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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슨과의 산책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역시 이 문제는 이렇게 접근하는 게 좋겠죠?
내가 두루뭉술하게 평소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메이슨에게 슬쩍 흘리면,
-아뇨. 그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겁니다.
내 속셈을 모르는 메이슨은 제 모든 지식을 동원해 훌륭한 답을 찾아 주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메이슨은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답변자였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 따로 없잖아?’
덕분에 저택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꽉 막혀 있던 문제들을 한가득 해결할 수 있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세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엠마가 방으로 돌아온 나의 겉옷을 받아 들며 물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때문에 아침부터 저기압이던 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 있었지. 좋은 일.”
혼자 고민했다면 몇 개월을 끙끙대며 붙잡고 있어야 할 일들을 백과사전 메이슨의 도움으로 하루 만에 해치웠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천재 만세다, 만세!’
게다가 이번 산책으로 끝이 아니었다. 메이슨이 에렐에 머무르는 동안 같은 수법으로 다른 문제들에 대한 답도 은근슬쩍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귀찮기만 했던 메이슨의 방문에 이용해먹을 구석이 생겼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무슨 좋은 일인데요?”
“응. 메이슨 재상이랑 같이 산책을 했는데…….”
“메이슨? 그 재수 없는 얼뜨기 말이야?”
엠마에게 고민하던 문제들을 한가득 해결했다며 자랑하려는데, 열려 있던 창문에서 불청객이 등장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부루퉁한 얼굴을 한 해리가 위태롭게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해리. 왜 문을 두고 거기로 들어와요?”
“이쪽이 더 빠르니까.”
해리가 그렇게 대답하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게 다가서는 모습을 본 엠마가 요령 좋게 웃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 얼뜨기랑 뭐 했는데? 뭘 했길래 이렇게 네 기분이 좋은데?”
방안에 둘만 남겨지자,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가 받침대라도 되는 듯 제 턱을 괸 해리의 머리카락이 여린 뺨을 간질였다.
“왜 메이슨을 얼뜨기라고 불러요?”
“그럼 걜 뭐라고 불러야 해? 얼뜨기니까 얼뜨기라고 부르지.”
“그 사람 얼뜨기 아니에요. 얼마나 똑똑한데요.”
메이슨이 얼뜨기라면 이 세상에 얼뜨기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리의 불만이 더욱 깊어졌다.
“야. 너는 왜 그 얼뜨기 편을 들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사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해리가 투덜거리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그 녀석이 널 기분 좋게 해줬어? 나보다 더 기분 좋게 해준 거야?”
“어…….”
메이슨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건 맞지만, 그와 해리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해리가 날 기분 좋게 해주는 방법이랑 메이슨이 날 기분 좋게 만든 방법이 완전히 다르잖아.’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어 말끝을 흐리자 해리가 발끈하며 나를 돌려세웠다. 마주한 해리의 눈동자가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뭐야. 정말 그 녀석이 나보다 더 너를 기분 좋게 해준 거야?”
“그게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눈에 불이 붙은 해리가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그 얼뜨기보다 더 기분 좋게 해줄게. 그러니까 나만 예뻐해 주면 안 돼?”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담백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내 강아지는 예쁨 받는 법을 안다. 나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해리의 두 손을 붙잡았다.
“난 이미 우리 해리만 예뻐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곁에 두게 됐을 뿐이다. 필요하니 그대로 곁에 두었지만, 딱히 애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리는 다르다. 그는 내가 스스로 불러낸 유일한 존재였다. 만약 누군가에게 애정을 줘야 한다면, 내게 그럴만한 대상은 해리뿐이었다. 하지만 의심 많은 내 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
“진짜인데.”
“거짓말이야.”
“진짜라니까. 어떻게 하면 믿을래요?”
내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해리가 안심할 수 있다면 진짜 그렇게 해줄 생각이었다.
‘믿음을 주는 것 역시 주인의 미덕이니까.’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해리가 눈을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해리가 한참 만에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무엇을 해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요?”
“응. 모르겠어.”
해리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하더라도 아마 난 못 믿을 테니까. 그러니까 난 모르겠어.”
“너무하다. 세상에 주인을 못 믿는 개가 어딨다고.”
“맞아. 개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을 믿어야지.”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내 손등에 제 뺨을 비볐다. 불의 힘을 가진 악마라 체온이 높은 건지, 손등에 닿은 해리의 뺨이 아주 따뜻했다.
“그런데 난 그게 안 돼. 네가 뭘 해줘도 불안하단 말이야.”
곧 내 손을 붙잡고 있던 해리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떨어져 나간 온기 때문인지 손이 무척이나 허전했다.
“흐으음.”
나는 잔뜩 풀이 죽은 해리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달래줄 수 있으려나.’
입을 맞춰 줄까?
‘아냐. 그건 이미 많이 했잖아.’
스킨십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내 개가 주인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해리. 같이 산책할까요?”
“그 얼뜨기랑 했던 거?”
해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 제안이 그리 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뇨. 좀 다르죠.”
“어떻게 다른데?”
“그건 보면 알아요.”
나는 해리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해리는 얼떨떨하게 나를 따라나섰다가, 우리를 향하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야. 사람들 앞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며? 이상한 소문 돌아서 곤란해진다며?”
해리가 붙잡은 손을 힐끗거리며 내게 속삭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몰라요. 내가 그러겠다는데 다들 어쩌겠어요? 이제부턴 그냥 내 강아지 손잡고 막 다닐래요. 문제 생기면 우리 해리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대꾸도 없이 눈만 껌뻑이던 해리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내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난 내 주인님이 진짜 좋아.”
해리가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지나가던 하녀들이 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엄청난 소문이 퍼지는 건 확정이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기분 좋게 웃고 있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이 악마,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