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156)

* * *

도중에 상황이 이상해지기는 했으나, 원래 리안트로 숲을 찾은 목적은 루셀 탑에 태양의 심장을 돌려놓기 위해서였다. 마법사들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왕국 북쪽의 에렐로 가서 영주를 찾으세요. 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렐이라. 그곳이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군.”

“네. 그렇게 되겠죠.”

나는 부디 엘프들이 추위에 강하기를 바라며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전 먼저 루셀 탑에 갈 거예요. 태양의 심장을 돌려놔야 하거든요. 이게 제자리에 없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태양의 심장.”

내 손에 들린 붉은 돌을 바라보며 타라문이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태양의 심장을 가져와 얻은 피해가 있다면 반드시 보상하겠다. 엘프는 은혜와 빚을 잊지 않는다.”

“원흉은 엘프들이 아니라 마법사들이죠. 보상은 그쪽에서 받을 거예요.”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마법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선 도움이 하나도 안 됐으니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라. 응?’

은근한 압박이 담긴 말에 마법사가 어깨를 바짝 굳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꼭 보상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법사의 말에도 타라문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우리가 일을 키웠으니 꼭 보상을 하고 싶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생명수도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타라문이 품에 소중하게 안은 나뭇가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다른 쪽에서 받을 보상이 있으니 괜찮다고 거절했는데도 굳이 보상을 주겠다니, 이쪽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보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마침 엘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그럼 혹시, 나무 말고 다른 걸 키워 본 적은 없나요?”

“나무 말고 다른 거라면?”

“밀이나 보리 같은 거요.”

고기와 와인이 귀족들의 주식이라면, 빵과 맥주는 평민들의 주식이었다. 밀을 재배하면 빵을, 보리를 재배하면 맥주를 만들 수 있으니 에렐 안에서 평민들의 주식을 모두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영지의 자립도가 높아져.’

영지의 자립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른 영지나 중앙 왕실의 눈치를 덜 볼 수 있었다. 그건 곧 나의 아름다운 고립 생활이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어떤 땅에서도 싹을 틔울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싹이든, 엘프의 손이 닿으면 풍성해진다.”

“에렐은 아주 추워요. 그곳에서도 가능할까요?”

내 질문에 타라문은 한마디로 대답했다.

“우리는 엘프다, 길잡이여.”

그 어떤 대답보다 확실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보답은 그걸로 하죠.”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렐에 밀과 보리가 자라게 해 주세요. 그 척박한 땅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이번에 우리가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다.”

타라문이 그렇게 대답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럼 길잡이여, 우리의 새로운 터전에서 다시 만나지.”

정중한 인사 뒤로 엘프들이 하나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불타 버린 숲을 애도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노래였다. 희망을 위한 노래. 그 아름다운 합창을 들으며 나는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 * *

나와 해리는 와이번을 타고 다시 루셀 탑으로 돌아왔다. 에렐을 나설 때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많고 많은 사건들을 거쳤더니 이제는 해가 뚝 떨어진 저녁이었다.

‘엠마와 인세티아 남작에게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거라고 말해 뒀는데.’

두 사람 모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빨리 붉은 돌만 돌려주고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마법사 협회와의 만남은 인세티아 남작과 그들에게 받을 보상을 논의한 뒤에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해리는 이번에도 나를 업고 금세 루셀 탑의 정상까지 올랐다. 역시나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잘했어요, 해리. 오늘 하루 종일 고생 많았어요.”

나는 정상에 도착해 땅에 내려오자마자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오늘 해리는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를 업고 두 번이나 루셀 탑을 올랐고, 강한 불로 트롤까지 모두 쓸어버렸다. 어쩌다 보니 우리 개 잘한다며 옆에서 박수나 치고 있던 내가 그 영광을 모두 가져가 버렸지만 말이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이건 개한테나 칭찬이라고.”

해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비죽였다.

“칭찬해 줄 생각이라면 제대로 해 주면 안 돼? 네 말대로 난 오늘 고생 많이 했으니까.”

“제대로 하는 칭찬은 어떤 건데요?”

“뭐, 뻔하지.”

해리가 제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혀 깍지 낀 손이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오늘 계속 다른 놈들하고 놀았으니까, 이젠 나하고 놀아 줘야 해.”

“놀아 줘요? 여기서요?”

“장소가 중요해? 어디서든 놀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루셀 탑은 처음 찾았을 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훨씬 고요하고 차분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해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약간의 한기가 섞여 있었다. 햇볕이 강할 때는 그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지만, 해가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조금 춥게 느껴졌다.

‘카시안이랑 캐서린이 여기서 키스했었지.’

과연 그럴 만한 분위기였다.

‘저절로 낭만이 생기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휘영청 떠오른 달빛까지 내려앉아 불빛이 없어도 조명을 켠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어딜 보는 거야?”

해리가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주변을 둘러보는 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바라본 해리는 불만을 가득 담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너랑 있으면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넌 나랑 있어도 딴생각을 훨씬 많이 해. 지금도 딱 그래. 난 그게 정말 짜증 나.”

“그게 왜 짜증 나요? 해리도 내 생각 말고 다른 생각 하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인데요?”

“다른 생각을 하라고?”

내 말에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안 되니까 문제지. 할 수 있으면 나도 진즉에 그렇게 했거든!”

해리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답답하고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혼자만 그러는 게 그렇게 억울해요?”

“그럼! 나 혼자만 이러는데 당연히 억울하지. 너라면 안 그러겠어?”

“원래 개는 자기 주인님한테 손해 보고 사는 거예요. 다른 개들도 다 그래요.”

내 말에 해리가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나 개 아니라니까!”

“어떨 때는 내 개라더니, 어떨 때는 아니라고 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해요?”

“장단이 바뀔 때마다 그 장단에 맞춰 주면 되지!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난 네 개인데!”

“이것 봐. 지금은 또 내 개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맞춰 주기 참 힘든 악마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내 개인데.’

주인 된 도리로 잘 달래면서 키우는 수밖에.

“그럼 내가 지금 해리 생각밖에 못 하도록 만들어 보든가요. 그럼 되잖아요.”

내 말에 씩씩대던 해리가 조금 진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

관심 없는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 말에 상당히 혹한 눈치였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내 생각밖에 못 하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방법은 알아서 찾아야죠.”

“뭐?”

해리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원하는 건 스스로 쟁취해야 의미가 있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어떻게 하면 해리 생각밖에 안 할 것 같은데요?”

해리를 빤히 바라보며 질문하자, 그가 세계 최고의 난제를 만난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해리는 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이나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내 뺨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넌 정말 어려운 부스러기야.”

“그건 인정. 내가 좀 어려운 편이죠.”

확실히 내가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해리에게는 일부러 더 어렵게 구는 경향도 있었다.

‘악마에게 주도권을 뺏기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지.’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언제나 나여야만 한다.

“그런데 나 이제 부스러기는 아닌데요.”

나는 씩 웃으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성년이 되는 생일 파티 때 같이 춤도 췄으면서, 벌써 잊어버린 거예요?”

이제는 이브리아도 제대로 성인이었다. 제대로 성년의 생일 파티까지 열었으니 어딜 가더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게 보통 성년식도 아니었지.’

무려 성인이 됨과 동시에 에드실라의 눈을 선물받고, 성검의 주인인 것까지 밝혀진 떠들썩한 생일 파티였다. 같은 날 열린 왕세자의 성대한 약혼식까지 묻어 버릴 정도로 아주 대단했다. 덕분에 이브리아 오베론이 성인이 됐다는 걸 모르는 왕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부스러기라는 말은 금지. 어때요?”

“금지는 무슨.”

내 말에 해리가 코웃음을 쳤다.

“내 눈에 넌 여전히 부스러기거든! 이제 고작 열여덟이면서.”

“그 열여덟 살 부스러기한테 입 맞추고 얼굴 벌게진 건 어디의 누구였죠?”

삐. 여기 있는 이 악마입니다. 정답이 분명한 질문에 해리의 얼굴이 처음 입을 맞췄던 순간처럼 새빨개졌다.

“야, 넌, 뭐!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냐?”

“그럼 부끄러워하면서 말할까요?”

“그냥 말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어?”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붙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진짜. 넌 쉽지 않아. 너무 어려워, 이브리아 오베론.”

그렇지 않아도 가까웠던 서로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코앞에 바로 해리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쉬운 문제보다는 어려운 문제가 좋지 않아요? 풀었을 때 더 짜릿하잖아요.”

해리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대답하자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희미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오고, 옅은 웃음기를 담고 있던 눈은 서늘해졌다. 달라진 분위기에 주변의 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너무 놀렸나?’

아무리 내 개를 자처하고 있다고는 해도 해리는 2천 살 먹은 악마였다.

‘어린 인간 여자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건 싫겠지.’

나는 뒤늦게 반성했다. 내 개의 자존심을 챙겨 주는 것도 훌륭한 주인의 몫이었다.

‘얼른 달래 줘야겠다.’

해리를 달래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칭찬을 잔뜩 해 주면 된다. 거기다 가볍게 뽀뽀까지 해 주면 금방 기분이 풀릴 것이다.

“해……”

하지만 해리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의 입술로 완전히 입이 틀어 막혔다. 마침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거칠 것 없이 해리가 들어왔다. 대비할 새도 없이 맞이한 상대에 놀라서 몸을 뒤로 뺐지만, 해리가 내 뒤통수를 붙잡는 게 먼저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개가 왜 이래?’

나는 의외의 상황에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그런 내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해리가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채로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풀어 볼까? 어렵다는 그 문제.”

그 말을 들은 내 심정은 딱 이랬다.

‘도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풀 건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모르는 일이 참 많은 악마 덕분에 입맞춤은 대체로 내가 주도하는 편이었다. 해리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내게 입술을 빼앗기고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는 수줍은 소년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풀긴 뭘 풀어.’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해리는 또 자길 우습게 본다며 삐져서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러니까 대충 장단에 맞춰 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내게 입을 맞추는 해리는 평소보다 훨씬 거칠어서, 여유롭게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기 힘들었다. 다급하게 움직이느라 어설픈 구석이 많았지만, 정제되지 않은 그 행동들이 오히려 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읏!”

등을 쓸어 내린 해리의 손이 내 허리에 안착했다. 해리가 가볍게 힘을 주어 허리를 당기자 서로의 몸이 바짝 가까워졌다. 몸이 가까워진 만큼 입맞춤도 깊어졌다. 나를 향해 파고드는 해리를 온몸으로 지탱하는 기분에 금세 숨이 버거워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정신이 아득했다.

“이제 그만…….”

겨우 해리를 밀어내며 숨을 몰아쉬었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리가 다시 내 입술을 깨물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해리의 목줄이 아니었나?’

참 낯선 기분이었다. 나를 대할 때마다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대는 애완견 해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악마 테오하리스와 입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해리가 두렵지 않은 건 내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손이 늘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러워서였다. 혹시라도 강하게 붙잡으면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해리가 살포시 내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구나. 해리가 아닌 테오하리스도 내 강아지네.’

목 안에서부터 울리는 웃음에 입을 맞추고 있던 해리가 멈칫했다.

“도대체 이 타이밍에 왜 웃는 거야?”

해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입속을 맴돌던 웃음이 밖으로 빠져나가자, 해리의 얼굴이 더욱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내 키스가 그렇게 웃겨? 전엔 늘었다며? 이제는 잘한다며? 도대체 왜 웃는데?”

“해리가 좋아서요.”

“…어?”

내 말에 조금 전까지 불만스럽게 씩씩대던 해리의 얼굴이 멍해졌다.

“조, 좋아? 내가?”

해리가 새빨개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말인가.’

나는 지나치게 당황하는 해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요. 나 해리 좋아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강하고, 잘생겼고, 내 말이라면 껌뻑 죽고. 아무리 생각해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가끔 삐지면 잘 달래줘야 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해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편이라, 내가 칭찬하면서 예뻐해 주면 금세 기분이 풀렸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설마, 해리는 나 싫어요?”

내 질문에 해리가 펄쩍 뛰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어? 아니, 좋아! 나도 너 좋아해!”

사실 대답을 듣지 않더라도 뻔한 일이었다. 제발 나 좀 좋아해달라고. 나는 너 정말 좋아한다고. 항상 그런 얼굴로 끙끙대고 있으니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나보다 널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걸?”

“나도 이 세상에서 해리가 제일 좋아요.”

해리는 날 귀찮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귀찮지 않은 존재였다.

‘오히려 내 귀찮은 일을 덜어주지.’

좋아하는 순위로 따지자면 당연히 가장 첫 번째였다.

[지금 이게 무슨 대화입니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피테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한다는 게 그 ‘좋아한다’가 아니잖습니까. 둘 다…….]

“야, 성검. 주인님이 내가 제일 좋다니까 질투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

“도대체 뭐가 아닌데?”

[정말 나이를 어디로 먹은 겁니까, 당신은.]

유피테르가 쯧-하고 혀를 차더니 깨끗하게 해리를 무시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나이를 헛먹은 저 악마놈은 그냥 두시고 태양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도록 하지요. 그게 가장 급합니다.]

“아. 맞다.”

나는 유피테르의 지적에 잊고 있던 목적을 깨달았다. 붉은 돌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했다.

“해리.”

나의 부름에 해리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붉은 돌을 꺼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돌은 평범한 가방에 들어가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크기였다. 하지만 해리가 메고 있는 가방은 안개산으로 떠날 때도 썼던 마법 가방이었다. 크고 묵직한 붉은 돌도 충분히 담을 수 있었다.

“여기에 둘게.”

해리가 공터의 중앙에 태양의 심장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그가 부쉈던 가짜 심장이 있던 자리였다.

‘태양의 심장을 돌려놓으면 여신이 고맙다고 강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심장의 조각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는데도 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네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수가 갑자기 말을 걸었을 때처럼 여신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신까지 만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돌의 상태였다.

“해리.”

“응.”

“혹시 이 돌이 이상하지는 않아요?”

내 질문에 해리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이? 어떤 의미로?”

“기운이 안 느껴진다거나, 기운이 크게 줄었다거나…… 뭐 그렇게요.”

아무래도 생명수 앞에서 있었던 일이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듯했지만, 나는 태양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내 반지로 흡수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태양의 심장을 빤히 바라보던 해리가 이번에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 딱히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해리가 이상한 걸 못 느꼈다면 문제없겠지.’

그 붉은 빛도 큰 의미 없는 현상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사다난했던 루셀 탑의 붉은 돌 문제는 이제 정말 여기서 끝이었다.

‘남은 건 마법사들한테 대가를 받는 것뿐이지.’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해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드디어 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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