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9/156)

* * *

와이번을 타고 서둘러 돌아오니 저택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그런가?’

저녁이 되기 전에는 돌아와 식사를 할 거라고 이야기해뒀는데, 완전히 깜깜한 밤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저택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늦어지는 나의 귀환을 걱정하고 있다기에는 저택의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저택이 왜 이렇게 어수선해?”

나는 지나가던 하인 하나를 붙잡고 상황을 물었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던 하인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드디어 오셨군요! 지금 저택이 온통 난리입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냥 보기만 해도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래?”

“왕도에서 예고도 없이 귀한 손님이 들이닥치셔서, 다들 급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손님? 왕도에서?”

온 저택이 발칵 뒤집혀 맞이할 손님이라면 꽤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높은 사람들은 미리 서신을 보내 방문 여부와 날짜를 조율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도 못 하도록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혹시 공작이나 아치볼드가 온 건가?’

그 두 사람이라면 예고 없이 에렐에 방문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작님께서 영주님을 계속 찾으셨습니다. 이럴 때 왜 영주님께서 안 계시는 거냐고, 엠마를 계속 닦달하셨어요.”

하지만 하인의 말을 들어보니 손님의 정체가 공작이나 아치볼드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둘 중 하나가 손님이었다면 남작이 나를 찾을 것도 없이 익숙하게 상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가족도 아닌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라.’

그러나 남작은 그렇게 무례하게 들이닥친 손님을 쫓아내지 않고 받아줬다. 그것도 온 저택이 들썩일 정도로 극진하게.

“남작이 그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손님이 왔나 보네. 도대체 누구야? 그 손님.”

“재상님께서 오셨습니다.”

“……재상? 행정관 중에서 제일 높은, 그 메이슨 재상?”

“예. 왕국에 재상이 그분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재상이라니. 메이슨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었다.

‘메이슨이 왜 여길 와? 왕도에서 열심히 일은 안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재상이 왕도를 떠나 에렐에 올 이유가 없었다.

“영주님! 드디어 오셨군요!”

내가 하인을 붙잡고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와중에 인세티아 남작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저택에…….”

“그렇지 않아도 방금 들었어요. 갑자기 메이슨 재상이 들이닥쳤다면서요?”

“예. 벌써 들으셨군요.”

설명할 거리가 하나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인세티아 남작이 한결 여유를 찾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인에게 눈짓했다. 그의 눈짓을 받은 하인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이 여길 왜 와요? 재상이 이렇게 함부로 왕도를 비워도 돼요?”

“뭐, 재상이 국왕을 대신해 영지 시찰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요.”

“그건 알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재상이 왜 갑자기 우리 영지를 살펴보는데요?”

“그야 당연히 제방 건설 때문이죠. 그 문제로 중앙의 자금을 지원받게 됐잖습니까?”

“하지만 자금 지원을 빌미로 에렐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합의서까지 받았잖아요.”

분명히 카시안이 그런 내용의 합의서를 내게 보여줬었다. 인장까지 제대로 찍힌 문서였으니 가짜는 아니었다.

“이거 합의 위반 아니에요?”

하지만 인세티아 남작이 무어라 내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문제는 제가 설명하지요.”

‘윽.’

나는 목소리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건 메이슨 목소리잖아.’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내 질문에 대답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나 내 생각대로 학자답게 안경을 낀 회백색 머리의 남자, 캐서린의 물고기 중의 한 마리인 메이슨이 그곳에 서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 인사는 생략해도 되겠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메이슨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빛났다. 그 무심한 눈동자 때문인지 높임말을 쓰고 있음에도 전혀 정중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메이슨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나보다 멍청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멍청하다. 그러니 나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주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메이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일하게 메이슨의 인정을 받은 게 여주인공 캐서린이었고 말이지.’

그에 비해 멍청한 악역 이브리아는 메이슨이 가장 경멸하는 상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난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나는 똑똑한 캐릭터를 좋아했다. 똑똑한 걸 믿고 거만하게 구는 캐릭터는 더 좋아했고, 그렇게 거만하게 굴어도 대적할 사람이 없는 캐릭터는 더더욱 좋아했다. <레이디 캐서린>에서는 메이슨이 딱 그런 캐릭터였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이제는 모두 과거의 유산일 뿐이었다.

‘지금 메이슨은 나의 적이라고, 적!’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이미 알아서 인사를 생략하신 뒤에 그렇게 물으시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내 질문에 메이슨이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굳이 인사를 하고 싶은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먼저 그렇게 생략해버리시면 이쪽이 기분 나쁘죠.”

“당신의 기분이 나쁘다니.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군요. 역시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화법에 나 대신 인세티아 남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메이슨은 그런 남작의 언짢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작이 이미 말했다시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제방 건설 건으로 지원하게 된 중앙의 자금 때문입니다.”

“자금을 빌미로 에렐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는 당연히 보셨겠죠?”

“물론 봤습니다. 왕국의 모든 문서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에렐에 오셨군요.”

“요청한 자금의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과연 이대로 지급해도 좋을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죠.”

“그걸 굳이 각하께서 하러 오신 거고요?”

“다른 사람의 판단은 믿을 수 없어서요.”

메이슨이 다시 한번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통탄할 일이죠. 왕국에 이처럼 믿을만한 인재가 없다니…… 최소한 멍청하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메이슨이 멍청하다고 말하는 저 인재들도 모두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여지없이 모두 쓸모없는 멍청이가 됐다. 덕분에 그는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하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도 혼자 붙잡고 있다 보니 일거리가 늘 넘쳐났다.

‘이번에 에렐에 온 것도 정말 다른 사람의 판단을 못 믿어서 그런 걸 거야.’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었다.

“이유는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아닙니다. 대비하지 않은 상태의 영지를 보고 싶었던 터라. 지금이 딱 좋습니다.”

“……지금 이 상태가요?”

“네. 적당히 어수선하고, 적당히 어설프고. 구멍이 있다면 찾아내기 좋겠군요. 훌륭합니다.”

‘너만 좋으면 다냐.’

메이슨의 말에 나와 남작의 얼굴이 동시에 썩었다.

* * *

메이슨은 다음 날부터 곧장 영지 곳곳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방 건설 자금을 집행할 사람이라는 소식이 퍼졌는지, 영지 사람들은 그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영지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메이슨은 공식적인 카시안의 지지자였다. 당연히 카시안이 에렐에서 공을 세워 다음 왕으로 선택받는 것을 바랄 것이다.

‘어차피 자금 지원을 철회할 생각도 없을 거면서.’

물론 메이슨이 카시안을 왕이 될 재목으로 인정해서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메이슨은 캐서린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그럼에도 메이슨이 카시안과 리던 중 카시안을 선택한 건 캐서린 때문이었다. 어차피 둘 다 미덥지 못한 모지리라면, 캐서린이 선택한 모질이가 조금 더 낫지 않겠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카시안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메이슨의 지지는 불완전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메이슨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반갑지 않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재상이 왔다고요.”

“그 메이슨이 말이지.”

그가 에렐에 와서 영지 곳곳을 탐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카시안과 리던도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리던은 카시안을 지지하는 메이슨이, 카시안은 어설픈 지지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메이슨이 불편한 기색이었다. 덕분에 우리 세 사람은 모처럼 같은 심정이 되어 서재에 틀어박혔다.

“이게 다 카시안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잖아. 요령 있게 자금만 끌고 올 것이지, 왜 메이슨까지 불러들여?”

리던이 의자에 기대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카시안은 그런 형님의 타박이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불렀습니까? 알아서 온 걸 저더러 어쩌라고. 저도 그 사람한테 바라는 건 돈뿐이었습니다.”

“그것 참…… 속물적인 대사네요.”

내 말에 리던이 코웃음을 흘리며 동조했다.

“저 자식은 원래 속물이었어. 속물이 속물적인 대사를 하는 건 당연하지.”

“제가 왜 속물입니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당연하죠.”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도 왕의 중요한 덕목인데.”

가볍게 이어지던 대화에서 ‘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카시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갑자기 왜 그렇게 얼어?”

민감한 말을 꺼내놓고도 리던은 태연했다. 그 모습에 얼어붙었던 카시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쪽이 이상한 겁니다. 지금 저와 형님이 뭘 두고 경쟁하는 건지 잊었습니까?”

“경쟁은 경쟁이고. 할 말은 하는 거지. 어차피 결정은……”

리던이 말끝을 흐리며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온 카시안의 눈까지 내게 꽂히자, 나는 민망해져서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못 보던 사이에 두 분이 좀 친해지신 것 같네요.”

마주 앉아 농담 따먹기나 하는 두 사람이라니. 왕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여긴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 곳이니까. 마음이 조금 넉넉해진 거지.”

“게다가 공공의 적도 있고요.”

카시안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그걸 무찌르기 위해 잠깐 손을 잡을 순 있습니다.”

카시안의 말에 리던이 유명한 문구를 덧붙였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로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

“기초적인 정치학이죠.”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설마 그 공공의 적이 저인가요?”

내 질문에 리던이 책상에 턱을 괴며 웃었다.

“아니. 우린 강의 범람을 말한 건데. 찔리는 구석이 있었나 봐?”

“저도 양심은 있는 인간인지라.”

“그걸 안다면 일거리를 적당히 줄여주는 게 어때?”

“전부 테스트의 일환이라니까요. 그걸 어떻게 줄여요?”

“퍽이나.”

리던이 코웃음을 흘렸다. 에렐의 수많은 서류와 씨름하는 동안 내가 단순히 자신들을 부려먹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아무튼 영리한 놈들은 눈치도 빠르지.’

하지만 눈치가 빠르면 자기들이 어쩔 건가. 왕을 고르는 건 나인데.

‘에렐에 있는 동안에는 내 말에 거역할 수 없다고.’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그들에게 일거리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이슨 재상의 안내는 두 분께 맡기겠어요.”

“뭐라고요?”

“뭐?”

곧장 반발이 돌아왔지만 나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어차피 강의 범람 문제는 두 분께 일임했잖아요. 메이슨 재상도 그 일로 여기 온 거니까, 당연히 그분의 안내도 여기 있는 두 분의 몫이죠.”

내 말에 두 물고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니 쉽게 반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서 조금 더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건 리던 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카시안의 몫이지. 난 제방 건설 말고 상류에 보를 짓는 일을 맡고 있으니까.”

하지만 카시안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하나로 연결된 일입니다. 제방 건설 비용이 남으면 상류의 보 건설에도 보탤 수 있고. 안 그렇습니까?”

카시안이 자기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일념으로 리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야?”

“예. 이렇게 나갈 겁니다.”

두 사람의 눈이 팽팽하게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지리멸렬한 승부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가볍게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문제는 두 분께서 사이좋게 논의해서 결정하세요. 누구든 메이슨 재상만 떠맡아주면 되니까요.”

당당한 내 말에 리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떠맡긴다는 의식이 있긴 한 거로군?”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양심은 있는 인간인지라.”

하지만 그 양심에 따를 생각이 없을 뿐이다. 나는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랜만에 이 대사를 내뱉었다.

“그럼 두 분 모두 힘내세요. 왕위를 위해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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