가 계속해서 태양신을 욕하며 투덜댔지만, 그 소리가 제대로 귓가에 닿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녀석도 진짜라고? 종이 악마가 아니라, 진짜 세상에 존재하는 진짜 악마?’
나는 멍하니 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해리를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대했다. 사실 해리뿐만이 아니었다. 이브리아가 된 후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단순했다. 상대를 이용하기 좋은 체스판의 말처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써먹었다. 그런 태도에 죄책감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가짜 세계였으니까.
‘거의 게임을 하는 감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 게임. 딱 그 정도의 기분이었다. 가짜 세계라고 믿었던 세상에서의 삶이 진짜 삶처럼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나는 ‘이브리아 오베론의 인생 게임’을 즐기는 기분으로 적당히 모든 상황에 대처해왔다. 게임의 목표는 단순했다. 호의호식. 오로지 그것만 보면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처음 해리를 불러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고작 이 게임을 쉽게 만드는 ‘치트 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게 소설 속의 세계도, 이브리아 오베론의 인생 게임도 아닌 진짜 삶이라니.
‘갑자기 아, 예, 그렇군요. 이게 진짜 삶이군요-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솔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혼란스럽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나의 대리인이 되어 내 심장의 조각을 모으게 될 겁니다.
-…방금 저한테 저주를 내리셨네요.
-저주라뇨. 이건 순수한 예언입니다.
-예언… 그래요. 어디 그 예언 더 해보세요. 신께서 보신 내 미래는 어떤데요?
-당신은 언젠가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될 겁니다. 그땐 누군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를 찾아 나서겠죠. 그 소망을 이뤄줄 사람이 나뿐일 테니까.
-간절한 소망이요? 전 그런 소망을 가질 기력도 없어요.
-지금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난 미래가 보여요. 그래서 당신을 내 심장의 전달자로 선택한 것이고요.
내가 품게 될 간절한 소망.
‘도대체 그게 뭘까?’
신까지 찾아야 할 정도의 소망이라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내 사람을 아끼니까. 당신의 앞날엔 지금처럼 언제나 꽃길만 있을 거예요.
-태양신 님. 그 꽃길, 저는 원하지 않는다니까요? 그냥 시골에 처박혀서 호의호식이나 할래요…
-어머나. 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네. 당신이 되찾아준 한 조각의 힘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봐요. 나머지 조각을 찾아 주면 그때 다시 찾아올게요.
-나머지 조각은 안 찾을 거예요. 귀찮다고요. 여기서 영원히 안녕하죠, 우리.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게 될 거예요. 그게 신이 정한 운명이죠.
-솔. 소리가 제대로 안 들린다더니, 내 말 전부 들었네요?
-…어머나. 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네.
-솔직하게 말해요. 당신, 태양신이 아니라 사기의 신이죠? 거짓말의 신이죠?
-…진짜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꽃길만 걷게 해 줄게요!
솔은 예언을 빙자한 저주를 남기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후다닥 사라졌다. 그 뒤로 홀로 남겨진 나는 계속 이 상태였다.
“……이브리아?”
한참이나 떠들던 해리가 걱정스럽게 나를 부르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혹시 어디 아파?”
해리의 붉은 두 눈동자가 꼼꼼하게 내 안색을 살폈다.
“뺨이 부었어. 이게 아파서 그래?”
그 눈이 어찌나 진지한지 천천히 움직이는 시선에 닿는 곳들이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나치게 진지한 해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웃음에 걱정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해리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가 그 여자 혼내줄까? 아직 힘을 완전히 찾은 건 아니니까, 내가 혼내줄 수 있어.”
“솔이 눈 한 번 깜빡이니까 그냥 기절했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혼내준다는 거예요?”
내 지적에 해리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 그거야 너무 갑작스럽게 당해서 그렇지. 길 가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고.”
“흐으음……”
“정말이야! 제대로 붙으면 내가 막 밀리고 그러진 않는다니까? 진짜야!”
“그래도 악마랑 신이랑 붙으면 신이 이길 것 같은데요.”
“아냐. 내가 이길 수 있어!”
“알았어요. 그런 걸로 쳐줄게요.”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진짜야. 정말이야!”
해리가 강하게 주장하며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부어오른 뺨의 상태를 살피려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가만히 서서 그 손길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젠 해리가 나를 만지는 것도, 내가 해리를 만지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해리의 손을 피했다.
“……어?”
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기 손을 피하느냐는 듯한 해리의 눈빛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대답을 피했다.
‘내가 여태까지 얘랑, 아니, 이분이랑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한 거지…….’
해리와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고.
‘심지어 내가 더 적극적으로 했잖아.’
모두 해리를 게임 플레이어인 ‘나’의 소유물로 생각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알게 된 것이다. 해리가 책 속 세상의 종이 악마가 아니라, 진짜 세계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걸.
‘으악.’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닌데. 아니, 원래도 조금 막 나가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식은 있었는데!’
유독 해리에게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만큼 해리 앞에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거다.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
대담함을 넘어서 미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막 나갔던 과거의 행적들을 떠올리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악마님. 이게 진짜 세계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막 나가진 않았을 거예요…….’
나는 마음속으로 연신 사죄의 말씀을 올리며 필사적으로 해리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왜 그래?”
이상한 내 반응에 조금 풀어졌던 해리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진짜 태양신 그 여자가 무슨 저주라도 걸었나?”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바짝 가까워진 얼굴에 그렇지 않아도 빨개진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평소와 같은 얼굴인데. 평소와 같은 눈빛인데. 평소와 같은 목소리인데.
눈앞의 이 악마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되자 모른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키는 내 머리를 훌쩍 넘길 정도로 크고, 몸집은 내가 가볍게 가려질 정도로 거대했다. 손은 크고 단단해서 마음만 먹으면 나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내가 귀여운 강아지 취급했던 해리는 개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성인 남자잖아.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남자.’
마침내 내가 ‘진짜’ 해리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진짜 해리는 전혀 귀엽지도, 전혀 우습지도 않았다. 악마 테오하리스는 감히 그런 말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미치겠다.’
나는 이 남자에게 쾌락을 채워주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땐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게 진짜 내 삶이라는 걸 알게 됐잖아.’
긴장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