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산책을 마친 뒤, 해리는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들어와 내 침대를 차지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이상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왜 여기 있어요?”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더요? 같이 산책까지 해줬잖아요. 손도 잡아줬는데. 오늘은 그만 만족하고 돌아가는 게 어때요?”
“이브리아. 고작 그걸로 내 욕심이 채워질 것 같아?”
퍽이나 당당한 대답이었다. 사용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고 저택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걸 ‘고작’이라고 표현하다니. 하나를 내놓으면 두 개를 바라는 게 악마라고 했던가. 역시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튼 악마들이란.”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해리.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니에요?”
“어쩌겠어. 원래 악마는 탐욕스러워, 주인님. 포기하고 이리와.”
해리가 나른하게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내가 재워줄게. 오늘 열심히 돌아다녔으니까, 이제 잘 시간이야.”
“흐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마음으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재워준다고 하고 또 이상한 짓 할 거죠?”
“이상한 짓이라니?”
“기억 안 나요? 전에도 재워준다고 해놓고 나한테 키스했잖아요.”
“어, 아니, 그건…….”
내 지적에 해리의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어느새 뻔뻔함을 배운 악마가 금세 안색을 바꾸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지!”
“그게 이상한 짓이 아니면 뭔데요?”
“어…… 기분 좋은 일?”
해리가 씩 웃으며 침대 앞에 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자연스럽게 몸이 침대로 넘어가자, 해리가 재빨리 나를 껴안아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순식간에 해리의 품에 갇혀버렸다.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은 안 하잖아. 넌 그냥 네 개를 믿고 몸을 맡기면 돼.”
“믿고 맡기긴.”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해리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다가 물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이제 해리는 내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어요.”
내 말에 해리가 화들짝 놀라서 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뭐? 너 나 안 믿어? 정말?”
“네. 안 믿어요.”
“어떻게 하면 나 믿을 건데?”
“내 말을 잘 들으면요.”
“난 네 말 잘 듣는데?”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개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의외로 고집쟁이면서 말이지. 삐지기도 잘하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 걸 알 리 없는 해리가 여전히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말 안 들으면, 바로 소원을 빌어. 그럼 되잖아.”
“그건 강제적인 거잖아요. 웬만하면 안 쓰고 싶어요.”
소원을 비는 것이 해리를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원도 마구 썼었는데.’
하지만 내가 빈 소원으로 해리가 쓰러진 뒤로는 어쩐지 소원 빌기가 꺼려졌다.
“전처럼 내 소원 들어주다가 못 깨어나면 어떡해요. 그건 싫으니까, 내가 혹시라도 무리한 부탁을 하면 꼭 말해요. 알았죠?”
“뭐야.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신경 안 쓰는 게 이상하잖아요. 당연히 신경 쓰죠.”
내 말에 해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나를 다시 꼭 껴안았다.
“갑자기 왜 웃어요?”
“네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어.”
해리가 나사 풀린 사람처럼 웃으며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때는 영혼 조각을 누구한테 준 게 처음이라 힘 조절을 잘못해서 그래. 이제 확실히 한계를 알았으니까 그런 일 없어. 걱정하지 말고 소원 빌어!”
지나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해리. 겨우 이런 걸로 기분이 좋아져요?”
‘얼마나 쉬운 거냐. 너란 악마.’
하지만 해리는 ‘겨우’라는 말에 펄쩍 뛰며 반발했다.
“겨우 이런 거라니. 날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주는 건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첫 계약자는 안 이랬어요?”
“그 머저리 이야기는 하지도 마. 걘 날 정말 도구로만 생각했으니까.”
해리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에게 첫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묻진 않았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듣게 되는 사연들을 생각하면 별로 사이가 좋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가족이나 친구들은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요?”
“악마들은 워낙 개인주의라서 말이야.”
“거기도 참 삭막한 세계네요.”
“악마들이 사는 곳이니까. 당연하잖아.”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꼭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 같았다.
‘2천 살이나 먹은 악마인데 말이야…….’
나는 나이를 헛먹은 악마를 달래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생각이었다.
“악! 갑자기 뭐야!”
하지만 내 손이 닿기도 전에 해리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나를 안고 있던 팔까지 풀고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요란하게 침대를 내려가 그보다 더 요란하게 방 안을 뛰어다녔다.
‘도대체 왜 저래.’
나는 그 꼴을 보며 황당해져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저건…….’
자세히 보니 샛노란 깃털의 작은 새가 방 안을 날뛰는 해리를 따라다니며 부리로 그의 머리를 쪼아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해리가 내 방에 무단침입하며 열었던 창문으로 들어온 새인 것 같았다.
“악! 뭐야! 꺼져!”
해리가 새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가 위협적인 손길을 가볍게 피하며 집요하게 해리의 머리를 쪼아댔다.
“이 미친 새는 도대체 뭐야?”
해리는 소리치며 도망가고, 새는 죽어라 그 뒤를 쫓고. 덕분에 방안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나는 그 난리통을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저 작은 새한테도 못 이겨서 도망이나 치고 있다니.’
이래서야 커다란 덩치가 아까웠다.
“잡았다, 이 미친 새!”
다행히도 산만 한 덩치가 장식은 아니었는지, 오랜 사투 끝에 해리가 새를 제압했다. 해리의 두 손에 몸통을 단단히 제압당한 새가 불만스럽게 소리 높여 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운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고 미친 새라는 거지, 어린 악마?”
새의 입에서 깔끔한 인간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이 새가…….”
“말을 한 거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물론이고 해리까지 멍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제대로 들었으면 이 건방진 손을 당장 치워, 어린 악마.”
새가 코웃음을 치며-정말 말 그대로 코웃음을 쳤다- 해리의 손을 마구 쪼아댔다.
해리가 멍한 얼굴로 손을 놓자 새가 그대로 날갯짓을 해 내게로 날아왔다.
“조심해! 저 새, 완전히 미쳤어!”
해리가 다급하게 경고하며 내 앞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새는 얌전하게 내 손 위에 앉아 삐이-하고 예쁜 울음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 미친 새가 상대를 봐가면서 정신줄을 놓는 건가?”
얼빠진 해리의 말에 새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 건방진 악마와 나의 대리인은 완전히 다르지.”
“대리인?”
나를 지칭하는 말인 게 분명했다.
“아. 그렇지요. 아직 내 소개를 하지 못했네요.”
해리를 대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정중한 말투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새가 맑은 울음 소리를 내며 가볍게 날갯짓을 했다.
“나는 태양신이에요. 드디어 이렇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됐네요!”
“……네?”
태양신이요?
황당해하는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이 태양신이라 주장하는 새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이 심장의 조각을 하나 되찾아준 덕분에 이렇게 찾아올 수 있게 됐어요. 아직 힘이 완전하지 않아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새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저…… 그러니까…… 그쪽이 태양신이라는 거죠?”
내 앞에 갑자기 태양신이 나타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눈앞에 말을 하는 범상치 않은 새가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네. 솔이라고 불러줘요. 예전에 만났을 때는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 이름을 안 알려 줬었지만, 이제는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예전에도 만났었다고요?”
“그럼요. 우린 만났죠. 많은 대화를 했고요. 먼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야겠네요.”
솔이 그렇게 말한 뒤 고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듦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과거의 편린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태양신이에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였어요. 내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적임자로.
-당신을 여기로 불렀어요. 내 심장이 있는 나의 세상으로.
-심장의 전달자인 당신이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이 세계를 보여준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의 형태로요.
-심장을 돌려받을 그 날 다시 만나요, 전달자여.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기억에 엄청난 두통이 느껴졌다.
“윽.”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자 해리가 이를 갈며 솔을 노려보았다.
“야, 미친 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건방지구나, 어린 악마야. 넌 잠시 빠져 있으렴.”
솔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리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해리!”
내가 놀라서 해리에게 달려가자, 솔이 해리의 머리 위에 앉아 그의 이마를 콕콕 쪼았다.
“잠시 재운 것뿐입니다. 한 시간 안으로 다시 눈을 뜰 거예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이제 전부 기억하잖아요? 내가 누구인지.”
솔이 삐이-하고 지저귀며 날아올라 다시 내 손 위에 앉았다.
“당신에게 테오하리스의 이름을 알려준 것도 나인걸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당신의 임무에 상당히 쓸모 있는 녀석이니 다시 뺏어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해리를 노려보았다.
“뭐, 이 녀석이 내 생각보다 당신에게 건방지게 굴고 있긴 하지만요. 감히 내 대리인에게 불손한 짓을 하다니…….”
금방이라도 다시 해리에게 날아가 그의 머리를 쫄 기세였다.
‘내 개의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건 싫단 말이지.’
“당신과 만났던 기억은 돌아왔어요.”
나는 먼저 입을 열어 솔의 관심을 내게로 돌려놓았다.
“그럼 여기가 책 속의 세상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래요. 이곳 역시 진짜 세계예요. 당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차원에 있긴 하지만요.”
“나는 당신의 심장을 돌려놓을 적임자로 선택되어 여기로 불려온 거고요?”
“맞아요. 당신만큼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 없었죠. 온 차원을 뒤져서 겨우 찾아냈어요.”
“그래서 내가 임무를 수행하기 쉽도록 꽃길을 깔아줬군요?”
“네. 내가 그랬어요!”
솔이 뿌듯한 목소리로 자신이 안배한 꽃길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테오하리스를 부르게 한 것도, 성검을 뽑게 한 것도, 드워프와 엘프의 지지를 얻게 한 것도 전부 나예요!”
“그랬군요. 당신이…… 그런 거였어…….”
‘이제야 원흉을 찾았네.’
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꽃길을 강제로 걷게 한 이 태양신이라는 작자.’
“……신을 죽이면 벌을 받을까요?”
서늘한 내 목소리에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솔이 움찔거리며 슬그머니 내 손 위를 떠났다.
“당연하죠. 엄청나게 큰 벌을 받죠.”
“무슨 벌을 받는데요?”
“지옥에 떨어져요. 엄청 무서운 지옥에요!”
솔이 재빨리 대답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고, 어떤 고통을 받게 되는지 긴 설명도 이어졌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눈앞에 내 인생을 제대로 꼬아버린 원흉이 있다는 것뿐이지.’
그깟 지옥에 떨어지면 뭐 어떤가. 어차피 지금의 삶도 피곤함으로 따지자면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전, 제멋대로인 이 태양신을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힉!”
당장 목을 비틀어버릴 기세로 손을 뻗었지만, 눈치 빠른 태양신이 재빨리 내 손을 피했다.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어요? 날 멋대로 끌고 와서는 이런 귀찮은 일에 던져놨는데!”
“그래서 편하게 임무 수행하라고 악마랑 성검까지 줬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제일 귀찮다고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솔이 빠르게 날갯짓을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기 서요!”
나는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내가 당장 목을 비틀어줄 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말을!”
“그러게 누가 날 여기로 끌고 오래요?”
“좋아할 줄 알았어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는데, 한 번 더 살 기회를 줬잖아요!”
“그래요. 두 번 사는 거 좋죠. 그런데 이렇게 피곤한 삶은 별로거든요?”
그냥 귀족의 딸로 호의호식하게만 해주지. 부유한 아버지의 재산을 마구 낭비하며 사는 딸로 살게 해주지.
“왜 내가 태양신의 대리인이야…… 왜 내가 심장의 전달자야……!”
솔을 쫓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오. 이놈의 저질 체력.’
나는 더는 새를 쫓지 못하고 헉헉대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받는 것도 없이 내가 왜 그런 거창한 임무를 맡아야 하냐고요!”
“왜 받는 게 없어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은 내 옆으로 솔이 날아왔다. 아주 얄밉게도,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와 달리 그녀는 아주 여유로웠다.
“심장을 제대로 전해주기만 하면 내가 당신의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줄 텐데요.”
“무엇이든요?”
“네. 무엇이든.”
“하지만 별로 바라는 게 없어요.”
‘돈이나 펑펑 쓰면서 호의호식하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공작에게 받은 목걸이, 에드실라의 눈만 팔아도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솔은 전혀 다른 차원의 소원을 내게 제안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거기선 죽은 거 아니었나.’
돌아가봤자 시체일 뿐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솔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의 힘만 되찾으면 당신을 다시 살려줄 수 있어요. 비행기 사고 자체를 없던 걸로 만들 수 있죠. 난 신이니까, 그 정도는 가능해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살아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니…….”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